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출가 김아라

누군가 말했다. “김아라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실험과 전위로서 대중적 성공과 연극 미학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40년 오로지 연출가의 길을 걸어온 김아라는 배우 최민식의 출세작인 <에쿠우스>, <사로잡힌 영혼>, 셰익스피어 4대 비극, 그리스 비극 연작, <정거장> 연작 등 총 60여 작품을 연출했다. 1992년 ‘극단 무천’을 창단하여 ‘베를린 한국 페스티벌’ 폐막공연, ‘덴마크 아루스 국제 무대예술제’ 개막공연 등 대형 축제 및 주제공연을 제작, 총감독, 연출하였고 1996년 안성시 죽산면에서 야외극장을 설립, 연극 공동체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유적지 연작, 국내외 무대, 실내와 실외극장 등 종횡무진 영역을 확장한 연출가다.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젊은 예술가상 등을 받았고, 국립극단 최초의 여성 및 최연소 초청 연출이었다. 독일 세계여성연극인회의 한국대표 참가했고, 일본 아 시아 여성연극인회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서울시립극단 상임 연출,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를 창립했고, 「월간중앙」 <한국을 이끄는 100인> 「신동아」 <한국연극을 이끄는 5인> 등에 선정됐다.

그에게 한 편의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서슴없이 <베를린 천사의 시>를 선택했다.


2.

베를린 천사의 시

흑백의 영화는 분단의 도시 베를린에서 시작된다. 두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어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둘은 베를린의 거리를 순회하며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미엘은 서커스 곡예사 마리온을 사랑하게 되고,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의 감독은 ‘빔 벤더스’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초크와 함께 1970년대 '뉴 저먼 시네마'의 사조를 이끈 독일 영화계의 거장이다. 그는 단편 데뷔작인 <장소들>(Schauplätze, 1967), 피터 한트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페널티킥 앞 에 선 골키퍼의 불안>(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 1972) 등으로 시작, 1984년 <파리, 텍사스>로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베를린 천사의 시>로 다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가 ‘피터 한트케’와 인연이 깊다. 이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도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에서 영감을 받아 둘이 함께 각본을 집필했다. 피터 한트케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관객 모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극 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이다. 그는 201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어렵다. 대사는 무겁고, 플롯은 복잡한 경계를 넘는다. 몇 줄로 설명하기 힘들고, 연극처럼 직접 보고 반복해서 보아야 하는 걸작이다. 영화의 도입부에는 피터 한트케가 쓴 「아이의 노래」라는 시가 독백으로 인용된다. 아마 이 영화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 ‘천사의 시’를 지도로 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하략)


3.

오펜하이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도자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설계한 사람.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한 영웅이었다가,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물리학자. 그는 2022년에야 스파이 혐의에서 벗어났고, 모든 의혹에서 복권되었다. 그가 사망한 지 55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2023년, 그의 전기영화 한 편이 우리를 찾아왔다.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의 하나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손에서 태어났다.

영화는 인류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의 최후처럼 애처롭고, 때로는 부활의 신 비슈누의 절규처럼 비장했다. 그리고 나에게 영화 <오펜하이머>는 마치 2,500년 전의 그리스 비극처럼 느껴졌다.

한 명의 배우와 수많은 코러스로 양분되는 그리스 비극의 양식은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매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비극은 배우와 코러스를 기준으로 다섯 파트로 구성된다. 프롤로그의 어원인 프롤로고스(prologos)는 코러스가 등장하기 이전 배우가 사건의 개괄과 배경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파로도스(parodos)는 코러스들이 무대 양측에서 등장하면서 부르는 노래고, 에페이소디온(epeisodion)은 코러스의 노래들 사이에 끼워진 부분으로 영단어 에피소드의 어원이다. 스타시몬(stasimon)은 코러스들이 부르는 노래로 에피소드에 대한 코멘트다. 마지막 엑소도스(exodos)는 이야기가 끝난 후 코러스가 퇴장하면서 부르는 에필로그다.

이 영화의 엑소더스는 영화에 등장하는 바가바드 기타의 대사로, 1965년 오펜하이머가 텔레비전에서 한 연설문의 일부였다. 추락한 영웅의 눈물이자 누군가에겐 악마의 노래였다.

"우리는 세계가 예전과 같지 않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소수의 사람이 웃고 소수의 사람은 울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침묵했다.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이 생각난다. 비슈누는 왕자에게 해야 할 바를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많은 팔을 펼쳐 보이며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4.

인간의 시간

연극 「페르시아인들」(Persians)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 작가인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테네 비극 중 하나로, 기원전 472년에 처음 만들어진 연극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 연극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적 사건이었던, 살라미스 해전(기원 전 480년)에서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페르시아인들을 극화한 것으로, 그 자체로 동시대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현존하는 유일한 그리스 비극이다.

연출가 김아라는 이 비극을 그리스 신전에서 공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와 이 프로젝트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난 멈추지 않는 전쟁과 흐르는 시간의 모순을 배웠다. 그가 추천한 <베를린 천사의 시>도 전쟁이 낳은 분단과 존재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였고, <오펜하이머> 또한 전쟁을 종식했지만 더 심한 파괴의 씨앗을 만든 선악의 모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결국 세상의 모든 비극은 인간의 탐욕이 만드는 시간의 열매다.

비극 「페르시아인들」의 종막에는 거의 만신창이가 된 크세르크세스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오만과 자신의 억울함을 슬피 울며 회개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오만했기 때문에 위대한 제국인 페르시아가 망했다고 말한다. 이 비극을 보고 있던 아테네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이 비극에 그리스 사람들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크세르크세스의 어머니 아토샤가 울고, 크세르크세스의 부하들이 운다.

그리고 크세르크세스가 자신의 오만 때문에 페르시아가 망했다고 울 때, 이 광경을 본 아테네 군인들과 아테네 시민도 함께 울기 시작한다. 이들은 적을 위해 울고 있는 자신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들은 모두 함께 울며 전쟁의 슬픔을 공감한다. 맨 앞자리에 있던 페리클레스는 “이것이 위대한 민주주의다. 원수를 위해서 우는 자가 위대한 개인이며, 원수를 위해서 역지사지하는 민족이 위대한 국가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영화는 절실한 참회를 위한 비극의 시간일지 모른다. 끝.


글쓰는 기획자, 김우정

김우정의 <영화 라면>은 각계각층의 명사가 추천하는, 반복해서 보고 싶은 인생영화와 함께 최신 작품을 버무려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는 영화 한 편을 심층 분석하는 비평이나 최신 영화를 평가하는 평론은 아닙니다. 그저 한 번 사는 인 생의 서로 다른 가치를 영화 속에서 찾고 싶고, 라면을 먹은 것처럼 잠시나마 사소한 행복을 선물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음 화는 안무가 제임스 전의 <여인의 향기>가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