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영화를 만난다는 사실은 언제나 관객들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생소한 국가에서 잊혀진 이름을 발굴해내는 일은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넓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시네필들의 정전에는 프랑스와 미국, 이탈리아와 독일, 일본과 홍콩, 러시아와 영국 등 소수의 국가만이 줄곧 소개됐다. 동유럽 영화가 본격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소개된 것은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조망을 받기 시작했다. 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의 영화들은 80년대 이후에야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 영화는 임권택을 기점으로 주류 영화계에서 주목하기 시작했고,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등의 대만 뉴웨이브 역시 80년대를 기점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수록되기 시작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으로 대변되는 태국 영화 역시 2000년대에 들어서 각광을 받은 셈이니, 상대적으로 아시아의 영화는 보다 늦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 영화의 현재 라브 디아스

현재 필리핀의 거장을 꼽자면 단연 초장편 영화 위주의 작업을 이어가는 라브 디아스가 있을 것이다. 2016년 <떠나간 여인>을 통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그의 신작들은 매년 전주와 부산에서 소개되고 있다. 올해 전주에서도 무려 6시간 52분에 달하는 <필리핀 폭력 이야기>(2022)가 초청되었으며, 다가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대적으로 그의 영화치고는 짧은 (?) 3시간 35분 분량의 <호수의 깊은 진실>(2023)이 상영될 예정이다. 하지만 라브 디아스의 세대 훨씬 이전인 1970년대부터 이미 필리핀 영화계에서는 ‘필리핀 뉴웨이브’라는 역사적인 움직임으로 세계 영화사에서 주목받은 감독들이 있다. 필리핀 뉴웨이브는 할리우드의 B급 액션물을 모방하는 작품으로 가득했던 필리핀 영화 산업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영화 운동이었다. 어쩌면 라브 디아스도 그들의 유산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위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정기 프로그램으로 두 편의 영화를 연속으로 보아 각 작품을 색다르게 경험하는 방식인 ‘KOFA 더블 피쳐’라는 기획전을 개최한다. 이번 9월 19일부터 10월 3일까지 2주간 이어지는 상영회에서는 두 편의 영화가 아닌 두 감독의 영화를 소개한다. 바로 필리핀 뉴웨이브의 기수 리노 브로카와 마이크 드 레온이 그 주인공이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리노 브로카의 대표작인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1975), <인시앙>(1976)과 마이크 드 레온의 대표작인 <암흑>(1976), <인 더 윙크 오브 언 아이>(1981) 총 네 작품이 상영된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의 압제와 폭력의 시대였던 1970년대를 견뎌내며 필리핀 영화의 활로를 모색했던 두 감독의 작품이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알아보자!


리노 브로카

1970년대 필리핀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단연 리노 브로카다. 1970년 첫 영화 <수배: 완벽한 어머니>를 만든 이후로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연출한 그는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맞서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마르코스 독재 정권의 폭정은 극에 달했다. 한국도 동시기에 독재 정권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부 독재가 이어지며, 언론의 자유가 탄압되었던 것처럼 필리핀의 모든 기본권은 철저히 군부 정권에 의해 짓밟혔다. 반정부 인사부터 무고한 국민까지 감금과 고문을 자행했으며, 1974년 팔림방 학살을 비롯하여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 암살 사건까지 마르코스 정권의 극악무도한 악행은 정권 집권 내내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노 브로카의 영화 세계는 정치적 급진성과 더불어 탁월한 영화 미학으로 정권의 폭력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의 대표작인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냈고, 199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꾸준히 칸을 비롯한 세계 영화제에서 초청받게 되었다. 동시기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처럼 리노 브로카는 자국 내에서 퀴어 시네마의 지평을 연 감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엄한 정권의 통제 속에서도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하며 인권에 대한 의제에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인 그였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

리노 브로카의 대표작인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처럼 여겨진 도시 마닐라의 민낯을 속속히 밝혀낸다. 마치 로베르토 로셀리니나 비토리오 데 시카의 초기작처럼 리얼리즘적인 카메라로 폭력과 수탈, 죽음과 자본으로 촘촘히 얽힌 마닐라의 뒷모습을 또렷하게 담아낸다. 돈을 벌기 위해 마닐라로 떠난 자신의 여자친구 리가야의 행방을 찾아 나선 젊은 청년 훌리오는 공사장부터 매음굴까지 고된 노동과 모진 수탈을 견디며 하루를 살고 있다. 리가야는 크루즈 여사라는 의문의 여성에 의해 마닐라의 매음굴로 팔려 가고, 훌리오는 제대로 된 급여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거리를 전전하며 그녀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훌리오가 거니는 마닐라의 풍경은 죽음과 빈곤으로 가득하다. 노래를 좋아하던 동료 인부는 공사 현장에서 추락 사고를 당하고도 제때 처치를 받지 못하고, 친구를 찾아 나선 길에서는 화재에 휩싸여 전소한 집터만이 남아 있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같은 시기 할리우드에 등장한 <택시 드라이버>(1976) 세상보다 더 잔혹하다. 영웅이 되고자 한 트래비스는 결국 손에 피를 묻히며 자멸하듯, 자신의 애인 리가야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친 훌리오는 끝내 폭력과 살인에 경도되고 만다. 조금이라도 이 수렁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훌리오의 맑은 영혼은 점차 지옥 같은 현실에 잠식당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도시라는 거대한 괴물이 그를 집어삼키듯,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지옥도를 경험한다. 마르코스 정권에 의해 황폐화된 마닐라의 풍광을 리노 브로카는 어떤 리얼리즘 영화보다도 잔혹하고 가슴 아프게 그려냈다.


마이크 드 레온

리노 브로카가 1970년대 초반 필리핀 영화에 새로운 충격을 선사하며 신호탄을 알렸다면, 마이크 드 레온은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를 통해 세계에 주목받기 시작한 필리핀 영화에 힘을 실었던 존재다. 1976년 장편 데뷔작으로 발표했던 <암흑>은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이후 <인 더 윙크 오브 언 아이>, <배치 81>(1982) 등의 작품이 칸에 초청되며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 연출 이전부터 리노 브로카의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의 제작과 촬영에 참여했고, 필리핀 시네마 아티스트라는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여 기존 필리핀 영화계와는 차별화된 양질의 작품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99년 <3세계 영웅>을 끝으로 영화 연출을 멈춘 듯 보였지만, 20년이 지난 2018년 <시민 제이크>를 통해 영화계에 복귀하며 여전히 필리핀 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를 작품 안에서 꾸준히 제기해 왔다.


<암흑>

마이크 드 레온의 <암흑>은 리노 브로카의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와는 다른 장르의 방법을 통해 독재 정권과 필리핀의 역사를 겨냥하고 있다.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가 마닐라라는 도시를 누아르의 풍경으로 설정한 뒤, 참혹한 현실과 폭력의 세계를 리얼리즘의 태도로 조망하였다면, <암흑>은 마닐라가 아닌 필리핀의 목가적인 지방으로 시선을 돌려 오컬트와 포크 호러의 문법을 사용한다. 마닐라의 잡지사에서 사진사로 일하는 준은 필리핀의 부활절 고난 주간을 맞아 전신마비의 아버지를 보러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곳에서 준은 테레사라는 신비로운 소녀를 만나게 된다. 테레사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언니 로사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심령술사에게 빙의를 부탁하고, 그날 이후로 테레사는 종종 죽은 언니의 혼령이 쓰이는 기묘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암흑>의 세계에서 남성은 폭력과 살인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된다. 아버지는 전신마비로 죽음 문턱에 놓여있고, 고난 주간을 맞은 마을 남자들은 면류관과 채찍, 십자가를 통해 피를 흘리며 죗값을 치러야만 한다. 그리고 준은 사진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지만, 그 안에서 아버지의 죄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암흑>의 포크 호러는 사실 폭력과 파시즘으로 점철된 마르코스 정권을 지켜보고 있는 젊은 지식인의 부끄러움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작동하는 공포는 유령이나 복수, 혹은 잔혹성이 아니다. 독재자의 폭력과 압제가 다음 세대에서도 대물림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마이크 드 레온의 <암흑>은 그런 의미에서 시대와 역사를 돌아보며 느끼는 부끄러움에 대한 고백이 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번 ‘KOFA 더블 피쳐: 리노 브로카 x 마이크 드 레온 기획전’은 10월 3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70년대의 필리핀의 압제에 맞선 두 감독의 대표작을 감상하고 싶다면, 지금 바로 예매해보는 것은 어떨까?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통해 확인해보자.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