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의 ‘앵두’로 하나가 되는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

영화 <밀수> 사운드트랙이 화제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영화를 본 모두가 1970년대 한국 음악의 매력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풍경이 증명한다. 장기하가 영화 음악을 맡았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당연히 그가 선곡에도 관여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류승완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미 다 끝난 상태였다고 한다. 즉, 이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1970년대 음악은 류승완 감독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음악감독으로서 장기하의 역할은 자신의 스코어가 기왕의 1970년대 음악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장기하는 1970년대 음악광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오래된 미래”라는 수식처럼 그의 음악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등의 음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 중에서 신중현과 산울림의 음악은 <밀수>에서 음악적인 등뼈를 형성한다. 따라서 류승완 감독이 장기하에게 연락한 건 거의 필연에 가까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1970년대 바이브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걸 현대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뮤지션은 장기하 외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밀수> 뮤직 토크 현장. (오른쪽 사진의 왼쪽부터) 배순탁 평론가, 류승완 감독, 장기하 음악감독.

나는 장기하가 빚어낸 사운드가 기왕의 선곡들과 무람없이 어울린다고 느꼈다. 특히 범죄가 벌어지려는 신마다 흐르던 펑크(funk) 연주가 끝내줬다. 만약 당신이 아이작 헤이스라는 흑인 뮤지션을 알고 있고, 그의 대표곡 ‘Theme From Shaft’에 익숙하다면 이 곡이 레퍼런스가 되어줬음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샤프트>(1971)의 주제가이기도 한 이 곡, 꼭 찾아서 감상해보길 권한다. 아이작 헤이스는 이 곡으로 아카데미 오리지널 송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정미의 ‘바람’과 펄 시스터즈의 ‘님아’

창작곡 아닌 선곡을 살펴보면 오프닝을 장식하는 최헌의 ‘앵두’(1977)는 두 주인공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의 테마라고 볼 수 있는 곡이다. 사고 이후 물리적으로 떨어져버린 상황에 놓인 둘의 입을 통해 공히 흘러나오는 노래인 까닭이다. 그러니까, 두 주인공은 불화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는 연결돼 있는 것이다. 또한 이내 화해할 것임을 예고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1960-70년대 한국 록을 상징하는 신중현의 음악은 무려 3곡이 쓰였다. 펄 시스터즈의 ‘님아’(1968), 김정미의 ‘바람’(1973),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1969)다.

발표한 해에 주목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펄 시스터즈의 ‘님아’ 같은 경우, 장르를 따지자면 사이키델릭에 속한다. 그런데 1968년이다. 1960년대 중 후반 미국은 히피가 주도한 베트남 전쟁 반대, 사랑과 평화 운동으로 들썩였다. 그 과정에서 시대의 사운드트랙이 되어준 음악이 바로 사이키델릭이다. 즉, 신중현이라는 선구자는 이 사이키델릭 음악을 거의 시차도 없이 한국에, 그것도 자신의 고유한 창작으로 들여온 것이다. 1960년대 후반 한국 대중음악은 트로트 일색이었다. 반면 신중현은 미8군 무대에서 실력을 갈고닦으면서 바다 건너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음악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 록의 대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이다. 빼어난 재능이란 개인의 자질인 동시에 시대의 소산이기도 한 법이니까.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무인도’

펄 시스터즈 외에 신중현의 또 다른 페르소나는 김추자였다.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1969년대 후반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당시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복무지원금을 받았다. 이 군인들이 들어오면서 동시에 서양문물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지원금 덕에 경제적으로 조금은 더 윤택할 수 있었던 군인들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권’상사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마치 1960년대 후반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인성이라는 배우의 매력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김추자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무인도’를 통해 정점을 찍는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 곡이 실린 앨범 커버는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던 파격을 보여줬다. 성적인 황홀경을 묘사한 듯한 김추자의 사진 속 표정은 발매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으면서 1975년 가요계 정화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김추자는 그런 가수였다. 일례로 그녀는 무대의 장치 하나하나를 ‘직접’ 감독해야 직성이 풀리는 가수였다. (대부분 남성이었을) 타인의 시선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였다. 김추자는 철저한 준비를 위해 분장실을 반드시 따로 썼다. 그러고서는 격정적이면서도 성적인 뉘앙스가 농후한 퍼포먼스와 사자후 같은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했다. 그녀는 통속적인 가요에서도 끝내 비범함을 길어 올리는 가수였다. 그러면서도 감정 과잉, 청승과는 거리를 둔 채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어떤가. 여성 가수로서 김추자의 이렇듯 당당한 태도가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서사와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류승완 감독이 이것까지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밀수>에 무려 3곡이 쓰인 전설의 신중현

마지막으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1978)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곡이 영화에 쓰였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기대를 품으면서도 어떤 장면에 삽입된 것인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긴 그렇다. 산울림은 존재 자체가 예측 불가였다. 우리는 보통 음악을 들을 때 관성적으로 계보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계보는 일종의 권력형 피라미드 구조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음악 역사에 있어 더 중요한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산울림의 음악은 계보에 속해있지 않는다는 인상이 강했다. 대체 누구로부터 영향받은 것인지 가려낼 수 없었다. 그들은 계보 바깥으로부터 계보의 틈새를 찢고 들어온 위대한 예외였다. 그야말로 갑툭튀, 영어로 하면 아웃 오브 노웨어(Out of Nowhere). 그러고는 이후 등장한 수많은 뮤지션/밴드에게 거대한 우산이 되어주었다. 그들이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에게는 이 곡이 쓰인 장면 역시 그랬다. 우리는 어떤 음악이 영화에 사용되었다고 들었을 때 마찬가지로 과거의 경험적 계보를 통해 예측하게 된다. 설마, 이 곡의 템포를 고려했을 때 액션신에 쓰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감독과 음악감독에 따르면 이 곡을 넣으려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장면의 길이에 비해 곡이 짧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길이를 맞췄는지는 비밀이라고 한다. 짐작 가는 바가 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강한 폭발력을 일으키는 후반부 액션신의 권 상사(조인성)


무엇보다 음악평론가의 입장에서 <밀수>가 반가운 이유는 이랬다. “언제쯤 한국영화에서도 창작 스코어가 아닌 선곡만으로도 할 수 있는 얘기가 풍성한 영화가 나올까” 싶었는데 <밀수>가 이걸 해낸 것이다. 뭐, 꼰대처럼 “현재의 케이 팝(K-Pop)도 다 1970년대의 이런 훌륭한 음악이 있어서 나올 수 있었던 거다”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기실 케이 팝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탈(脫)맥락화, 탈(脫)장르화, 탈(脫)로컬화되었기에 도리어 탄생할 수 있었던 탈(脫)국적 음악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이른바 대중음악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7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만 위대한 음악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음악은, 차고도 넘쳤다. 다시 한번 확신한다. 신중현, 산울림, 김추자, 김정미, 펄 시스터즈 정도라면 이쪽도 전혀 꿀릴 게 없다.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배순탁의 비사이드>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