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극장가 안팎으로 ‘핵’ 이슈가 화제다. 사회면 뉴스에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방류 문제가 연일 보도되고 있고, 인류 최초의 핵폭탄 개발을 소재로 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8월 15일 개봉했다. 모두 일본이 겪고 있는 핵 문제와 얽혀 있다. 마침 넷플릭스에서도 동일본대지진 당시 원전사고를 다룬 신작 드라마 <더 데이스>가 공개됐다.
12년 전 일본 사회를 큰 위기로 몰아넣었고 주변 국가들까지도 여전히 그 진통을 겪고 있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당시를 다룬 <더 데이스>는 소재부터 이미 한국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작품에 주목하게 된다. 과연 자신들의 지난 과오를 어떤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인가. 넷플릭스 일본 오리지널로 제작된 <더 데이스>의 연출 방향과 작품의 성과 등을 짚어봤다.
천재지변인가, 인재(人災)인가
인류 역사상 누구도 겪지 못했던 재난이 발생했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를 덮친 건 강도 9.0의 지진과 높이 15m에 달하는 대형 쓰나미였다. 그 여파로 원자로가 멈추고 수소폭발이 일어나고 방사능이 노출되고 말았다. 당시 사고는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 때와 동일한 등급의 국제원자력사고 등급으로 기록됐다. 당시 일본 정부 관료와 기업 중책들은 위기 대응 전략조차 제대로 수립해 놓지 못한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참사의 규모를 키우고 말았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던 일본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관료들이 사고 현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방사능 확산을 막아내려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더 데이스>는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직후부터 약 7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부, 발전소 운영 주체인 토오 전력(실제로는 도쿄전력이었다.), 그리고 사고 현장 주변에서 관료들의 지시를 목숨 걸고 이행해야 했던 실무자들의 관계가 밀도 있게 그려진다. 당시 사고를 사실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운 점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존하는 인물들의 관계나 기업, 기관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
기획, 각본, 제작을 맡은 마츠모토 아츠시 프로듀서는 후지TV 프로듀서로 활동을 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하면서 첫 작품으로 <더 데이스>를 만들게 됐는데,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특정 기업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의 성격상 방송국 내에서 기획을 내도 채택되지 않았던 현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더 데이스>가 묘사하는 사건 당시의 7일간의 기록을 통해 지금의 시청자들은 무엇을 깨닫게 될까. 나아가 일본 사회는 어떤 이유로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당시 원전사고를 상세하게 다룬 드라마를 만들게 됐던 걸까. <더 데이스>는 과연 천재지변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였는지, 피해 확산을 조금은 더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였는지를 묻는다. 이 작품은 그 날의 현장, 그들의 노력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을 지양하고 인물에 집중하다
<더 데이스>가 묘사하는 사고 현장의 모습은 이미 발표된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카도타 류쇼가 생존자들을 직접 인터뷰하며 쓴 르포집 「죽음의 연을 본 남자, 요시다 마사로와 후쿠시마 제1 원전」(영제: On the Brink: The Inside Story of Fukushima Daiichi)에 담긴 이야기들이 모델이 됐다. 연출은 드라마 <전차남>, <코드 블루-닥터 헬기 긴급구명> 시리즈 등을 만든 니시우라 마사키 감독과 <링> 시리즈, <검은 물 밑에서> 등을 연출한 나카다 히데오 감독이 공동으로 맡았다. 이들 제작진의 목표는 분명했다. <더 데이스>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난 발생 당시의 현장을 스펙터클한 관점에서 묘사하지 않고 당시 현장에서 목숨 걸고 일했던 실무자들이 겪은 일들을 진중하게 다룬다. 회사와 정부와 가족을 위해서 피해 확산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사람들이 진짜 주인공이다. 또한 그들의 선의를 무력하게 만드는 관료들의 답답하고 안일한 처사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드라마 전체의 화자로 등장하는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발전소의 요시다 소장(야쿠쇼 코지)은 첫 화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잘못했던 걸까.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사고 수습이 일단락되고 당시 현장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지시를 불이행한 것에 대해서 일일이 불려 다니며 증언을 거듭해야 하는 소장의 무거운 어깨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은 이 드라마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재난의 현장을 스펙터클한 관점에서 묘사하지 않고, 회사와 정부와 가족을 위해서 피해 확산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사람들을 진짜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원자로 전문가도 아닌 관료들이 기관 단체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사고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심지어 사고 발생 직후 민간인 대피 범위 킬로미터를 결정하지 못해 매뉴얼을 뒤적거리고 있는 모습은 <더 데이스>가 공들여 묘사하는 중요한 7일간의 기록 중 극히 일부다. 실제로 사고 당시에 일본 정부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피해 범위 반경 250km, 피난 인구 약 5000만 명을 산정하고 일본 열도가 반으로 쪼개져야 하는 상황까지도 언급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당시 일본 정부와 기업의 대응 수준이 드라마에 자세하게 묘사된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멜트 다운을 막기 위한 수동 방법, ‘벤트’를 실시하기 위해서 일선 직원들이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진압하는 과정과 무능력해 보이는 관료들의 퀭한 표정이 시리즈 내내 강한 대비를 이룬다.
일본의 대표 배우들이 총출동
후쿠시마 제일 원자력발전소 소장 요시다를 연기한 야쿠쇼 코지는 일본의 대표 국민 배우로, 올해 열린 76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더 데이스>에서 요시다 소장은 일선 관계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상부의 어이없는 지시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글맞은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 침착함 뒤에 서늘한 본성을 감춰두고 있다가 툭툭 꺼내 보이는 표정과 눈빛은 야쿠쇼 코지의 전매특허 연기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주인공 타케노우치 유타카는 <더 데이스>에서 요시다 소장 다음으로 중요한 원전 1, 2호기 당직장을 맡았다. 당직장의 역할은 냉각 불능의 상황에 빠진 원자로의 변화 양상을 가장 빨리 파악해서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위치인데 그 역시 부하 직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하는 처지에 놓일 때마다 괴로워한다. 젊은 2, 30대 직원들이 원자로에 접근하는 걸 두려워하는 동안 자진해서 위험한 일을 도맡는 베테랑 운전원 후루야를 연기한 배우는 <심야식당>의 마스터 역으로 유명한 코바야시 카오루다. <스윙걸즈>, <무지개 여신>, <20세기 소년> <아웃 레이지> 시리즈 등 사극과 판타지, 만화 원작의 SF 등 여러 장르에서 활약한 배우 코히나타 후미요는 실제 모델인 스가 나오토 총리와 아주 흡사한 분장을 하고 등장해 혼비백산한 내각 총리를 연기한다.
그래서 <더 데이스>는 반성하고 있나
<더 데이스>를 제작한 마츠모토 아츠시 프로듀서는 2011년 당시 동일본대지진 원전사고가 일본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원전사고는 지역민들뿐만 아니라 도심 지역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직접적인 공포를 느꼈던 어떤 시작점이 되어준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지진을 겪고 있는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동일본대지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당장 전기가 끊기고 방사능에 피폭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의 사고 이후 만들어진 수많은 일본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 문화 예술 전반에서도 대중 심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더 데이스>는 어떤 관점에서 과거를 직시하고 또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걸까.
그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더 데이스>의 기반이 된 르포집 「죽음의 연을 본 남자, 요시다 마사로와 후쿠시마 제1 원전」의 저자인 카도타 류쇼는 자신의 SNS에서 한국 사람들의 반일 정서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현해 논란이 된 인물이다. 일본의 지난 역사가 주변 국가를, 특히 아시아 여러 민족을 어떻게 대했고 지금까지 고통이 어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기에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더 데이스> 역시 자국의 역사관, 세계 인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은 물론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본 사회가 지닌 시스템의 맹점, 미래에 더욱 불거질 것으로 예측되는 내부의 폐해를 들여다보는 드라마다. 일본 사회 내에서도 오랫동안 그날의 현장을 미디어가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제대로 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울 것에 대해서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안하고 이 작품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일본 사회가 지닌 문제점이나 현재의 분위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그날 이후 일본의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에서 대중 심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더 데이스>는 어떤 관점에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걸까.
<더 데이스>와 함께 보면 좋을 작품들
동일본대지진 원전 사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혹은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 더 있다. 우선 사고 당시를 취재하던 기자의 시선에서 정부가 감추려 했던 사고 규모 등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태양을 덮다>(2021)는 국내 국내 OTT 플랫폼 웨이브에서도 볼 수 있다. 지난 6월에 국내 개봉한 <이윽고 바다에 닿다>(2023)는 하마베 미나미, 키시이 유키노 배우가 주연한 영화로, 애틋한 친구 사이의 감정을 다룬 청춘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 연인, 가족을 그리워하는 상실감을 다룬다. 우리에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친숙한 키시이 유키노가 살아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국내 수입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후쿠시마 50>이란 영화도 2020년에 제작됐다. 와타나베 켄 주연작으로 <더 데이스>와 함께 그날의 사고 현장을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그날을 다뤘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영화 <신문기자>로 2020년 43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심은경 배우의 소식을 들은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일본도 내부고발, 통렬한 자기반성을 앞세운 사회파 작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분위기일까. 아직 일본 영화계의 경향까지 내다보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더 데이스> 역시 어떤 흐름에 놓인 작품임에는 분명해보인다.
김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