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는 부모, 학교, 지역 공동체, 정부 모든 요소들이 맞물려 돌아가야만 한다는 의미를 지닌 이 아프리카 속담을 뒤집는 한 소녀가 등장했다. 샬롯 리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스크래퍼>(2023)의 오프닝 크레딧은 이 속담 위에 가차 없이 엑스(X) 자를 그어버린다. 그리고 그 위에 소녀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라는 문구를 당당하게 적는다. 아무 도움도 없이 12살의 소녀가 꿋꿋이 살아갈 수 있다는 당찬 태도. 정말 이 아이는 당당한 그 태도처럼 험난한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른 나이에 홀로 서게 했을까?

이 도발적인 오프닝 시퀸스를 마주한다면, 자칫 이 영화가 사회 고발물처럼 모진 세상의 풍파를 감내해야 하는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혹은 지나치게 이 소녀의 세계를 동화적으로 그려 아름다운 풍경과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경도되어 그저 이상적인 소녀의 홀로서기가 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샬롯 리건의 <스크래퍼>는 생각보다는 현실적이고, 동시에 생각보다는 따뜻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녀의 흔적을 그리워하면서 홀로 살기를 고집하는 소녀 조지(롤라 캠벨)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제이슨(해리스 디킨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소녀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공존한다. 하지만 <스크래퍼>는 이 서툰 두 사람을 냉대하지 않는다. 이번 추석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이 서툰 부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불완전한 상흔을 긍정하며 전진하기

조지가 홀로서기를 택한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과 떠나간 아버지 때문이다. 관료주의적인 사회복지사들을 속이면서, 자전거를 훔쳐 생계를 감당하면서, 조지는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어떤 점에서 조지는 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끼니를 거르지 않고, 방 청소를 꾸준히 하며, 친구 알리(알린 우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조지의 삶에 자신을 버리고 이비자 섬으로 떠난 철없는 아버지 제이슨의 존재는 불청객일 뿐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지는 상한 우유를 그대로 먹고 있고, 어머니의 빈자리에 대한 강박으로 가득하며, 교우관계와 학교생활에서 엉망인 상태다. 제이슨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으로 돌아온 그곳에서 서툴지만 조지에게 손을 내민다. 두 부녀는 서로 그리움과 죄책감이라는 상흔을 안고 산다. 아마 이 지점 때문에 둘은 앞으로도 서로의 가슴을 찌르는 가시를 품고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지와 제이슨은 삶을 긍정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사실 서툰 부모와 성숙한 딸의 모습은 최근 영미권 독립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국내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과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 썬>(2023)은 모두 어리고 불안정한 부모와 그들보다 성숙한 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애프터 썬>이 죽음으로 향해가는 아버지를 애도하듯 가장 행복한 시절을 반추하고,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보호 기관에 맡겨져 갈라질 수밖에 없는 모녀의 현실로부터 상상과 꿈으로 도망쳤다면, <스크래퍼>는 있는 그대로 어리숙함과 잘못을 품어나가면서 한 발을 내딛는다. 낙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조지와 제이슨의 삶이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독특한 부녀 케미. 해리스 디킨슨 X 롤라 캠벨

조지는 같은 반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알리와 절교를 선언하기도 한다. 제이슨이 조지와 아내에게 저지른 잘못은 보편적인 시선에서 쉽게 용인되는 행위가 아니다. 조지 앞에 그가 나타났을 때도 제이슨은 철없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부녀가 한 프레임 안에 담길 때, 우리는 긴장감보다는 이들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게 된다. <스크래퍼>의 매력은 사실 미울 수 있는 사소한 잘못들마저 사랑스럽게 만드는 두 배우의 연기합에 있다. 제이슨 역의 해리스 디킨슨은 미워하기 어려운 철없음을, 조지 역의 롤라 캠벨은 너무 일찍 성숙해진 아이의 어리숙한 틈을 훌륭하게 연기한다.

이게 바로 '발렌시아가' 페이스. 영화 <슬픔의 삼각형>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미 올봄에 해리슨 디킨슨의 얼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난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2022)에서 그는 멍청하고 허세 가득한 모델 칼 역을 맡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발렌시아가와 H&M을 오가는 표정 연기를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 그가 <스크래퍼>에서는 미워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돌아왔다. 두 역할 모두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면모가 있지만, 밉상처럼 보이는 칼의 허세와 달리 제이슨의 어리숙함은 어딘가 포근한 감정을 자아낸다. 처음으로 연기에 도전한 조지 역의 롤라 캠벨의 연기는 놀라움을 준다. 강인하게 슬픔을 버텨내는 모습 사이로 여전히 유약하고 미숙한 소녀의 모습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역이 감당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롤라 캠벨은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조지의 상처와 희망을 모두 표현해냈다.


당신이 사랑할 진정한 런던의 풍경들

조지가 입고 있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95-97 홈 저지

샬롯 리건의 <스크래퍼>의 스틸컷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조지가 늘상 입고 있는 축구 저지다. 최근 블록코어룩의 유행으로 빈티지 유니폼이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지금, 이상하리만큼 조지가 입은 빈티지 저지가 탐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아버지 제이슨이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언급된 이 축구 유니폼은 프리미어리그의 숨은 강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95-97시즌 홈 유니폼이다. 런던의 강호로 꼽히는 첼시, 토트넘, 아스날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팀이지만, 지난 시즌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도 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클럽 로고에서 알 수 있든 ‘해머스’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의 팀이다. 상대적으로 런던 연고의 타 팀들이 부유한 자신의 재력을 자랑할 때, 웨스트햄은 철저히 노동자들의 편에서 서민을 대표하는 인기 구단으로 자리 잡았다. 갑자기 웬 축구 이야기냐고 의아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축구는 영국 문화의 정수다. 그리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는 노동자의 팀이다. <스크래퍼>는 지극히 영국적인 풍경과 노동자들의 문화를 담고 있다.

실제로 샬롯 리건 감독은 영화의 의도를 묻는 말에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노동 계층의 이야기 속에 그 세계의 유머를 담아내고 싶다는 충동이었습니다. 저에게 그 세계는 행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분명 투쟁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기쁨과 사랑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라는 답을 남겼다. <스크래퍼>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조지와 아이들을 담아내는 카메라와 함께 영국 힙합씬을 대변하는 그라임과 개러지가 흘러나온다. 조지의 친구들은 인도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다. 문화의 멜팅 팟을 자처하는 영국의 노동자 계급의 문화가 이 오프닝 시퀀스에 전부 담겨있는 셈이다. 이 영화는 <트레인스포팅>(1996)이나 <벨벳 골드마인>(1998)처럼 영국의 어두운 언더그라운드 문화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스펜서>(2021)처럼 상류층의 삶을 다루지 않는다. 그저 영국을 지탱하는 노동 계층의 삶을 소녀 조지의 시선에서 행복하게 풀어낸 것이다. 그 세계에는 유머가 있다. 각박하고 빠듯하게 보이지만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사회가 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