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드라마 <마스크걸>(2023)이 공개되자마자 화제다. 공개와 동시에 아시아 8개 지역에서 1위를 기록했고 5일 뒤에는 월드 와이드에서 누적 3위를 기록했다.
<마스크걸>은 주인공인 모미(이한별/나나/고현정)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화는 주인공인 모미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2화부터는 모미 주변 인물들의 이름이 오프닝에서 크게 제시되며, 그 사람의 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3, 4화가 진행될수록 매회 이야기의 주인공은 달라진다. 그리고 5화로 접어들면서 다시 모미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형태가 되며 전체적 구성을 봉합한다.
특이한 방식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실은 영화 쪽에선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플롯의 형식이다. 바로 다중 플롯, 혹은 멀티 플롯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가장 유명한 고전의 거장으로는 <플레이어>(1993)와 <숏컷>(1995)으로 유명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있다. 현재 상영 중인 <스파이 코드명 포춘>(2023) 의 감독이기도 한 가이 리치 감독의 초기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1999), <스내치>(2001) 또한 멀티 플롯 계열의 영화로 유명세를 떨쳤다.
<마스크걸>은 주인공이 처해있는 사회적 어떠한 상황이 중요한 배경으로 적용되는 영화다. 그런 이야기들이 주로 선택하는 형식은 거대한 플래시백(회상)의 형태다. <타짜>(2006)의 넓디넓은 이야기를 위해 정마담(김혜수)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구성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마스크걸>이 선택한 방식은 아예 이야기의 시퀀스별(시리즈 드라마이니 아예 회별 구성을 다르게 했다)로 다른 인물을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멀티 플롯의 형태였다. 고전적인 모범적 아크 플롯을 벗어나 새로움을 찾는 관객에게 이런 제시는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멀티 플롯이 효과적으로 적용된 영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
실은 <마스크걸>을 연출한 김용훈 감독의 전작이다.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의 앞에 고액의 돈이 담긴 가방이 나타나면서 발생하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마스크걸>의 특성이 있다면, 엔딩 시퀀스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까지는 명확한 인상의 악인이 없다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또한 선이 뚜렷한 악당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없다. 살인을 저지르는 자도 적어도 관객의 환심은 사는 형태로 등장한다. 극한의 환경에 몰린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떤 일을 행했는데,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런 인물들의 매력이 신인 감독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정우성, 전도연 등 대형 배우를 카메라 앞에 서게 한 원동력일지 모르겠다. 그런 군상을 표현하기에 한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보다는 확실히 멀티 플롯의 생김새가 더 유리했던 것 같다.
참고로 이 영화는 코로나 시기에 개봉하여 비교적 섭섭한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바로 1주 전에 개봉한 <정직한 후보>(2020)는 1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했다. 엄혹한 코로나 정국에도 그 시기가 일일 환자 수 0명을 기록했던 몇 안 되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 개봉하던 날에 신천지 사태가 터졌다. 흥행은 정말 하늘만 안다더니..
<PM 11:14> (2003)
오후 11시 14분에 두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것은 만취 운전자의 교통사고, 편의점 권총강도, 딸의 범죄를 은폐하는 아버지, 차를 훔친 10대들의 폭주, 남자친구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계략 등이 한데 모여 복잡하게 얽힌 사연이 풀어지는 과정이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로 유명한 힐러리 스웽크가 주연과 제작을 담당한 이 영화는 젊은 감각으로 내달리며 각 이야기 간의 연관성을 조금씩 노출해 시종일관 높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실은 굉장한 동력에 비해서 엔딩이 좋은 영화는 아니다. 그런 면까지 <마스크걸>을 닮아있다니..
이냐리투 감독의 초기 3부작
<버드맨>(2015)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로 2년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멕시코의 이냐리투 감독의 데뷔작을 포함한 세 작품은 모두 멀티 플롯의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아모레스 페로스> (2001)
오프닝에서 자동차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엔 투견으로 돈을 벌어 형수와 야반도주하려는 남자, 최고의 모델이지만 다리를 잘라야 하는 발레리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킬러가 엮여있다. '개'라는 테마가 인물들과 어떻게 엮이는지를 멀티 플롯의 씨실과 날실을 이용해 만들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21 그램> (2004)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아 불치병에서 살아난 남자, 그리고 여자의 가족에게 교통사고를 가한 남자. 그런데 심장을 이식받은 남자는 심장 주인의 (전) 아내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고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이 늘 그렇듯 일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가 보여주는 정갈한 혼잡에 대해 <펄프 픽션>(1994)를 잇는 차세대 타란티노로 떠올랐던 이냐리투 감독은 두 번째 영화인 <21 그램>으로 거장의 시선을 탑재한 거대한 신인으로 우뚝 선다. 멀티 플롯은 주로 재기발랄한 이야기들에서 장난감처럼 사용돼 왔다. 그러나 아크 플롯의 묵직한 한방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증명이라도 하듯 둔중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바벨> (2007)
태초에 인간의 언어가 혼잡을 일으켰던 그 단어가 맞다. 영화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4가지의 비극을 보여준다. 혼돈과 단절을 겪는 인물들은 심지어 극증에서 만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구상에 '감정'이라는 거대한 분모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을 한 데 묶으며, 멀티 플롯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연출자는 이 영화로 칸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보편적이어야 하며 감정에 통역이 없어야 한다"는 수상 소감을 통해 영화를 완성한 느낌이었다.
<버닝 플레인> (2008)
이냐리투 감독의 3부작의 배경엔 각본가인 기예르모 아리아가가 있다. 그의 연출 데뷔작인 <버닝 플레인>(국내 출시명 <욕망의 대지>)엔 사소한 실수로 외도하는 엄마를 죽인 딸이 등장한다. 그리고 딸은 엄마 정부의 아들을 사랑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보여준다. 간단한 한 줄 이야기엔 인물들의 아주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있고, 각본이자 연출인 아리아가는 멀티 플롯을 십분 이용하여 유혹이라는 씨실과 금기라는 날실을 능숙하게 엮는다. 제니퍼 로렌스의 치기 어린 열정 넘치는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