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장철수 감독은 부산영화제에서 한 영화를 보고 '꽁꽁 언 바다를 도끼로 내리찍는 것과 같은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결심한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이 영화를 대중에 알리고, 누군가를 관객으로 만들어, 관객 중 누군가는 무언가를 얻어 가게 만들겠다고. 영화 수입/배급사 ‘슈아픽쳐스’ 대표를 설득해 수입을 강행하고 장철수 감독이 직접 투자한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가 8월 23일 개봉했다. ‘구소련의 어두운 암덩이를 마취도 없이 움켜쥐는’ 이 영화는 푸틴의 러시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성의 진보와 퇴보를 묻고, 구원과 용서의 철학을 질문한다. 가히 23년 최고의 영화를 만난 듯하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스틸컷 ⓒ 슈아픽처스

환상처럼, ‘1938’이 새겨진 비행선이 빌딩 사이를 유영한다. 압도적인 이 붉은 기구는 표정 없는 소련인들의 머리 위를 감시하듯 미끄러진다. 직설적 은유다. 뻔뻔하고 뻣뻣한 직설의 반대편에 서야 마땅한 은유는 가짜처럼 굳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두가 모두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던 광기의 시대에는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 숫자 1938이 은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상은 1938년이 된다.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인류사의 전대미문한 대학살극이 벌어진 1938년을 배경으로 한다. 밖으로는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가 공공연하게 소련을 제압하겠다고 야심을 드러내고, 안에서는 최측근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되면서 스탈린은 수세에 몰린다. 위기감을 느낀 그는 영화에서는 '조국의 적'이라고 표현되는 '내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피의 대숙청'을 시작한다. "무고한 시민 열 명이 처형되어도 한 명의 스파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는 표어 아래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는 1년 사이 무려 최대 120만 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도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에, '추정'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무게는 주인공 볼코노고프가 짐승 같은 동료 대위의 머리에 올려놓은 쇳덩이처럼 여전히 우리를 짓누른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스틸컷 ⓒ 슈아픽처스

대숙청이 절정을 이루던 1938년에는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소련군까지 숙청의 파도에 휩싸여서 장교단의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극단적인 불신의 공포는 스탈린의 사냥개 엔카베데에도 서서히 스며든다. 숙청을 자행하던 무리가 내부 숙청을 당하면서 조직과 그 조직을 구성하는 인간들은 서서히 분열한다.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엔카베데의 자신감 넘치고 유능한 경찰관이다. 군화로 반역자들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빨간 운동복 차림으로 반소련 체제인사들을 '특수한 방법'으로 처리하던 어느 날, 볼코노고프는 출근길에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직속상관이 건물에서 투신한 것이다. 새로운 상관 골로브냐 소령이 부임하고 사무실은 어수선하다. 동료 경찰관들은 '재평가'를 받기 위해 잇달아 소환된다. 탈락자에게는 고문과 즉결 처형, 신속한 매장이 기다린다. 볼코노고프는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것임을 감지한다. 동물적 감각으로 한발 앞선 도주를 시작하지만, 충동적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을 뿐 볼코노고프는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계획은 없었다. 유령을 만나기 전까지는.

베레테니코프(니키타 쿠쿠쉬킨), 왼쪽 두 번째,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스틸컷 ⓒ 슈아픽처스

도망친 볼코노고프는 재평가 받은 동료들이 매장된 집단 무덤에서 절친했던 동료 베레테니코프(니키타 쿠쿠쉬킨)가 땅을 파고 올라오는 환영을 본다. 이 유령은 볼코노고프의 내장을 움켜주고 비틀어 극단의 공포를 자극하더니, 지옥에서 벗어날 묘책 하나를 던져준다. 내일 해가 질 때까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도 그를 용서한다면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받아들여질 기회가 올 것이라는. 용서를 통해 죄 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정은 즉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니콜라이 고골의 부조리, 그리고 미하일 불가코프의 원시적 마술적 사실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기밀문서를 들고 도망친 볼코노고프는 거짓 자백으로 목숨을 잃은 숙청자들의 가족을 찾아가 용서를 빌지만, <죄와 벌>의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구원해 준 '소냐'같은 존재는 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볼코노고프가 탈주해 마주한 것은 따뜻한 용서가 아니라, 공포정치가 남긴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 숙청자들의 시체와 함께 지내는 정신이 나간 여자, 볼코노고프의 간청이 단지 정교한 함정이라 여기고 거짓과 폭력을 행사하는 노인, 대위의 속죄에도 "아무도 용서 안 해줄 거예요."라고 일갈하는 아이의 모습은 볼코노고프의 구원이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아무도 용서 안 해줄 거예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스틸컷 ⓒ 슈아픽처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최소한의 양심으로 속죄를 구하고 구원받기 위한 필사의 탈출과 추격을 불사한 볼코노고프는 마침내 구원받게 될까? 구원 가능성과 별개로, 부조리한 시대 속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설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속죄와 양심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 푸틴의 러시아와 같이 악의적이고 억압적인 국가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을 왜곡하고 위축시키는가에 대한, 그러니까 시대를 초월한 논평으로도 읽힌다. 아이히만 재판(홀로코스트 최고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떠올리게 함은 물론이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스틸컷 ⓒ 슈아픽처스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는 ‘용서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우화적 설정을 얹어 시대의 비극을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형식상 영화 <도망자>처럼 쫓기는 주인공을 따라가는 액션 스릴러 장르 영화의 성격을 지니고, 과감한 플래시백의 삽입으로 주인공의 과거 행적이 현재 살 떨리는 추격전의 긴장감을 배가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화를 다면적으로 만드는 건 대위의 환상적이고 은유적인 행보이다.

영화적 긴장감의 팔할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던 <6번 칸>, <페트로프의 감기>를 통해 단숨에 세계의 주목을 받은 러시아 배우 유리 보리소프의 존재감에서 나온다. 삭발한 머리에 빨간 운동복을 입은 채로 위협과 상징이 난무하는 위험으로 가득 찬 도시를 숨 가쁘게 뛰고 구르는 유리 보리소프는 관객을 압도한다. 속도감 있는 전개 속에서도, 존엄성의 위기를 맞는 남자의 섬세한 심리 묘사 또한 놓치지 않는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