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두 번째 책을 집필 중인 신인 작가다. 소설 ‘클럽 샌드위치’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퇴고가 더딘 상황. 그는 미완성의 소설 한 뭉치를 싸 들고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난다.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별장에 며칠간 머무르며 글쓰기에만 전념할 작정이다. 레온은 이번 여행을 목적과 계획이 분명한 출장으로 여긴다. 자신은 출판사 사장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를 만나기 전까지 소설을 완성해야 하고, 펠릭스는 예술학교 진학에 필요한 사진 포트폴리오를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낯선 곳에 들어서자마자 미처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연달아 등장한다. 멀쩡하던 차가 숲 한가운데 멈춰 서는가 하면, 겨우 도착한 별장엔 또 다른 방문객 나디아(파울라 베어)의 흔적이 널려 있다. 혼자 방을 쓸 수 없는 상황도 짜증 나는데 레온은 수면까지 방해받는다. 아직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한 나디아의 신음이 얇은 벽을 타고 울려 퍼져서다. 이 모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펠릭스도 레온에게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사진 작업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펠릭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영하러 나가고, 심지어 지붕을 수리하자는 엉뚱한 제안을 건넨다.
친구라는 사실이 신기할 만큼 레온과 펠릭스는 생김도 성향도 정반대다. 레온이 경계심을 발동하며 고립을 자처하는 사이, 펠릭스는 모험과 여유를 즐긴다.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외에 공통점은 전혀 없고 펠릭스가 무엇을 권유하든 레온은 같은 답을 내놓는다. “난 일해야 돼.” 완벽하게 다르다는 점이 그들을 잇는 유일한 끈이기에 둘은 차라리 한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영화 초반부에 벌어졌던 난데없는 몸싸움은 이성과 본능이 쪼개진 순간처럼 다가오고, 이후 설득과 거부를 반복하는 대화는 의무에 갇힌 자아와 의무에서 해방된 자아의 말다툼처럼 들린다. 앉은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는 레온을 흔들어 놓는 이는 나디아다. 레온에게 펠릭스가 거울에 비춰본 자신을 가리키듯 내면에 속한 인물이라면, 나디아는 생김도 성향도 파악하기 어려운 외부인이다. 별장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나디아의 얼굴을 마주한 레온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나디아와 인사를 나눈 날 드디어 바다에 나갈 결심을 하고, 그녀의 애인 데비트(에노 트렙스)까지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 못 이기는 척 합류한다.
네 명의 청춘 남녀가 모여든 여름 별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차지한 <어파이어>는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열 번째 장편영화이자, ‘역사 3부작’으로 칭하는 <바바라>(2012)-<피닉스>(2014)-<트랜짓>(2018)에 이어 <운디네>(2020)로 시작한 ‘원소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어파이어> 개봉을 앞두고 감독은 시사회와 인터뷰에서 연출 의도를 여러 차례 밝혔다. 본래 차기작에서 디스토피아 사회를 다루려고 했으나 팬데믹을 거치며 그러한 절망을 그려내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그 무렵 에릭 로메르의 영화와 안톤 체호프의 소설을 다시 보며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 요지였다. 감독이 예고한 대로 <어파이어>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머러스하며 여름 특유의 계절감을 묘사하는 데도 공을 들인다. 다만, <어파이어>는 밀고 당기는 연애 소동 대신에 예술과 젊음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주인공에게 집중한다. 레온은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바람에, 손에 쥔 “형편없는” 원고 뭉치와 씨름하느라 많은 기회를 놓친다. 그는 시시각각 번져 오는 산불의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마법처럼 빛나는 바다를 응시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지나쳐 버린 것 중엔 물론 사랑도 존재한다.
용기보다는 자만에 사로잡혀 나디아에게 소설을 보여줬던 레온은 혹평을 듣는다. 어수선한 마음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헬무트가 별장으로 찾아온다.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격식을 갖추는 레온과 달리, 다른 친구들은 그에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청한다. 헬무트는 레온이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펠릭스의 바다 사진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나디아가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드러낸다. 레온이 그들 모두에게 배신감 혹은 열등감을 느끼며 바닥으로 떨어졌을 법한 그 순간, 영화는 시를 들려준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아스라’다. 다 같이 둘러앉은 테이블에서 처음엔 헬무트와 나디아가 한 구절씩 주고받고, 다음엔 나디아가 홀로 전체를 읊는다. 술탄 공주와 노예의 문답으로 진행되던 시는 노예의 답으로 끝난다. “제 부족은 사랑하면 죽는 아스라입니다.” 왜 하필 시인가. 어째서 같은 시를 다른 목소리로 반복해서 들려주는 걸까. 돌림노래를 부르듯 시를 낭독하며 사랑과 죽음을 음미하는 시간. 영화는 그렇게 레온을 깨우치려 하는 것 같다. 적당히 재료를 포개어 만든 ‘클럽 샌드위치’와는 다른 맛을 내는 문장들을 속삭이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을 한데 엮으면서 영화는 지금 곁에 있는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뒤이어 헬무트는 복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주저앉고, 여름 한낮의 열기 가득한 하늘에서는 멀리서 날아온 재가 눈처럼 흩날린다.
<어파이어>는 저만의 세계에 몰두하며 시야를 제한해 버린 청년에게 더 넓은 곳 혹은 더 거대한 것을 들이미는 대신에, 청각을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을 암시하려 한다. 고요를 깨뜨리는 헬기의 굉음부터 밤낮없이 울어대는 새와 풀벌레 소리, 사랑을 나누는 연인의 신음, 높낮이가 다른 웃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리가 레온을 둘러싼다. 이는 주변에 존재하는 재난과 위험을 경고할 뿐만 아니라, 풍요와 낭만, 죽음과 비밀 등 삶의 주요한 주제를 아우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바깥을 바라보기까지 레온에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화염에 뒤덮여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둔감하게 버티던 청년은 끝내 어디론가 달려가고, 제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열정을 불씨 삼아 새로운 글을 써 내려간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침입이나 훼손으로 간주하며 등 돌렸던 레온이 몸을 반대로 돌려세우는 순간, 그는 작은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못 보던 것에 시선을 던질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 있다. <어파이어>는 그렇게 팬데믹 시대에 길어 올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삶과 창작을 이끄는 에너지를 되새긴다. 고립을 끊어내고 성장으로 향하는 길을 인물에게 제시하는 마음 씀씀이가 강인하면서도 너그럽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