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 작가 조합(WGA)와 미국 배우 조합(SAG-AFTRA)이 파업 중인 가운데, 이번에는 대기업의 횡포에 참지 못한 VFX 분야 노동자들이 힘을 모았다. VFX 시각효과, 흔히 말하는 CG 작업을 하는 기술자들이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노동 환경에 반기를 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VFX 기술자들이 힘을 모았는지 정리했다.


IATSE에서 공문과 함께 발표한 마블 VFX 노조 결성 이미지.

지난 8월 7일(현지시간), 50명 이상의 마블측 노동자가 미국 정부 기관 연방노사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에 서류를 제출했다. 국제연극무대직원연맹(IATSE)의 승인을 받은 이들은 마블 스튜디오의 VFX 기술자들이 노동조합 결성 여부를 두고 8월 21일 투표를 진행하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사실 VFX 노동자들의 노고는 디지털 촬영과 일명 '그린 스크린'이라고 불리는 크로마키 촬영이 대세가 되면서 점점 많아졌다.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블록버스터 장르에서 더할 수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여러 작품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면,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 VFX 노조 결성에 큰 힘(?)이 된 마블 스튜디오가 대표적인 사례다.

마블 스튜디오

마블 스튜디오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확장하면서 영화뿐만 아니라 시리즈 콘텐츠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VFX 작업량이 늘어났는데, 반대로 스튜디오와 작업자 간의 소통은 원활하지 않았다(사례들은 아래 단락에서 정리한다). 거기다 '유니버스'의 연계와 전개를 위해 작품의 진행 상황이 아니라 세계관 사건에 맞춰 개봉일·공개일을 변경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마블이 단연 VFX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업임에도 노동환경은 나아지긴커녕 거듭 악화될 뿐이었다. VFX 코디네이터 벨라 허프맨은 “작업에 필요한 시간(턴어라운드 타임)이 보장되지 않고, 급여 형평성도 맞지 않다”고 이번 노조 결성의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모든 신규 노동자들을 위해 지속 가능한 부서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럼 마블 스튜디오를 작업하는 VFX 노동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이런 움직임이 촉발된 걸까.


개봉하고도 작업한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CG 변경 장면

2021년 12월 개봉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한참 관객들을 홀리고 있던 시절, 인터넷에 신기한 후기가 올라왔다. 바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특정 장면의 CG가 변경됐다는 것이다. 게시글에서 언급한 장면은 네드가 닥터 스트레인지의 링을 이용해 포탈을 연 장면이다. 이 장면과 몇몇 장면에 수정이 들어갔는데, 영화는 이미 개봉한 후였고 상영 2주차부터 수정 버전을 상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장에서도 파일로 상영하는 '디지털 상영' 시대라 큰 무리 없이 상영본을 교체할 수 있었겠지만, VFX 기술자 입장에선 초과 근무를 한 셈이다. 본래 이 장면은 추가 촬영으로 더해진 장면이었고, VFX 작업이 그만큼 촉박했기에 개봉 후에야 CG를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토르: 러브 앤 썬더> CG 수정 장면.

2022년 개봉한 <토르: 러브 앤 썬더>도 상황은 비슷했다. 개봉 도중 수정한 건 아니지만, OTT 플랫폼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온 버전은 특정 장면에 CG가 보완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사후 서비스가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두 영화 모두 VFX가 어색하다고 비판 받았던 만큼 보완이 필요했던 작품들이긴 하다.


제대로 되지 않는 소통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에서 나무 뚫는 병사들와 점점 커지는 나무

VFX 기술자들이 특히 마블 영화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비밀 엄수'. 마블 스튜디오는 사전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상당히 꼼꼼하게 작업 환경을 체크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당시 배우들조차 무슨 장면인지 모르고 쪽대본으로 연기했다는데, VFX 기술자들에게 제대로 정보가 교류될 리가 만무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개봉을 한 달 가량 당긴 적이 있는데, 당시 VFX팀으로 작업하던 관계자는 “언론 보도를 보고 개봉일 변경을 알았다”고 밝히기도. 심지어 마블 측에 개봉일 변경에 대해 문의를 넣자 “(변경 소식을) 전달하는 걸 깜빡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까지 들었단다.

VFX 관계자는 <블랙 팬서>의 이 장면을 “제대로 세팅되지 않은 장면” 사례로 뽑았다.

다른 VFX 기술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는다”는 말을 남겼다. 즉 감독이나 프로듀서 외에도 마블 임원들에게도 의견을 수렴하고, 그러다보니 간신히 작업을 마친 시퀀스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마저 발생했다. 몇 주 거쳐 만든 장면이 단 일주일 만에 삭제되고, 정말 중요한 장면을 가장 마지막에 촬영하고 VFX팀에 넘겨주는 등 작업 우선 순위조차 지켜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콘셉트 아트와 사전 비주얼을 거쳐 장면을 정하면 촬영 현장에서 이에 알맞게 세팅해 장면을 촬영하고 VFX를 더하는 것이라면, 근래 마블의 작업 방식은 일단 찍고 VFX팀에게 책임을 넘기는 수준이라고까지 설명했다.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스토리조차 제공해주지 않는 극단적인 상황도 있다고.


힘을 가진 대기업의 배려 없는 환경

팬들에게 “'서프라이즈' 아냐?”라고 놀림 받는 <블랙 위도우> 장면.

그간 마블과 VFX팀의 불화를 꾸준히 보도한 매체 '벌처'는 이번 VFX 노조 결성 기사에서 마블을 “깡패”(bully)라고 인용했다. 그간 마블의 행적을 보면 사실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긴 하다. VFX 업계 폭로에 따르면 현재 마블 스튜디오가 VFX 작업량이 많은 작품을 다수 진행하는 만큼 업계 영향력이 상당한데, 그만큼 마블 스튜디오의 심기를 거스르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시는 마블 스튜디오 작품에 합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노동 환경은 가히 최악인데, 앞서 말한 대로 개봉일이 변경돼도 작업 마감일은 거의 고정이고 작업량 대비 예산이 많지 않아 평소보다 적은 인원으로 일해야 한다(관계자는 10명이 할 일을 2명이 한다고 극단적인 표현까지 했다). 몇몇 내부 관계자는 마블 작품을 하느라 몇 개월 간 휴일이 없었다고 증언했고, 동료 직원이 불안 발작을 일으키는 것까지 목격했다고 첨언했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가 이어지자, VFX 기술자들은 이번 노조 결성으로 자신들의 노동 환경을 다시금 재조정하고자 힘을 모았다. 어쩌면 양대 노조 파업으로 할리우드가 멈춘 지금이야말로, 다른 분야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의견을 확실하게 관철할 수 있는 기회이긴 하다. 과연 이번 노조 결성이 성공적으로 성사돼 그간 VFX 업계가 겪었던 불평등 노동을 거둬내고 보다 나은 환경 조성을 할리우드에 정착시킬 수 있을지 관건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