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디슈>(2021)에 이어 <밀수>는 조인성과 류승완 감독의 두 번째 만남이다. 그게 이즈음 조인성의 작은 변화로 읽혔다. <비열한 거리>(2006)와 <쌍화점>(2008)에서 유하 감독과 연속으로 작업을 한 적은 있지만, 매번 다른 배우와 작업하는 감독의 스타일 안에서, 조인성은 각각 온전히 따로 존재하는 분명한 스타였다.
류승완 감독과의 결속력이 조금 달라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참이다. 초기작의 임원희부터, 동생이자 배우인 류승범, 그리고 황정민까지, 매 작품 배우와 페르소나보다 친근한 이름인 ‘프렌드십’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류승완 감독에게, 조인성은 마치 ‘류승완 사단’의 새 멤버 같은 연결성을 안겨 준다. <모가디슈> 촬영 이후 류승완 감독은 조인성이 다른 작품을 촬영 중이라는 걸 알고도 ‘얼마 안 나오니 잠깐 와서 찍고 가라’고,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일단은 할 수 있는 사이다. 잠깐 나온다는 ‘권상사’ 역이 실은 18회 차나 찍어야 하는 적지 않은 촬영 분량인 데다, 영화의 치트키로 만만치 않은 역할을 해야 함을 알면서도, 류승완 감독의 제안을 못 이긴 척 응해준 것도 조인성답다.
앞선 협업으로 조인성을 ‘뼛속 깊이’ 알게 된 류승완 감독의 꿍꿍이, 남김 없는 조인성 활용법은 이렇다. 첫째, 감독 본인뿐만 아니라 조인성의 팬과 관객 모두가 알고 있는 예의 그 강점을 모두 스크린에 담는다. 이를테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리는 ‘전국구 밀수왕’ 권상사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고조될 때 조인성이라는 실물로 등장한 권상사는, 실은 우락부락하거나 악랄해 보일 거라는 선입견을 깨고, 조인성의 기럭지와 핸섬한 이미지로 반전을 주는 매우 스타일리시한 빌런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밀수>의 빌런은 나쁜놈 위에 더 약은 놈, 그 위에 더 악랄한 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상사는 참 적절하게도 특유의 낭만과 유머로 영화에 절묘한 방점을 찍는다.
둘째, 아마 이 이 부분이야말로 류승완 감독에게 매우 절실한 필요일 거라 짐작되는데 김혜수, 염정아, 박정민, 그리고 고민시까지 주요 배역 모두가 류승완 감독과 첫 작품인 배우들 사이에서, 조인성은 연기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현장에 섞여들어, 배우들과 감독을 연결해주는 작품 외적인 역할을 부여받는다. 조인성이 이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해냈는지는, 배우들의 증언으로 속속 확인된다. 한 가지가 더 있다. 류승완 감독은 이미 <밀수>에서 우리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권상사의 액션신에서 조인성의 스타일을 십분 활용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 다음에 액션영화 한 편 찍어볼까”라는 제안을 넌지시 건넸다고 한다. 세 번째 작품의 가능성을 슬쩍 던진 셈이다.
조인성이 배우로서 새로운 챕터를 써나가는 데 있어서, 류승완 감독과 함께라 좋다. 권상사의 스핀오프든, 어느 새로운 액션영화든, 류승완-조인성의 협업이 불러올 기분 좋은 효과를 우리가 당분간 더 많이 소비하고 싶은 것만은 확실하다. 류승완 감독이 참 잘했다.
엔딩크레딧 이야기를 먼저 하죠. 우정출연 느낌으로 ‘그리고 조인성’으로 크레딧을 장식했어요. 김혜수, 염정아 등 주요 캐스트들의 이름이 지나고 나서죠. 류승완 감독과 <모가디슈>부터 이어져 온 신뢰가 바탕이 된 출연 같더라고요.
감독님이 뭐랄까, 스페셜하게 챙겨주려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쿠키 영상과 맞물려 감독님의 계산도 있었던 것 같고요.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이제 너는 내게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런 암묵적인 게 있지 않나 싶어요. 제 목표는 (정)만식 형보다 류승완 감독과 더 많은 작품을 하는 거예요. <모가디슈>도 함께 했던 만식이 형의 최근 눈빛이 ‘너 요즘 너무 자주 나오더라’ 그런 눈빛이더라고요. (웃음)
마치 류승완 감독 사단에 합류한 것 같은 느낌인데요. 어떻게 섭외를 하시던가요.
전화를 하더니, 가타부타 딴 말 없이 “스케줄 돼?” 하더니 “아니다” 또 그래요. (웃음) 머뭇거리시는데 뭔지 알겠더라고요. 제가 이미 <무빙>(디즈니플러스 시리즈)을 들어가는 걸 아니까 스케줄이 안될 걸 알아서 말 꺼내기가 힘들었던 거죠. “아니, 내가 그냥 자기를 두고 썼는데… 거기 맞춰서 대사를 다 바꿨어.”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나오는데요?” 하니까 “얼마 안 나와. 그냥 와서 밥이나 한 끼 먹고 가면 돼.” 마침 <무빙>을 쓴 강풀 작가가 류승완 감독님이랑 정말 친해요. 서울 강동구에 거주하는 친구들이죠. 그래서 일정 확인하고 출연하게 됐죠.
‘잠깐’이라고 하기엔 권상사의 활약과 비중이 너무 큰 거 아닌가요? (웃음)
제가 18회 차를 찍었어요. 다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또 연락이 와서 “나 또 기막힌 아이디어가 생각났는데, 하루만 좀 빼줄 수 있을까” 하면서 또 늘고. (웃음) 안 그래도 촬영 첫날 정경호한테 안부 전화가 왔는데, 제가 류승완 감독님 영화 잠깐 도와주러 왔다고 했더니, 그 정도면 주요 배역이라고 하던데요. 그런데 그동안 항상 주인공만 해서, 이 정도면 제 영화 중에서는 분량 상으로 가장 짧긴 해요. (웃음) 사실 류승완 감독님 같은 분과 작업하는 것에 있어서 대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머릿속에 뭔가 있기 때문에 역할이 크든 작은 내 몫을 주신 거니까요. 저도 제 몫을 어떻게 잘 해낼까, 하는 고민만 하는 거죠.
배우로 살아온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요. 말씀을 듣다 보니, 작품 선택에 있어서 이제 스스로 유연해짐을 느끼나요.
그런 문제를 늘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최근에 이런 생각은 좀 해봤어요. 연기라는 게 매 순간 제로 값이구나, 매 작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산 넘어 산이구나. 곧 나홍진 감독님이 연출하는 <호프> 촬영에 들어가는데, 그때도 제로 값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물론 한 작품이 잘 돼서 그로 인한 버프, 효과를 가지고 갈 수도 있는데 그게 또 다음 작품에서 발휘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투자를 받을 때 좋은 컨디션이 되긴 하지만, 그건 제작사가 누릴 부분이죠. 그런 면에서 이 일이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작은 역이라고 연기 부담을 가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조금 더 가볍게 출발할 수 있는 작품도 하고, 전력투구해야 할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행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필모그래피가 다채롭고 다음 작품을 기대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도 지금의 내 몫이겠다 싶어요.
류승완 감독은 배우 조인성을 캐스팅한 것도 있지만, 촬영 현장에서 믿고 의지할 만한 ‘심정적 친구’를 기대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바로 그게 ‘그리고 조인성’이라는 여운 가득한 크레딧에 대한 정의 아닐까요.
제가 뭔가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게, <모가디슈> 찍으면서 모로코에 가서 제작진 모두 5개월을 같이 살았잖아요. 그 정도로 지내다 보면 서로 좋은 모습만 볼 수는 없죠. 사람 사는 게 그렇잖아요. 그렇게 예상치 못한 민낯도 보게 되고, 서로 결이 맞는지도 보셨겠죠. 어쨌건 제가 그때 감독님께 좀 잘했던 것 같긴 해요. (웃음) 감독님 힘드실 때 내가 먹으려던 순댓국도 드리고, 소주도 한 병 넣어드렸죠. 그때 고생했던 최영환 촬영감독님, 이재혁 조명감독님, 조성민 PD님을 비롯해 제작진 거의 대부분 이번에도 함께 하니까 알게 모르게 신뢰가 쌓인 것 같아요. 그러니 안 할 수는 없죠. 다만 대본을 꼼꼼하게 보긴 했어요. 해녀들 이야기라는데 혹시나 내가 물에 들어가는 일이 생길까 봐. (웃음)
그런 관계가 <밀수>의 권상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해녀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을 축으로 대립하는 장도리(박정민) 등의 사건이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가운데, 악명 높은 빌런 권상사는 낭만이 있는 나쁜놈으로 극에 숨통을 주는 역할이에요. 나쁘다고 정의는 되는데, 좀 허당인 듯 우습고 귀엽고 로맨틱한 면모를 복합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해요.
완벽하고 강력한 빌런은 이미 이 영화에 존재하고 있으니, 제가 그 캐릭터와 겹치거나 상충되면 안 되죠. 그래서 권상사에게는 좀 허술한 면이 부여된 거죠. 등장할 때부터 춘자에게 못된 짓을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빈 구석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이 개념을 가지고 권상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어요. 품위 있게 좀 덜 양아치스럽게, 그리고 매너 있게, 그처럼 단면적으로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야 관객들이 이 캐릭터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확실히 류승완 감독이 조인성을 ‘참 잘 써먹었다’ 싶었어요. (웃음) 권상사의 매력은 조인성이라는 사람의 ‘인성’을 평소 아는 감독이 캐릭터와 잘 연결하고 활용해서 완성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연히 발견된 특징들이 많았어요. 배에 올라갔는데 배가 움직여서 제가 넘어지며,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제 표정이 일그러졌는데 감독님께서 그 표정을 보시더니 “이거다 이거다 이게 또 권상사의 모습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걸 놓치지 않으세요. 군천에 가서 춘자와 만나는 장면에서도, 위스키를 주고 한 바퀴 돌 때 현장에서 노래를 틀어주시며 “돌아봐” 하시더라고요. 그러자 바로 “이게 웬 신선한 표현이야!” 하고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웃음)
지포 라이터를 켜는 장면도 그런 과정의 결과물인가요? 영화를 본 후 관객들이 많이 수긍하실 텐데, 별스럽지 않은 동작으로 웃음을 만들어 내는 모습에서 조인성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장면이었어요.
옛날에는 그걸 가지고 많이 놀았거든요. 그때 기억으로 레디, 액션 하는데 한번 손놀림을 해봤어요. 딱! 했는데 열리면서 감독님이 “컷!” 하고 나서 막 웃었어요. 그런 건 또 언제 준비했냐고. (웃음) 사실 그냥 한 건데 준비한 설정으로 생각하신 거죠.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권상사의 캐릭터가 됐어요. 오래 활동한 배우들은 느끼지만, 현장에 가면 자신의 연기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치 프로듀서 같은 마음이 있어요. 고된 현장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강력한 브릿지가 필요하겠구나, 그 역할을 누가 해줘야 할까, 그 고민을 더불어 하면서 이번 현장에 온 거죠.
이처럼 연기에 대해 스스로 낮춰서 이야기하기에는, 이번 영화에서 레전드라 불릴만한 액션신을 몸소 연기하셨어요. 장도리가 권상사의 뒤통수를 치러 오는 호텔 장면의 강렬함이 이 영화의 또 다른 긴장을 불러오는 신인데요. 몸과 몸이 부딪히는 리얼한 액션신은 류승완 감독의 전공 같은 장면이자, 말 그대로 영화 팬들을 흥분하게 하는 액션신이었어요. 좁은 실내에서 칼부림을 피하는 권상사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던데요.
감사하게도 그 장면을 명장면으로 많이 뽑아주시더라고요. 근래 나온 액션 장면 중에서 가장 임팩트가 있었다고요. 제 생각에 류승완표 액션영화로 볼 때는, 이 정도면 살살 찍은 거 아닌가요? (웃음) 그동안 워낙 감독님이 레전드 액션신을 많이 남기셨잖아요.
본격적으로 좀 더 조인성의 액션을 보고싶다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데요.
안 그래도 감독님께서 다음에 본격적으로 액션 영화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셨어요. (웃음) 전 이번 작품 하면서 ‘참 다행이다’, ‘참 재밌게 놀았다’ 싶어요. 만약에 <밀수>를 안 했으면 굉장히 후회했을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나왔나 안 나왔나를 떠나서, 안 그랬으면 혜수 선배, 정아 선배를 못 만났을 거 아니예요. 그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요. 배우들이 오래 활동을 해도 만날 기회가 항상 오지는 않아요. 전도연, 고현정 선배님도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됐고요.
영화뿐만 아니라 곧 tvN 예능 <어쩌다 사장> 촬영으로 미국에 가요. 분식처럼 질리지 않는 편한 토크의 맛이 조인성의 평소 모습과 닮아 있는 화법 같아요. 벌써 시즌 3에 들어가요.
코로나로 많은 게 변했어요. 영화는 특히 직격탄을 맞았죠. 극장에 가지 않는 게 일상이 됐고요. 배우로서 대중을 만나기 위해 그동안 익히 알던 공식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직접 찾아가야지, 하는 거죠. 예능 출연은 효과적으로 빨리 찾아볼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나왔어요. 뭘 할지 고민하던 중, 전 연예인이지만 제 얘기가 별로 드라마틱하지는 않더라고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그래서 가맥집 콘셉트를 생각한 가죠. 여기 오시는 분들이 주인공이에요. 게다가 이건 대사가 없잖아요. 한 분 한 분 ‘식사하셨어요?’ 하는 말을 건네면서, 그분들께 많은 걸 배우는 것 같아요. 배우로서는, 이런 일상적인 말을 하면서 ‘말답게’ 하는 방법도 감을 잡아요. 이걸 저는 왜 나이 43살이나 되어서 깨달았을까요.(웃음)
지금 시점의 배우 조인성을 스스로 평가하신다면요.
잘 견뎠네, 죽지 않고 잘 견뎠네. (웃음) 내 사는 방식대로 해왔고, 결국에는 뭐든 사람 결대로 선택도 하겠죠. 그게 나를 또 만들 거고요. 지금은 거창한 건 모르겠고, 내 앞에 놓여 있는 걸 좀 잘해보고 싶어요. 근래 들어서는 그런 마음으로 우연한 기회에 얻은 것들이 많아요. <무빙>도 원래 계획에 없던 작품이었는데 원작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시나리오도 안 보고 하고 싶다고 했어요. 우연도 잘 보니까 인연이 되고 이렇게 재밌는 일들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정말 앞서 말한 것처럼, 나를 위해서 세팅된 게 아니더라도 이제는 할 수 있고, 또 해보고 싶어졌어요. 저도 궁금해요. 제가 어떤 식으로 또 변해갈지.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