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벡델초이스10. 좌측 상단부터 <갈매기> <경아의 딸> <앵커> <연애빠진 로맨스> <오마주> <윤시내가 사라졌다> <장르만 로맨스> <최선의 삶> <헤어질 결심>

‘백델데이2023’이 9월 1일부터 3일까지 열린다. 벡델데이는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영화 속에서 성평등이 얼마나 균등하게 재현되는가를 가늠하기 위해 고안한 ‘벡델 테스트’를 기초로 한국 영화영상 미디어에서의 성평등 재현을 돌아보기 위해 2020년 시작된 행사. 행사에서는 매년 성평등을 훌륭하게 재현해낸 ‘벡델초이스10’을 선정한다. 지난 1년간의 기억을 더듬어 나만의 ‘벡델초이스5’를 골라 봤다. 당신의 벡델초이스는 무엇인가? 22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개봉 및 공개된 한국 영화 중 댓글로 추천해 주길 바란다.


초이스1 #같은속옷을입는두여자 #이상한모녀 #22년11월개봉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벡델 테스트의 제1항목은 ‘영화 속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 나올 것’이다. 이 테스트가 1985년에 고안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제 이 항목은 ‘영화 속에 최소 두 사람의 여성 캐릭터가 주연급으로 나올 것’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같은 속옷을 입고, 한 집에 사는 모녀를 영화 전면에 내세운다. 이정(임지호)은 어릴 적부터 엄마 수경(양말복)에게 욕을 먹고 매를 맞으며 자랐다. 그래서일까 성격도 소심하고, 어깨는 굽어있다. '쓸모없는 년'이라는 폭언을 들으며 무기력하게 엄마의 팬티를 손빨래하는 날들이 이어지던 중, 수경이 운전대를 잡은 차가 이정을 향해 돌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정은 차량 결함을 주장하는 수경의 행동을 의심하고 법정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딸을 친 엄마, 엄마를 고소한 딸이라는 가족의 전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영화는 갈등에 시달리던 모녀가 차츰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뻔한 결말 따위는 허용하지 않는다. 재혼을 꿈꾸는 가운데 자신만 바라보는 딸 ‘이정’에게 지친 엄마 ‘수경’을 연기한 양말복의 호연이 돋보인다. 어디서도 포용 받지 못한 수경에게 묘하게 설득되어 ‘엄마도 그럴 수 있지’라고 끄덕여진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5개 부분에서 수상하고,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초이스2 #성덕 #성범죄 #22년9월개봉

<성덕>

과거 가수 정준영을 열렬히 좋아해 팬 사인회 참석은 물론 방송 출연해 ‘성공한 덕후’로 이름 날렸던 감독 오세연. 한데 그토록 좋아했던 ‘오빠’가 성범죄자로 전락하면서 그녀는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다. 처음에는 그 사람의 팬이라는 게 후회됐고, 부끄러웠다. 팬들 대부분이 여성인데 가해 대상을 여성으로 삼다니, 강렬한 분노와 일말의 죄책감도 곧 뒤따랐다. 다큐멘터리 <성덕>은 졸지에 범죄자 팬이 된 감독이 친구들을 만나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는다. 여성 감독이 잡은 카메라에 담긴 여성 팬들의 복합적인 고민, 솔직한 실패담의 공유는 어느새 위로가 된다.

백델 테스트의 제2항목은 ‘여성들이 서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좋아하는 마음 자체를 욕할 순 없으며,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사랑을 멈추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담긴 영화 <성덕>은 SNS로 알려지면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21년 부산 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 경쟁 부문에 초청받기도.


초이스3 #다음소희 #사회적부조리 #23년2월개봉

<다음 소희>

벡델테스트의 제3항목은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성 캐릭터에 관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다음 소희>는 정주리 감독이 형사 유진(배두나)을 통해 소희(김시은)의 행적을 따라가며 사회부조리에 대해 말한다. 찍는 자, 대변하는 자, 이야기의 주인공 모두가 여성이다. 원청이 하청을 성과로 압박하고, 대표는 팀장을 실적으로 줄 세우며, 팀장은 팀원의 성과를 전시하며 굴욕을 주는 식의 어른들이 주조한 위계의 세계, 그 가장 밑바닥에 현장 실습생이 있다. 영화는 2017년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국 노동 시장의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다가 종국에 아스러진 ‘소희’를 통해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 불평등, 열악한 노동 환경, 불안한 고용구조 등 묵직한 문제들을 소환한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비추는 감독의 카메라는 열여덟, 일터로 향하는 아이들의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그 누구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다고 엄중히 말한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되기도.


초이스4 #사랑의고고학 #가스라이팅 #23년4월개봉

<사랑의 고고학>

눈에 보이는 폭력이 사라지는 자리를 새롭게 차지하는 건 가스라이팅 같은 미시 폭력일지 모른다. <사랑의 고고학>은 관계를 지배하기 위해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인식(기윤)과 가스라이팅이라 부를 법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지 못하는 영실(옥자연)을 통해 연애에서 작동하는 젠더 권력의 불합리한 일면을 보여준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인식과 영실은 8년을 함께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인식의 집착과 그로 인해 관계가 뒤틀려 결국 헤어진다. ​독점적 관계가 남기는 은밀한 폭력과 지배의 순간에 머물렀던 영실은 이별 후 느리지만 꿋꿋하게, 서툴지만 단호하게 변한다.

이완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사랑의 고고학>이 내가 누군가에게 가해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혹시 폭력 상황에 놓인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들을 스스로 들여다보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들여다보는 자료 내지는 재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옥자연은 절제된 연기로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 남긴 후유증의 복잡한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다.

벡델데이는 2020년 첫 행사를 가지며 벡델 테스트 세 가지 조건에 시대상 등을 반영해, ‘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4가지 항목을 추가해 7가지 기준을 새로이 정립한 바 있다. <사랑의 고고학>은 ‘벡델 테스트 7’ 중 ‘감독·제작자·시나리오 작가·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그리고 ‘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 비중이 동등할 것’이라는 항목에 훌륭히 부합한다.


초이스5 #성적표의김민영 #20대여성서사 #2022년9월개봉

<성적표의 김민영> 임지선, 이재은 감독

기숙사 생활을 하며 삼행시 클럽을 만들어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지낸 김민영(윤서영), 유정희(김주아), 최수산나(손다현).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우정도 졸업과 동시에 각자의 다른 생활 속에서 관계가 소원해진다. 너무 좋아해서 가끔 미웠고,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한순간 멀게 느껴져 더 큰 헛헛함을 안겨주었던 스무 살 무렵의 관계들. 누구나 경험해봤지만, 미묘해서 다루기 어려웠던 감정을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성적표의 김민영>을 통해 명료히 포착한다. '기름기 없는 담백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감독의 포부만큼이나 영화는 잔잔한 삐걱거림으로 일관한다. 영화가 포착해낸 젊음의 찰나는 그 시절 나를, 그리고 내 기억 속 누군가를 곱씹게 만든다. 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영화는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서울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을 수상했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