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고, 웃기다. 8월 9일 개봉한 한국영화 BIG 4의 마지막 타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좀처럼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 정서를 경유한다. 이병헌-박서준-박보영이란 캐스팅과 <잉투기>·<가려진 시간>을 연출한 엄태화 감독의 복귀작으로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은, 그만큼 어깨가 무거웠겠지만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킨다.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고, 오직 한곳만 안전하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단 한 문장만으로 수많은 상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토대로 객석을 웃음으로 채웠다가, 숨소리조차 들리는 적막한 순간을 안기기도.
그 과정을 재현하는 데는 연기력으로 정평 난 배우들도 물론 한몫하지만, 영화 전체를 진두지휘한 엄태화 감독의 역량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터. 웹툰 <유쾌한 왕따> 중 2부 '유쾌한 이웃'과 아파트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접목시켜 '대규모 재난'에 '한국 사회의 축소판' 같은 리얼리티를 고스란히 녹인 건 그의 고심 덕일 테다. 코로나19로 유독 다사다난했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끝내 완성시키고, 오랜만에 관객과 만날 엄태화 감독. 씨네플레이는 그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관객과 만나는 기분이 어떠신지요.
드디어!(웃음) 드디어 하는구나 싶어요. 진짜 긴 시간을 했으니까. 2019년 처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으니 4년 차에 개봉하는 거예요. 원래는 작년에 개봉하는 게 목표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미뤄졌어요. 공교롭게도 후반 작업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완성도는 훨씬 더 좋은 영화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간이 더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고요. 중간에 박찬욱 감독님께도 미완성 편집본을 보여드린 적 있는데 그때도 감독님께서 끝까지 프레임 하나까지도 다 넣었다 뺐다 하면서 본인도 <헤어질 결심> 할 때 그렇게 하셨다면서 저한테도 “끝까지 해라” 응원을 해주셔서 정말 열심히 뼈를 갈아 넣었어요. (엄태화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조연출로 함께 했었다)
제목을 박해천 교수의 저서(「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따오고, 스태프들에게 영화 모티브로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여주셨다고 들었어요. 평소 작품을 할 때 자료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지, 이번 작품만 특히 그러셨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잉투기>(2013)라는 작품 할 때를 생각해서 말씀드리면 실제 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해야 되다 보니까 그냥 가볍게 다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실제 잉투기 대회에 나왔던 분들 인터뷰하고 이분들의 생각도 되게 많이 들으면서 했었거든요.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로 배경이 ‘한국의 아파트’다 보니까 이거를 배경으로만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의 아파트는 수많은 맥락들,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 집약된 한국 사회가 거의 이렇게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요.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 아파트라는 것에 대해서 공부하게 됐고 그때 이제 봤던 책이에요. 이 제목보다 더 좋은 제목을 없겠다 싶었어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되게 아이러니한 두 단어가 붙어 있는 게 이 영화랑 너무 잘 맞는다 생각했어요. <게르니카>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모던한 입체파 그림으로 표현했잖아요. 특히나 초반부 모던한 블랙 코미디의 톤과 잘 붙는다는 생각을 했고 동시에 <게르니카>가 가지고 있는, 그 안에 끔찍하고 뜨거운 어떤 불같은 정서가 영화 후반부에 보이는 정서와 맞닿았다고 느꼈어요. 그걸 전반적으로 잘 내포하고 있는 그림이다 싶어서 스태프들에게 공유했어요. 이거를 말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되게 추상적이니까요
올해 여름 영화 중 유일하게 원작이 있는 영화예요. 원작의 어떤 면에 꽂히셨나요?
기본적으로 디스토피아 작품을 좋아하고. 그림이 되게 귀여워요. 되게 끔찍한 내용인데 그림은 귀여워요. 그래서 흥미롭게 보다가 2부(유쾌한 이웃)를 봤는데 아파트가 배경인 거예요. 이거는 정말 한국적인 디스토피아를 표현하기에 좋은 장소다... 저도 아파트에서 자랐고, 50%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잖아요.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고 주거이면서 자산이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갖고 싶어 괴롭고 집이 있으면 집값 떨어질까봐 괴롭고.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럼 원작에서 최대한 유지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면?
방금 말씀드린 아파트가 너무 좋아서 그걸 중심으로 이야기를 세팅했어요. 웹툰에서 2부는 살아남는 아이들이 아파트로 들어가면서 시작해요. 이미 시스템이 정착된 상태고 김 대표, 부녀회장 이런 인물이 나오죠. 그런 설정들은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디스토피아 영화로 바꿨을 때 예산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원작이 아이들의 시점 이야기라 작게 느껴지기도 했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고요. 웹툰에서는 아이들만 데리고도 이야기를 딥하게 하는데, 영화 예산적인 부분 같은 것도 생각하니까 인물들이 더 능동적이고 아파트의 의미적인 것을 다룰 수 있는 캐릭터, ‘영끌’해서 아파트에 들어온 신혼부부면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떠올렸어요. 그리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들이 관객들이 더 몰입하기 편한 부분일 것 같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인공을 바뀌게 됐고 주인공을 바꾸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이 아파트가 어떻게 시스템을 갖추게 됐는지 쓰게 됐습니다.
세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술팀의 센스가 특히 빛났던 부분은?
저는 계속 리얼함을 말씀드렸어요. 그중 재난이 벌어지고 얼마 안 됐을 때 복도와 일주일가량이 지난 뒤에 복도가 나오거든요. 근데 제가 거기 벽에 ‘사람을 찾습니다’ ‘구하는 물건 구하는 것’이라든가 이런 것이 좀 붙어 있으면 좋겠다 말씀을 드렸어요. 나중에 가서 미술팀이 작업한 걸 봤는데 정말 디테일하게 (만드셨어요). 다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종이와 펜도 다 다르고 벽에도 쓰고 엄청난 것들이 벽에 붙어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정말 시간의 흐름이 다 느껴질 정도로. 이것만 읽어도 재밌더라고요. 다 스토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정말 미술팀이 고생 많이 했구나 생각했어요.
실제 세트 짓는 기간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3개월 이상 더 걸렸던 것 같아요.
세트장을 실제로 봤을 때 되게 어땠을지가 궁금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견고해야 했을 것 같은데.
미술 감독님 말씀으로는 실제 아파트 짓는 정도 수준으로 철골부터 세워서… 철골 다 세우고 복도에 깔려 있는 그 테라조 바닥도 진짜 가져와서 썼어요. 원래는 실제 아파트에서 찍고 싶었는데 여건상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찍을 수도 없고 재개발되는 아파트에 가서 찍자니 공사 기간이랑 맞출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지어야 되겠다’가 됐고, 그러면 재개발 단지에 있는 실제 그런 오브제들을 가져와서 우리 세트에 끼웠으면 좋겠다 말씀드렸죠. 실제로 그래서 현관문 같은 거라든가 창살, 화단에 있는 나무랑 난간들 그런 걸 죄다 가져왔어요. 그래서 기본 골조를 만들어 놓은 거기다가 이제 그 옷들을 입힌 거죠. 그래서 정말 리얼함이 사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아파트 주변 폐허들은 전부 CG로 만든 건가요?
아파트 주차장과 뒷마당까지 만들었고요. 주차장에서 이렇게 내리막이 있는데 그 내리막을 한 50m 정도 길을 만들었어요. 언덕에 있는 아파트 설정이라서 이렇게 내려오는 길을 그 정도까지 제작했어요.
재난 장면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재난 블록버스터 하면 떠오르는 많은 영화들이 있잖아요. 그런 영화들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기획부터가 재난 이후 일이 메인이 되는 거니까. 재난 장면이 빠질 수는 없지만 그럼 이걸 어떻게 쓸까 어디에 배치를 할까 고민을 했어요. 이게 앞에 있으면 관객들이 거기에 익숙해져서 ‘더 보고 싶다’ ‘이런 장면들이 계속 나오겠구나’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오프닝을 만들었죠. 오히려 재난보다 그 오프닝 시퀀스가 더 중요했어요. 이 이야기의 세계관은 재난도 재난이지만 이 아파트 공화국 세계관을 설명하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거기에 공을 많이 들였고, 그렇게 보다가 재난 장면이 딱 나오면 ‘이런 재미도 있네’를 더 느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렇지만 이게 중간에 들어온다면 맥을 끊을 수도 있겠는데 싶어서 어디에 어떤 인물의 장면에서 배치해야 될지를 많이 고심했어요. 그러다 민성의 트라우마로, 이야기적으로 연결되게 배치했어요.
아무래도 전기 같은 게 다 끊긴 극단적인 상황인데, 어떻게 현실적이면서 스크린에 잘 보이게 조명 세팅을 하셨을까요?
촬영 조명 감독님과 정말 얘기를 많이 했어요. 리얼리티가 베이스로 깔려 있다 보니까 어두운 장면을 밝게 찍는 순간 되게 가짜같이 보일 수밖에 없고, (관객이) 영화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 같더라고요. 근데 그렇다고 말씀하신 대로 어둡다고 어둡게 찍을 수가 없으니 그럼 이렇게 어두우면 사람들이 뭘 어떻게 할까 라고 고민했어요.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서 빚을 비추고 다니지 않을까, 그게 처음엔 플래시가 있을 테고 촛불이 있을 테고 뭐 그러다가 전기가 없으니까 보조 배터리나 자동차 배터리를 뜯어와서 불을 켠다거나. 그러다 또 계급이 만들어지면서 누구는 자동차 배터리를 집에다 두고 난로도 켜고. 이런 디테일들을 오히려 사용하자는 제안을 이용해서 더 재미있게 빛을 사용해 봅시다라고 힘을 모았어요. 안 보이면 안 되겠지만 보이는, 최소한으로 보이는 그 기술 사용해서 촬영 조명 감독님이 되게 고심 많이 하는 빛 세팅이었어요.
김선영 배우가 '드림팰리스'를 언급하는 장면이 있더라고요(김선영은 영화 <드림팰리스>의 주연 배우다). 사전에 이 영화 제목을 듣고 시나리오에 적용한 건가요?
그거는 정말 우연이고요. 저희 영화가 먼저 찍었어요. 저희 영화 찍고 바로 다음에 찍으신 영화가 <드림팰리스>였는데… 저도 드림팰리스라는 이름이 왜 똑같았을까 생각해봤거든요. 아파트 브랜드 이름이 없는 게 없어요. 어떤 이름들을 조합해도 다 있어요. 그래서 없는 걸 찾다 보니까 ‘드림팰리스’가 나왔던 거거든요. 그쪽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혼자 해봤어요. 서로 아파트 이름으로 없는 걸 찾다 보니까. 그래도 어쨌든 그런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나온 건,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거와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일치했다는 거 아닐까….
아파트 규칙을 설명하는 장면, 확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더라고요. 그 장면의 구도를 그렇게 하신 이유는?
직전 장면이 어떻게 보면 무겁고 심각한 신이잖아요. 그래서 환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걸 블랙코미디를 강화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리얼리티한 영화지만 그 부분만큼은 판타지 같은 콘셉트를 좀 섞어봐야겠
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것, 아파트를 정비하는 과정을 그들이 진짜 나눴을 것 같은 말에서 가져오되 관객한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콘셉트로 가면 재밌지 않을까 얘기가 돼서 그렇게 나왔고요. 그러면서 길지 않은 시간에 이 아파트가 유토피아가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을 해야 하는 목적도 있었고. <봄의 소리 왈츠>를 썼는데, 그것도 조수미 선생님이 부르신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라면 조수미 선생님 목소리에 2002년 월드컵을 떠오르고 환희의 느낌이 있잖아요. 음악감독님이 이 곡 제안을 주셔서 쓰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쉬어갈 수 있는 장면의 목적을 달성했어요.
음악 얘기가 나왔는데, 개인적으로 오페라가 생각났어요. 음악의 방향성은 어떻게 잡아가셨나요.
일단은 아파트라는 키워드로 접근을 했었어요. 예를 들면 오프닝에서 나오는 음악이나 “아파트는 주민의 것!” 외치는 장면의 음악은 아파트가 막 지어지던 80년대 무드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주문 드렸어요. 그 무드가 또 영탁(이병헌)에게 다크하게 묻었으면 좋겠다고도요. 그래서 영탁의 장면에서 신디사이저가 나올 때가 있는데, 그게 아파트와 영탁을 잇는 고리가 됐죠. 또 하나는 재난으로 모두가 선사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보니까 뼈랑 뼈가 부딪히는 것 같은 어떤 정서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타악기를 많이 쓰게 됐거든요. 그래서 타악기들이 특히 후반부, 아니면 그 물건 구하러 밖에 나가는 장면 같은 데서 이제 타악기들이 막 쓰이고 그런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음악감독님이 스펙트럼이 넓은 분이라 이런 거를 다 말씀드렸는데, 고생을 엄청 하셨죠. 개봉 직전까지 거의 2년 동안 작업했는데, 주문 드린 것을 다 소화하셨던 거 같고. 이게 또 통일성이 중요하잖아요. 그걸로도 무지하게 애를 쓰셨습니다.
윤수일 선생님의 <아파트>가 굉장한 명장면을 만들어내는데 혹시 영화에 쓰시는 과정에서 크게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PD님께서 윤수일 선생님측 회사와 잘 협의를 해주셔서. (웃음) 그리고 아까 오페라 말씀하셨는데 제가 드렸던 레퍼런스 중에 뮤지컬 음악도 있었어요. 이 영화가 한 편의 뮤지컬 같은 느낌이 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좀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영화가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저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나중에 뮤지컬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이런 생각 한 적도 있어요. 예를 들면 노숙자들이 나오는 장면도 연극이나 뮤지컬적인 설정이잖아요. 이렇게 한 번 관객들에게 지금 상황을 얘기하고 약간 객관화시켜서 이렇게 보게 해주는. 그래서 그런 세팅들이 아마 좀 더 그렇게 보신 것 아닐까 싶어요.
노래 <아파트>가 나오는 장면이 이병헌 배우님 말씀대로는 테스트 리허설 컷이라고 들었어요. 이병헌 배우가 감독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센스라고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는 왜 그런 말 안 하셨죠? (일동 웃음)
원래 감독님이 리허설 때도 그렇게 카메라를 돌리는 방식을 쓰시는지 아니면 이번만은 그렇게 하신 건지.
이거는 촬영 감독의 스타일이었어요. 제가 제안한 건 아니고 테스트 때 카메라를 돌리길래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근데 거기서 기가 막힌 것들이 하나씩 건져지는 게 있었거든요. 저희 영화에 테스트 컷이 꽤 많이 쓰였거든요. 왜냐하면 배우들이 테스트할 때는 되게 릴렉스해요. 그때 명연기가 나올 때가 있거든요. 이 장면은 테스트컷을 쓴 이유가 카메라가 이렇게 트랙 아웃과 줌 아웃을 동시에 하면서 천천히 뒤로 빠지는데 이게 테스트다 보니까 트랙이 약간 이렇게 흔들렸어요. 원래는 트랙 아웃하면서 깨끗하게 멀어져야 하는데 흔들렸거든요. 이게 편집할 때 보니까 지진 나는 장면이랑 붙었을 때 너무 잘 붙더라고요. 그리고 춤추는 사람들도 열심히 안 해요. (웃음) 특히 서준씨가 대충대충 하는데 그 무드가 너무 좋았고, 술 취한 사람들 같았고. 근데 첫 테이크부터 되게 열심히 쳐요. 막 브레이크 댄스도 하고 별거 다 하는데, (테스트컷) 무드가 좋아서 그걸 쓰게 됐죠.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시는데 최근에 박서준, 박보영 배우가 먼저 연락해서 합류했다는 얘기도 화제였어요. 혹시 다른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은 좀 어떠셨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김선영 선배님은 누가 그랬는데… “김선영이 없으면 한국 영화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너무너무 뛰어난 연기를 하시는 분이잖아요. 진짜 살아있다는 표현밖에 생각이 안 나요. 진짜를 보여주시는 분 같아요. 금애라는 캐릭터가 주인공들에 비하면 자칫 전형적일 수 있는데, 그런 연기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물적인 연기를 하시는 김선영 선배님이 하시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제안 드렸고. 선배님은 “이병헌 선배님이 있어서 했습니다” 하셨지만 (웃음) 제가 생각한 것을 넘어서는 연기를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김도윤 배우는, 도균이란 캐릭터를 그런 일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공교롭게도 김도윤 배우가 전에 했던 캐릭터가 악역이 많아서 관객분들에게 저 사람은 악역 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니까요.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한 면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되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게 제 목표였거든요. 인간이 흑과 백만인 게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에 되게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게 하고 싶었었기 때문에, 배우들을 섭외할 때 그런 부분을 염두를 많이 했어요. 주연 배우들도 원래 배우들이 가지고 있던 색깔이 아닌 또 다른 색깔을 보여주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고, 정말 잘해주셨고요. 박지후 배우는 그 친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가려진 시간>에 잠깐 지나가는 인물로 만났어요. 그때 얼굴 보고도 스태프들이 “이 친구는 진짜 얼굴이 너무 좋다”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이제 너무 잘 되더라고요. <벌새>도 나오고. 미장센 영화제 대상 받은 <나만 없는 집>에서도 잘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혜원 역에 적격인 것 같은 느낌이라, 인연도 있었으니 같이 해보자 제안했죠. 혜원이 많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되게 얼굴에 스토리가 있어야 되기도 했었기 때문에. <벌새>에서도 대사가 없어도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눈이 좋은 배우여서 적격이라고 생각했어요.
박보영 배우가 이병헌 배우를 무서워하니까 감독님이 “갈치처럼 여겨라”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왜 하필 갈치에 비유했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어요. 이병헌 배우님이 엄청 화가 나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렇게 지나가다가 째려보는 장면이었는데 그걸 찍고 나서 박보영 배우님이 너무 무섭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얘기를 막 하면서. 박보영 배우에게 이병헌 배우는 훨씬 선배고, 한국에서 연기 제일 잘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에너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부담 정도는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박보영이)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하다가 (이병헌이) 무서운 표정을 지은 장면을 캡처해서 보내줬어요. “계속 보면 좀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그랬더니 이 눈을 보라고, 어떻게 익숙해지냐고 이렇게 무서운데 얘기하더고요. (일동 웃음) 그러다가 제가 그냥 문득 갑자기, 갈치가 아니라 멸치였는데 이렇게 멸치 클로즈업하는 사진을 제가 보냈어요. 공허한 생선 눈이, 에너지 없는 그 퀭한 눈을 영탁한테 대입하면 어떻겠냐 그렇게 얘기했어요. 뭐 진지한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이제 서로 장난치듯이 얘기한 거죠. 도움이 됐었는지 뭔지 모르겠지만 실제 그 장면 찍을 때 (박보영이) 너무너무 잘 해서.
감독님의 영화들은 타협하지 않는 요소가 인상적이죠. 흔히 말하는 ‘안전한 요소’ 없이 자신만의 색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에요.
그 공식을 대입하면 그 공식대로 리액션이 온다라는 보장이 있으면 저도 하고 싶어요. (일동 웃음) 근데 그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영화가 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길을 찾아가는 것 같고. 그렇지만 제가 주제의식이나 이런 거를 막 고집한다기보다는… 저는 ‘영화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사람들이 의미도 찾고 주제가 뭐지 이렇게 생각도 하고 영화에 있는 디테일들도 봐주고. 그러기 때문에 일단은 재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을 따라서 가장 예측할 수 없는 전개, 그리고 이 인물들의 선택들, 나는 무슨 선택을 할까 이런 것들을 같이 몰입해서 보는 게 재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 할 때는 그거를 1순위로 두고 작업했고, 그래야 앞에 말씀드렸던 아파트의 어떤 의미나 한국 사회 이야기나 이런 게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그걸 메인으로 두고 쓰니 공식에 있는 어떤 것들을 끌어다 쓰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이번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나 대사를 하나 뽑는다면?
정말 많은데, 저는 반상회 장면을 되게 좋아해요. 지금까지 영화 찍으면서 한 번도 못 해본 경험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한 30명 정도 되는 배우분들 모시고 한 번에 작업해본 적이 없었어요. 예를 들면 이렇게 3명만 있어도 그렇죠. 이 사람의 연기를 제가 바꾸면 이 두 사람의 리액션이 바뀌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저한테 질문을 해요. 한 세 명 정도는 뭐 이렇게 막 질문을 받아가면서 고쳐가면서 무드를 만들 수 있는데 30명이 되면 이게 안되거든요. 그래서 (그 장면에) 되게 걱정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어요. 이게 걷잡을 수 없이 이상한 톤으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물론 제가 베스트라고 하는 배우분들을 모신 거지만 만약에 그게 제 역량을 오바하면 어떡하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은 그분들한테 제가 캐릭터를 다 드렸어요. 몇 호에 살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누구는 가족이 죽고 누구는 다 살아남고 등등. 이렇게 해서 이런 상황일 때 과연 배우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라는 식으로 리허설을 한 번 하고 그날 밤인가 아무튼 전화를 다 돌렸어요. 어떤 분은 “이렇게 해봤는데 나라면 그게 아니라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하시기도 하고, 반대로 제가 “톤이 약간 연극 톤인데 좀만 더 톤 다운해주셨으면 좋겠다” 말씀드리고. 그렇게 한 번씩 얘기를 나눠보니까 편해지더라고요. 그리고 현장에 갔는데 완전 달라졌어요, 리허설 때와는. 살아있는 장면이 만들어지고 있는 거를 눈앞에서 목격하니까 되게 짜릿한 경험이었어요. 저는 장면 찍을 때, 필요한 부분마다 끊어서 찍는 편인데 그 장면은 그냥 다 마스터샷으로 찍었거든요. 리액션이 계속 필요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하루종일 그 장면만 하신 거예요, 배우분들은. 그래도 다들 너무 재밌어하시고,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연기하니까 너무 재밌다” 하시면서 촬영했던 게 기억이 나요.
감독님 작품들을 봤을 생각지도 못한 주제들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셔서 다음이 정말 궁금해지거든요. 요즘 꽂혀있는 소재나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옛날부터 하고 싶었는데 호러 영화. 진짜 진짜 무서운 호러 영화를 하고 싶어요.
이번 영화도 호러 영화 못지않은 장면이 있었어요.
더 무서운 장면도 있었는데 편집됐어요. (웃음) 지금 기획 중인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예요.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