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플러스가 출범하면서 갈곳 잃었던 히어로가 딱 네명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마블과의 협업을 통해 시작된 '디펜더스' 4인(데어데블, 제시카 존스, 아이언 피스트, 루크 케이지)이 그들이다.
오리엔탈리즘 논란으로 얼룩진 데다 콘텐츠적 완성도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되었던 아이언 피스트를 제외하고는 나름의 호평을 받으며 좋은 반응을 얻어냈는데, 특히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이 바로 <마블 데어데블>이었다.
'디펜더스' 멤버 중 데어데블이 가장 인상깊었던 히어로였던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궤도에 오르기 전 이미 실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이 히어로의 심연과 고뇌를 잘 짚어냈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낮에는 매튜 머독이라는 본연의 아이덴티티로, 뉴욕의 변호사로 살아가지만 밤에는 강력한 범죄를 처단하는 자경단 히어로 데어데블로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문제들이 드라마라는 긴 호흡 속에서 잘 녹아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지고 보면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에 좋았다'라는 셈인데, 작금의 마블 스튜디오가 벌이고 있는 다양성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들이 그리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을 돌아보면 결국 근본적인 해답은 출발점 부근에 있다는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내년으로 확정된 새로운 데어데블 시리즈 <데어데블: 본 어게인>은 동명의 유명 코믹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데어데블’ 맷 머독의 기원과 능력
'데어데블' 맷 머독은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으면서 초감각을 갖게 된 히어로다. 영화에선 카메오 형태로 등장했을 뿐이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솔로 시리즈 <마블 데어데블>을 안 본 일반 관객에게는 다소 어색한 히어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뉴욕의 자경단 히어로 팀인 '디펜더스'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기도 하며 1964년 스탠 리와 빌 에버렛에 의해 처음 소개된 이래 수많은 이슈들 속에서 많은 히어로들과 함께 싸워 온 전통 있는 캐릭터다.
그는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지는 않았는데, 트럭 사고에서 시각장애인을 구하려다 트럭에 실려 있던 방사능 물질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실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반인의 감각을 초월하는 '초감각'을 얻게 되었고, 잃어버린 시각 대신 다른 감각이 극도로 발달해 히어로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입지를 얻게 됐다.
그에게 학업을 극도로 강요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법과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었으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매튜의 학비를 대기 위해 범죄자와 연루되었다가 결국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히어로 '데어데블'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게 원작의 설정. 낮에는 변호사라는 전문직종 종사자이지만, 밤에는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대표적인 자경단 히어로 중 하나다.
트레이드 마크는 '빌리 클럽'이라는 이름의 합금 곤봉으로, 처음에는 경찰들이 쓰는 곤봉을 사용했지만 이후 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된 붉은색 빌리 클럽을 사용하게 된다. 갈고리 기능에 케이블이 달려 있어 건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데, 그외에도 눈이 보이지 않는 데어데블의 활동을 돕는 다양한 기능이 내장돼 데어데블에게는 필수품이다. 물론 초감각과 더불어 온갖 무술에 능통한 데어데블이기 때문에 딱히 무기가 없어도 불리해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중요.
넷플릭스의 드라마 <마블 데어데블>에서도 같은 기원을 갖고 있는데, 권투 선수였다가 은퇴한 아버지 잭 머독이 갱단에게 살해당하면서 고아원에서 살게 되지만 맹인 무술가 스틱을 스승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초감각을 다루는 방법과 신체 단련법을 배워 무술의 달인으로 거듭난다. 이 와중에 공부에도 힘써(..!!) 우수한 성적으로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되었으며,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자 했지만 합법적인 방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히어로 '데어데블'이 된다.
고전으로 칭송받는 명작, 코믹스 ‘데어데블: 본 어게인’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 기초하는 원작 코믹스는, 데어데블의 이슈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1986년의 명작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다. 소위 그래픽노벨의 명작으로 거론되는 이슈들은 그래픽노벨이라는 특수한 장르를 통해 히어로 코믹스의 깊이 있는 서사를 유의미하게 다루어 낸 것이 특징인데, 이 책은 데어데블의 대표적인 숙적인 킹핀이 처참하게 그를 몰락시키는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데어데블은 믿었던 거의 모든 것들로부터 배신당한다. 옛 연인이었던 캐런 페이지는 자신의 꿈을 찾아 할리우드로 떠났지만 마약에 빠져 버려 '약 한 방'에 데어데블의 정체를 팔아넘긴다. 이 정보는 킹핀에게로 들어가고 뉴욕 헬스키친을 장악하려는 야욕에 불타던 킹핀은 데어데블의 모든 것을 빼앗기 시작한다.
변호사로서의 자격, 재산, 친구와 신뢰하던 지인, 연인까지 모두 잃어버린 데어데블은 결국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리지만 킹핀은 그를 죽인 후 강물로 밀어넣은 택시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데어데블은 죽지 않았고, 결국 헬스 키친의 수호자로서, 데어데블로서 다시금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블 코믹스의 수많은 이슈 중에서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어데블: 본 어게인」은 배트맨 이슈(「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 작가로 참여한 작품이다. 어둡고 깊은 심연을 가진 캐릭터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사람인데, 그 유명한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시작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데어데블 역시 프랭크 밀러의 손에서 다시금 재탄생했는데 그 시작이 바로 이 스토리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명작으로 꼽혀왔다는 것은 캐릭터의 매력요소와 더불어, 깊이 있는 현실성과 비현실적 히어로라는 소재를 함께 녹여내는 밀도 높은 서사를 해냈다는 증명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코믹스 팬 입장에서 이 이슈의 드라마화는 꽤나 즐거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마블 데어데블>의 킹핀, 과거와 현재
물론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되었던 <마블 데어데블> 시리즈는 데어데블 본연의 고뇌와 하드코어한 액션을 통해 캐릭터의 매력을 다시금 대중들에게 선보인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기준으로 MCU에서 다루었던 것들은 뒷골목의 범죄자들이라기보다는, 보다 범위가 큰 세계정복(혹은 우주정복)을 노리는 '슈퍼빌런'이었다. 아무래도 스크린 개봉 작품이니 보다 스케일이 커야 했을 것. 역으로 드라마에서는 보다 지엽적인 적들이 다수 등장했는데 대표적 캐릭터가 <마블 데어데블>의 킹핀이다. 뉴욕의 길거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폭력배들로부터 시작해 킹핀이라는 거물로 나아가는 과정이 보다 긴 호흡으로 그려졌고, 이 때문에 데어데블이라는 캐릭터의 고뇌를 통한 성장과 더불어 점점 큰 압박으로 다가오는 킹핀의 존재감이 더 유의미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넷플릭스의 <마블 데어데블> 속에 등장했던 킹핀과 현재의 킹핀은 다소 대조적인 모습이다.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 <호크아이>에 등장한 킹핀은 이전의 강력했던 모습과는 달리 어딘지 상당히 약해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킹핀은 뉴욕의 암흑가인 헬스키친에서 나고 자라 빌런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자각하고 혹독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일종의 성장 서사를 보여주었지만, 바네사와의 인연이 결국 그를 패배로 이끌었고 그것이 데어데블이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열쇠로 작용했다. 시즌 1에서 FBI에 검거되는 마지막 순간에 '킹핀' 윌슨 피스크는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며, 그저 악의 그 자체임을 깨닫는데 이보다 더 순수한 악의 화신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랬던 킹핀이 조카인 에코 앞에서는 더없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호크아이>에서는 데어데블을 갖고 놀다시피했던 악당의 면모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하는 듯해 보였다. 거구의 킹핀이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은 어쩐지 킹핀답다기보다는 서사에 끌려가는 듯했던 것. 물론 <호크아이> 6화에서는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에코와 대치하며 생사여부를 짐작할 수 없는 상태로 마무리되었지만, 다시금 데어데블의 신규 시리즈 <데어데블: 본 어게인>에 등장을 확정지으며 생존했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물론 <호크아이>에서는 2대 호크아이인 케이트 비숍의 어머니, 엘리너를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수족처럼 부린 데다 에코의 후원자이자 든든한 삼촌인 듯 하면서도 에코의 주변인물들을 가감없이 숙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다. 케이트와 대치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도 보여주었지만, 결국 이 시리즈가 <호크아이>이기 떄문인지... 케이트 비숍의 기지에 무너지고 만다.
정황상으로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헬스 키친을 오랫동안 장악하며 데어데블은 물론이고 뉴욕을 근거로 활동하는 수많은 히어로들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던 원작의 '킹핀' 윌슨 피스크의 행적치고는 어쩐지 좀 나약해 보이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진정한 악의 그 자체, 그게 킹핀의 본질이라면 그가 에코를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눈물바람에 젖는 장면은 좀 자제했어야 하지 않을까. 원작에서도 에코와 대치 상황에서 총을 맞고, 한쪽 눈을 잃은 채 돌아오는 스토리가 있기는 하지만 뭔가 더 애절해 보이는 게 문제였다. 킹핀에게 애정어린 인간성이라니!
말하자면 그래서다. <데어데블: 본 어게인>은 킹핀의 똘똘 뭉친 악의, 그리고 헬스 키친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되는 가장 유력한 인물인 '데어데블' 매튜 머독을 처리하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에 계속해서 데어데블의 히어로로서의 삶은 물론이고 인간 '매튜 머독'의 삶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그 일관적인 악당의 모습이 서사의 주된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호크아이> 가 <에코>로 이어지기 위해서, 또 <에코>에서 킹핀이 다시금 에코와의 결자해지를 하기 위해서는 헬스 키친을 둘러싼 이 복잡한 이야기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뒀겠지만, 그럼에도 킹핀의 본질이 저해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MCU 정식 편입을 위한 기초작업?
물론 <데어데블: 본 어게인>으로 가기 위한 서사적 장치는 충분히 마련되었을지도 모른다. MCU 세계관 내에서 '킹핀' 윌슨 피스크와 그의 조직은 인피니티 워를 거치며 모두 '스냅'되는 바람에 세력이 많이 축소되었다고 하는데, 조직의 위세를 다시금 전과 같이 키우기 위해서라도 킹핀은 데어데블이라는 압도적인 히어로를 어떻게든 처리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위기에 처한 피터 파커를 도와주는 유능한 변호사이자, <쉬헐크>에서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노련미와 함께 매력을 풍기던 자경단 히어로로서 보여준 모습으로 추측하면 그는 이미 저명한 변호사이자 뉴욕의 밤을 지키는 히어로로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킹핀에게는 눈엣가시일 것이고, 그에게 적절한 지략과 이용 가능한 유력 인물들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데어데블을 몰락시킬 여지는 있다.
다만 지난 <마블 데어데블>과 얼마나 연결이 될지, 1년 전 제작 확정 시점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완전한 '리부트'일지, 아니면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그랬던 것처럼 리런치 개념의 소프트 리부트일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의 귀환이 부디 영광스럽기를
데어데블vs킹핀이라는 구도는 <마블 데어데블> 시리즈에서 꽤 심도 있게 다룬 바 있고, 코믹스 원작까지 보면 상당히 유서깊은 히어로vs아치 에너미 관계일 수도 있다.하지만 디즈니 플러스의 출범 이후 기존 <디펜더스>를 위시한 넷플릭스의 드라마 시리즈들이 향방을 알 수 없게 된 바, 가장 인기 있었던 시리즈이자 캐릭터인 데어데블이 다시금 돌아오게 된 것만으로도 히어로무비 팬 입장에서는 반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사실이다.
넷플릭스 드라마는 물론이고 원작 코믹스에서부터 피를 타고 내려온 자신 내부의 폭력성과 정의로운 히어로로서의 자아 사이의 충돌, 수많은 고민, 가히 필사적이라고 할 만한 혹독한 전투 속에서 데어데블은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는 히어로였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물론이고 정체를 숨기려는 노력에, 불살주의자라는 신념 때문에 수만 가지 고통 속에 있어 일각에서는 '영원히 고통받는 피터 파커'만큼이나 고통받는 매튜 머독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뛰어난 두뇌와 강력한 체술을 바탕으로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 왔다.
디펜더스 멤버들 중에서는 유독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건 사실이다. 물론 서스펜스 스릴러를 연상케 했던 제시카 존스도,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보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데 성공했던 루크 케이지도 각자의 매력을 보여주었지만 데어데블만큼 헬스 키친의 어두움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드라마,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 무사히 성공을 거둔다면 그 성과에 힘입어 넷플릭스의 디펜더스 시리즈가 하나둘 다시금 MCU로 공식 편입될 수 있는 입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번 시리즈는, 잠시 주춤했던 킹핀의 강렬한 악당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는 동시에 그를 저지하는 '데어데블' 매튜 머독의 양면적인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어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최근의 MCU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 밀러의 원작에 기반했으니만큼 우리가 기대하는 '그것'을 꼭 보여줄 수 있기를.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