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기게 영화에 천착해 온 또래들이 마침내 반짝이는 성취를 세상에 내놓을 때, 그들과 함께 나이 듦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부조리가 거세된 채 1990년대를 낭만적으로만 회고하는 작품이 범람할 때,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포착한 날카롭고 섬세한 여성 감독의 시선에 세상은 한 뼘 다채로워진다. '기억폭행 당해서 전치 4주'가 나왔다는 조금은 과격한 영화 <우리들>(2016)의 한줄평처럼, 공유된 기억을 바탕으로 직조된 서사에서 위로를 받는 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공감 가는 이야기로 주목받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80년 대생 여성 감독의 작품을 모아봤다. 최근 개봉한 작품부터 내림차순으로 정리했다.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 (2023)

감독: 한제이

한제이 감독(좌),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 (우)

52.42kg. 숫자를 본 주영(박수연)의 얼굴이 살짝 이그러진다. 넘쳐서일까. 부족해서일까. 코치의 조언으로 체급을 상향한 태권도 부원 주영은 5일 만에 6kg를 불려야 한다. 주영의 엄마는 "그건 학대 아니니"라고 한 마디 거들지만, 그는 딸이 처한 상황을 방관하는 쪽이다. 그리고 사실 진짜 학대는 뒤에서 이뤄지고 있다. 주영의 체중 미달은 모두의 잘못이고, 그래서 매질은 주영이 아닌 나머지 태권 부원들에게 향한다. 익숙한 연대책임의 사슬. "너 하나 때문에 피해를 봐야 하냐"라며 주영의 입으로 빵과 우유를 쑤셔 넣는 부원들의 대리 폭력은,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에서 선뜻 비난하기도 어렵다. 설상가상, 폭력을 온몸으로 관통하는 주영의 옆에 또 다른 폭력으로 시들어가는 친구 주희(신기환)와 세상의 편견에 노출된 예지(이유미)가 있다. 방어 운동인 태권도를 하며 익힌 지구력, 근력, 정신력으로 주영은 그렇게 자신과 친구들을 지킬 결심을 한다.

성폭력, 승부 조작, 군대식 문화, 동성애 혐오 등 90년대의 규칙과 금기들이 영화 전반을 무겁게 짓누르지만,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 한제이 감독은 세기말 감성 충만한, 싸이월드 재질의 필터 또한 빼놓지 않는다. 그 시절 만남의 장소 롯데리아, 그 시절 코요태, 신화, 자우림 노래에 녹아드는 주영과 예지는 세기말 커플답게, 미래의 천국보다 지금의 사랑을 기꺼이 택하겠다 선언한다.


<비밀의 언덕> (2022)

감독: 이지은

이지은 감독(좌), <비밀의 언덕>(우)

명은(문승아)은 억척스러운 엄마가 마뜩잖고, 게으른 아빠가 부끄럽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할 열두 살. 부모님 직업을 묻는 담임 선생님 애란(임선우)의 질문에 명은은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를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로, 직업이 없는 아빠를 종이 만드는 회사원으로 둔갑시킨다. 거짓말로 지탱돼 온 명은의 세계는 그러나, 전학생 혜진(장재희)의 솔직한 글쓰기를 마주한 후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명은은 곧 혜진의 작법을 빌려와 자신의 내부에서 길어 올린 내밀하고 솔직한 언어로 글을 써본다. 하지만 솔직하게 적는다고 그것이 진실일까? 솔직한 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옳은 글쓰기인가?

이지은 감독은 윤가은, 김보라, 윤단비와 함께 최근 한국 영화가 이뤄낸 성취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모두 여성 감독이고,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단번에 주목받았으며, 이들 감독의 영화는 모두 미성년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어느 한 시절의 마음을 골똘히 응시함으로써 주름진 삶의 굴곡을 통과해 오늘에 도달한 우리를 위로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이들 영화의 미덕이다.


<태어나길 잘했어> (2020)

감독: 최진영

최진영 감독(좌), <태어나길 잘했어>(우)

원래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많던 춘희(강진아)에게 본격적인 불행이 닥친 건 중학생이 된 1997년. IMF 경제 위기로 온 나라가 휘청이던 사이, 춘희의 부모님도 세상을 뜬다. 영화는 구체적 내막은 생략하지만, 춘희를 일종의 생존자로 표현하여 가려진 비극을 짐작게 한다. 홀로 남은 춘희는 외삼촌 식구가 사는 집 다락방에 간신히 몸을 뉘여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한다. 다한증 때문에 남들하고 손도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한 춘희지만 마늘을 신통방통하게 잘 까는 끼와 신공이 있어 마늘 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다한증 수술받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춘희의 눈에 1998년의 어린 춘희가 보이기 시작한다. 또 다른 춘희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며, 어른 춘희는 비로소 과거의 아픔을 마주보기 시작한다.

1996년이 배경인 <비밀의 언덕>이 IMF를 의도적으로 비켜갔다면,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를 정면 돌파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태어나길 잘했어>는 IMF를 의도적으로 마주 본다. 여성 주인공이 자신과 화해하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를 떠올리게 하고, 외환위기로 가족을 잃은 어린 춘희는 <벌새>(2019)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중학생 소녀 은희(박지후)와 언뜻 겹쳐 보인다. 이들 영화가 그러하듯, <태어나길 잘했어> 또한 다시 용기를 내고, 희망을 꿈꾸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20년 전의 자신을 두 팔 벌려 끌어안고 토닥인다. '태어나길 잘했어'라고 속삭이며.


<우리집> (2019)

감독: 윤가은

윤가은 감독(좌), <우리집> (우)

열두 살 하나(김나연)는 부모의 잦은 다툼으로 무너져가는 가족을 보면서 직접 요리를 하고 밥을 차리며 가족 관계를 돌려놓기 위해 애쓴다. 도배 일로 출장이 잦은 부모님은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 자매를 삼촌에게 맡겼지만, 사실 그것은 방치에 가까워 어린 유미가 부모 대신 유진을 돌본다.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가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던 아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마음을 나누며 가까워진다. 풀리지 않는 가족에 대한 고민을 터놓으며 단짝이 된 세 사람은 소중한 각자의 '우리집'을 지키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다.

2016년 평단과 관객 모두를 사로잡으며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등 국내외 영화제를 휩쓴 영화 <우리들>로 데뷔한 윤가은 감독이 자신의 장기를 살려 아이들의 눈높이를 통해 바라보는 '가족'이라는 세상을 다시 한번 섬세히 그려냈다. 감독은 전작보다 외연을 넓힌 가족을 주제 삼아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들을 비추며 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집을 만들어가는 소녀들의 행보를 격려한다. 어린 시절, 가족의 문제를 자신의 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 못 한 고민으로 숨죽여 울어 본 적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큐에 가까운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 (2019)

감독: 김한결

김한결 감독(좌), <가장 보통의 연애>(우)

실연으로 폐인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 남녀가 있다. 선영(공효진)은 이별의 상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쿨내 진동하는 모습으로 제 본심을 숨기고 '누구를 만나든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며 냉소하고, 전 여친에 상처받은 재훈(김래원)은 하루의 마무리는 술로, 시작은 숙취로 쳇바퀴를 돌린다. 우연히 만난 지 하루 만에 서로의 연애사를 알게 돼버린 둘은 미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에 서로에게 '한심하다', '어이없다' 악다구니를 쓰지만, 그럴수록 자꾸만 엮이게 되고, 술병은 쌓여만 간다.

<가장 보통의 연애>는 여성이 마주하는 편견을 꼬집어 내는 무수한 명장면을 남기며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재훈의 반말에 맞반말로 응수하는, 남자랑 여자랑 같냐는 재훈의 말에 '같지 그럼, 너는 다르다고 배웠니?'라고 돌려까는, 여성에 쏟아지는 편견 가득한 뒷말에 통쾌하게 응수하는 선영의 모습은 여성 캐릭터의 이미지를 소모하는 대신 극의 카타르시스를 끌어올리는 주요한 역할로 활용했다.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가장 보통의 연애> 김한결 감독의 차기작은 <파일럿>. 잘나가던 파일럿에서 한순간 실직자가 된 정우(조정석)가 뜻밖의 신분 세탁으로 재취업에 성공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김보라 감독(좌), 이옥섭 감독(우)

김한결 감독 외에도 차기작을 준비 중인 여성 감독이 있다. <벌새>(2019) 김보라 감독은 현재 김초엽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펙트럼>을 준비 중이고, <메기>(2018)의 이옥섭은 '사랑의 카운슬러'에 대한 로맨틱 코미디를 준비 중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