사진 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파라 포셋의 부풀린 헤어에 비비드한 패턴의 의상까지. <밀수>의 ‘춘자’로 김혜수가 소화하는 스타일링은 분명 과하다. 나도, 당신도 우리는 당장 쓰기 쉬운 질문부터 입 밖에 낸다. “<타짜>의 정마담 아니야?” 우리는 자칫 김혜수가 앞선 김혜수 자신의 캐릭터를 넘어서지 못할까 괜한 의심부터 한다.

김혜수가 꺼낸 답변에 비하자면, 결과적으로 가장 식상한 건 우리의 질문이었다. <밀수>의 춘자는 김혜수의 캐릭터 역사 안에서 최상위에 올려야 할 멋진 성취로 남을 것이다. 김혜수는 누구도 영화를 보고 자신의 앞선 캐릭터를 거론할 필요가 없도록, 1970년대 바닷가 마을 ‘밀수하는 해녀 조춘자’를 그럴듯하게 창조해 낸다. 마을 토착민들과 달리 외지에서 흘러들어 온 춘자는 믿음과 의심 사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시작부터 장르적 쾌감으로 달리는 영화 안에서, 김혜수는 스토리의 긴장과 플롯을 움켜쥔 채 관객의 멱살을 잡고 달려간다.

가장 장르적인 발판을 딛고, 가장 장르적인 옷을 입고도 김혜수는 진짜를 만들고 관객을 설득한다. 그건 지난 40년간 김혜수가 일군,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배우 김혜수의 고유성이다. 그러니 믿어도 된다. 김혜수의 거의 모든 새로운 시도의 역사를.


사진 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기자시사에서 박수가 나왔어요. 이례적인 일이죠. 그 자리에서 함께 영화를 보셨는데, 호응이 체감되실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그랬죠. (웃음) 그런데 그것도 까먹었어요. 그 자리가 참 중요한 자리이기도 한데 또 그래서 어렵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건 느꼈어요. 보통은 기자회견에서 질문하실 때 ‘영화 잘 봤습니다’ 하는 게 예의상 하는 말인데, 이번엔 굉장히 구체적으로 소감을 얘기하시고 질문을 해주셔서 그게 감사하더라구요. 또 기자시사 상영 전에 무대인사를 하는데 너무 오랜만인 거예요. ‘맞아, 우리가 영화 하면 항상 이런 만남이 있었는데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하는, 거기서 오는 찡한 감정이 있었어요.

장르 영화의 ‘베테랑’ 류승완 감독의 솜씨와 배우 각각의 캐릭터 플레이, 그리고 케미스트리가 영화적인 파워로 환원된 작품이었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보면서 느낀 기대와 감흥도 컸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어느 소도시의 박물관 자료에서 ‘70년대 밀수하는 해녀’에 대해 언급한 한 줄 기사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어요. 그 한 줄에서 이렇게 시나리오가 발전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어요. 처음 꽂힌 건 ‘70년대’라는 시대적 설정이었어요.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하는, 흥미로운 시대예요. 제가 중학생 때였는데 당시 히피 문화도 너무 흥미로웠고, 70년대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70년대 록 음악 문화도 너무 좋아해서 금지곡들도 막 듣고 그랬었어요. 우리 영화에서 음악이 굉장히 중요한데, 시나리오에 이미 어떤 음악이 배치되는지 다 명시가 돼 있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스태프나 배우들한테는 흥미로운 가이드 작용을 해줬어요.

<밀수>

촬영 전부터 그 음악들을 익혔겠어요. 1970년대 유행가(최헌의 ‘앵두’, 한대수의 ‘하루아침’,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캐릭터들의 내면을 대변하기도 하고, 쉴틈없이 몰아치는 이 영화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 시키기도 하는데요.

우리 현장에 <연안부두>는 늘 켜져 있었어요. 대기하거나 준비할 때는 늘 듣는 거죠. (웃음) 스태프가 제 생일 선물로 김트리오 LP판이랑 휴대용 플레이어를 선물로 줬는데, 전 그날 이후로는 그걸 계속 가지고 다니면서 듣기도 했고요.

‘춘자’는 시작부터 도드라지는 캐릭터예요. 영화 속 주 무대인 군천에서 나고 자란 선장(최종원)의 딸 진숙(염정아)과 달리, 고향을 떠나 흘러 흘러 이곳에 온 ‘근본 없는’ 이질적인 캐릭터인데요. 그래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춘자와 진숙은 극명하게 대비됨으로써 서로를 더 잘 설명해주는 관계이자, 서로를 보완해주는 인물이기도 해요. 둘의 워맨스, 연대가 이 영화를 지탱하는 굳건한 축이기도 하죠.

진숙은 작은 해안가 마을에 배를 가지고 있는 선장 아버지의 딸, 이를테면은 나름 금수저거든요. 그럼에도 진숙이라는 사람이 가지는 성정은 이곳의 리더로 너무나 손색이 없는 그런 진중한 인물이잖아요. 늘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해녀들의 생계,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인간적인 의리가 있는 인물이죠. 춘자는 정반대예요. 늘 떠돌이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상처받으며 살아왔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삶을 이어가야 하는 캐릭터예요. 아마도 어쩌다 보니 특별한 목적 없이 군천에 오게 됐을 거고요. 그런 춘자를 처음으로, 어쩌면 정말 유일하게 따뜻하게 받아준 인물이 아마 진숙이었을 거예요. 자신의 인생에 첫 번째로 따뜻함과 안락함을 준 은인이죠. 춘자한테는 진숙이라는 존재가 친구로서의 우정 그 이상, 가족이자 전부일 수도 있는 존재인 거죠.

<밀수>

춘자의 스타일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외지에서 떠돌다 군천으로 ‘흘러 들어온’ 춘자는 외형부터 남달라요. 70년대 도회지의 ‘멋쟁이’ 컨셉을 멋지게 소화하셨어요. 자칫하면 ‘춘자’보다 ‘김혜수’가 도드라져 보여 과장되거나 겉돌 수 있는 위험부담이 큰 스타일링인데요. 이걸 완벽하게 춘자라는 캐릭터로 승화시키는 배우 김혜수의 내공이 느껴졌어요.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사전에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군천은 항구가 있는 작은 마을이지 도시가 아니에요. 다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70년대의 패션 트렌드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극 중에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시 서울 종로 중심가에서 횡행하던 밀수, 생필품 불법 거래뿐만 아니라, 고위층 같은 경우 모피 같은 사치품을 거래하곤 했거든요. 그런 시대적인 분위기나 볼거리를 춘자에게 적용시키면 그 시대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게 가능할 수 있겠구나, 춘자의 캐릭터에 맞게 적정선에서 표현해 보자고 판단한 거죠. 70년대 서울 트렌드, 당시 패션이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딱 맞는 티, 통이 엄청나게 넓은 나팔바지 같은 것들이 지금 보면 정말 재밌어요. 머리가 또 다들 엄청나게 더벅머리라, 자기 머리인데도 가발처럼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웃음)

춘자의 헤어스타일이 중요한 키워드죠. 파라 포셋(1970년대 방영된 TV 시리즈 <미녀 삼총사>의 배우)의 헤어스타일을 제대로 활용하셨어요.

춘자의 외피는 결국 춘자의 생존을 위한 수단 같은 거라고, 저는 그 수단의 장치라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어요.

<밀수>

액션 장르의 장인이라 할 수 있는 류승완 감독의 액션 스타일이 이번엔 물속에서 펼쳐져요. 몸싸움에 가까운, 짜여지지 않은 투박한 액션 신이 ‘진짜’ 같은 쾌감을 주는데요.

안전을 기했지만 다치기도 많이 했죠. 물속에선 살이 더 약해지는데 살과 살이 부딪혀 마찰이 생기니까. 사실 촬영 전에 ‘우리가 이걸 진짜 한다고?’ 싶었어요. 콘티를 보는데 이건 도저히 CG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근데 우리가 그걸 다 해냈어요. (웃음) 이렇게 본격적으로 수중 액션을 한 건 처음인데, 다들 정말 열심히 해서 기어코 해낸 거죠. 류승완 감독님이 대단한 게 정말 콘티대로 찍었어요. 감독님도 처음 도전하는 거라 엄청나게 고심하셨을 테고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를 하셨을 거예요. 저도 오래 연기를 했는데, 이런 액션은 처음 경험하는 촬영이었어요. 힘든 것보다, 물속에서 스태프들과 배우들 간에 정말 숨을 참고 말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연대감, 이런 것들이 저한테도 정말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생존을 위한 밀수가 투쟁이 되는 과정에서 작은 마을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연대가 돈독해지는데요. ‘믿음’과 ‘신뢰’라는 흔히 남성 중심의 서사를 이끌던 키워드들이 이제는 이곳 해녀들을 결속시켜요. 남성들의 질서가 지배하는 가운데 굽히지 않고 일어나는 여성들의 파워가 전달하는 울림이 큰 영화예요.

맞아요. 여성 서사가 축이 되는 영화, 무겁지 않은 상업영화라 반가웠어요. 투톱 여성 영화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사실 영화를 보면 캐릭터 간의 관계성, 다양한 배우들의 앙상블이 굉장히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성들의 연대가 부각이 되기까지는, 그 캐릭터들 저변에서 활약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합심한 결과이기도 하죠. 전 그게 팀워크이라고 생각했어요.

<밀수>

기자회견에서 상대 배우인 염정아 씨가 ‘힘을 뺀 연기’를 보여주는 데 대해 “나는 좀 힘을 덜어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힘이 들어가 있어서 죽겠다”고 토로하셨어요. 그만큼 그게 베테랑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요, 김혜수씨 입장에서는 어떠셨나요?

불필요한 힘은 부담을 주거나 불편을 주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힘을 줘야지, 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그냥 제가 체질적으로 좀 힘찬 배우인 것 같긴 해요. (웃음) 연기를 오래 하면서 하나 깨달은 건 배우마다 다 기질이 다르고 그 배우의 장점과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배우의 것을 저 배우가 대체할 수 없고, 아무리 좋은 배우여도 완벽한 배우는 없는 거죠. 결국 배우가 가져갈 건 그 배우의 고유성인 것 같아요. 저 스스로 내가 어떤 고유성을 가진 배우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내가 갖지 않은 걸 가진 배우들, 그런 것들을 더 유연하게 쓰는 배우들을 부러워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한 사람이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는 정도는 된 거죠.

마지막으로, 지금의 배우 김혜수에게 <밀수>라는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요?

작품을 할 때 늘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 일을 하는 나는 뭔가 늘 생각을 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정말 우리의 정체성은 팀이라는 것, 나의 정체성은 팀원이라는 걸 가져가게 됐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돈도 주고 사랑도 주고 행복도 주는 일은 세상에 없거든요. 나는 물론 배우로서의 욕망도 있고, 그리고 개인적인 흥미도 있고, 마음이 끌린 어떠한 이유도 있지만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나의 역할은 팀원 중 하나이고, 그 팀원에 맞는 일을 절대 놓치지 않고 해내야 한다는 게 컸어요. 그걸 위해 노력했고, 이번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었어요. 결국 극장에 오시는 건 관객의 선택이죠. 하지만 이런 소재, 이런 장면을 이처럼 멋지게 구현할 수 있는 다른 감독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건 단언할 수 있어요. 감독님, 듣고 계시죠? (웃음)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