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턴트맨이 위험한 장면을 대신 연기해 주는 사람이라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스턴트맨은 자기 자신을 숨기는 존재다. 주인공에게 부여된 육체적 고난을 대신 겪으면서 이름도 얼굴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 보통 사람보다 특별한 신체적 능력을 지녔지만, 자기 자신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무명의 인물. 그러면서 그 일로 먹고사는 사람.
스턴트맨은 과연 어떤 얼굴로 사는가
스턴트맨의 일상은 지인이 아닌 이상, 잘 알 수 없다. 스턴트맨을 하다가 전격적인 배우가 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때 그의 과거는 흐릿하게 희석된다. 스턴트맨은 그 자체로 스타가 될 수도,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도 없다. 스턴트맨 없이 위험한 액션을 몸소 실연할 줄 아는 유명 배우는 성룡 등 소수에 불과하다. 모두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누군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존재를 감춘 채 위험한 일을 대신해주곤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2011)는 언뜻 평범한 누아르 영화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갱 조직이 등장하고 자동차 추격 씬 및 잔혹한 살인 장면도 꽤 살벌하다. 범죄 영화에서 필수라 할 수 있는 음모와 계략도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하고 고요하다. 플롯만 따지면 개연성도 설득력도 느슨한 편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보는 이를 몰입하게 하는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일단 주인공인 라이언 고슬링 덕분이라고 해 두자.
라이언 고슬링이 맡은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크레딧에도 단지 ‘Driver’라고만 뜰 뿐이다. 전사(前史)도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 나타나 카센터에서 일하며 스턴트맨을 부업 삼고 가끔씩 범죄자들의 도주를 돕는 일만 할 뿐이다. 자동차에 관해서라면 1에서 100까지 훤히 꿰고 있으며 운전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갱들에게 그는 ‘운짱’(물론 한국식으로 번역된 단어다)이라고만 불린다. 일개 ‘운짱’ 주제에 갱단을 혼자 궤멸시키는 솜씨를 보면 과거에 어느 어두운 세계에서 ‘한가닥(?)’했던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이름도 과거도 없는 이웃집 슈퍼히어로?
‘운짱’은 늘 표정이 없고, 필요한 말 외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그녀의 아들을 알게 된다. 처음 마트에서 맞닥뜨리고, 아이린의 차가 고장 나고, ‘운짱’이 아이린을 도와주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주치곤 하다가 이내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된다. 아이린의 아들 베니치오에게도 좋은 이웃집 아저씨 역할에 충실하는데, 아이린의 남편 스탠다드(오스카 아이작)는 감옥에 수감 중이다.
아이린이 ’운짱‘이 일하는 카센터에 자신의 고장 난 차를 가지고 오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아이린을 대하는 ’운짱‘의 태도는, 영화 서두에서 교묘한 운전 솜씨로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을 따돌리면서 범죄자들의 도주를 돕는 장면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인물이라 해도 될 정도다. 선하고 수줍은 미소로 ’운짱‘은 아이린 모자와 함께 드라이브를 즐긴다. 사뭇 훈훈해질 것만 같은 분위기는 스탠다드가 갑자기 출소하면서 살벌하고 불안해진다. 스탠다드는 범죄조직과 얽혀 있는 인물이었던 거다.
이때, 아이린의 태도가 미묘하다. ‘운짱’에게 여전히 호감을 느끼면서도 남편을 떠날 수 없다. 아예 다른 마음(?)은 접어둔 듯한 태도다. 그럼에도 ‘운짱’은 결국 그들 가족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스탠다드는 범죄조직에게 커다란 빚을 진 상태. ‘운짱’은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무조건 아이린을 위해 움직인다. 갱단과 접촉을 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일을 스탠다드와 함께 처리해주기로 한다. 이 자체가 갱단의 계략이다. ‘운짱’은 뒤늦게 눈치채고 스탠다드는 살해당한다. 이제 ‘운짱’의 목표는 단 하나. 그 모든 폭력과 계략으로부터 아이린과 베니치오를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결국엔 그들을 지켜낸다.
‘운짱’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범죄조직을 위해 일할 때 꼭 걸치는 옷이 있다. 등에 노란 전갈 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진 은색 점퍼다. 그닥 세련되지도,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 점퍼가 ‘운짱’의 이중적인 모습을 상징한다는 건 불필요한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퍼를 보면서 떠오르는 게 있다. 슈퍼히어로. 그 점퍼가 미국에서 창조된 그 많은 슈퍼히어로들을 풍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과장만은 아닐 거다. 슈퍼히어로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다. 불의와 부당한 폭력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을 대신해 싸워주는 존재.
“5분 안에 끝나지 않으면 손 떼겠다!”
감독의 의도까지 정확히 헤아려 본 건 아니다. 하지만 ‘운짱’의 행동방식이나 심리를 보면 그가 현실에선 불가능한 슈퍼히어로의 존재 방식을 아주 인간적으로 재현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운짱’은 영화 초반 범죄자들의 도주를 도와주면서 이른바 ‘5분의 원칙’을 제시한다. ‘5분 안에 모든 게 끝나지 않으면 손 뗀다’는 거다. ‘운짱’은 매사 그 원칙에 충실하다. 어떻게 생긴 원칙인지도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이린과의 만남을 통해 그 원칙은 부각되기도 손상되기도 한다.
‘운짱’이 아이린을 처음 만나 호감을 느끼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물론, 심리적 시간은 다른 식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다가 아이린의 남편이 출소하면서 ‘운짱’이 뭔가(굳이 설명해야 할까)를 포기하는 데에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운짱’은 끝끝내 아이린을 보호하려 든다. 아이린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삶의 명분처럼 작용하게 되는데, ‘5분의 원칙’이 적용하는 듯한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스탠다드가 살해당하고 갱단의 돈 가방을 탈취한 ‘운짱’이 아파트로 돌아온다. 그가 아이린에게 말한다. “돈은 내가 가지고 있어요. 베니치오를 데리고 같이 가 줄 수도 있어요. 보살펴 줄 수도 있고.” 이 말 중간에 아이린이 ‘운짱’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운짱’으로서는 처음 내뱉는 고백이라 할 만한 상황이다. 아이린은 눈물을 머금고, 뭔가 모욕감을 느낀 것 같다. ‘운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린도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웬 남자가 타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찮다. 상황을 직감한 ‘운짱’이 아이린에게 키스한다. 아이린도 피하지 않는다. 직후, 남자의 재킷 안쪽에 숨겨진 총이 보인다. ‘운짱’이 냉혹하게 남자를 처치한다. 아이린이 경악한다. ‘운짱’의 실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셈.
그의 뒷모습은 스스로를 찌르는 전갈의 꼬리
평범한 듯한 이 장면을 오래 곱씹게 된다. 아이린의 심리를 알 듯 모를 듯하다. 괴한을 처치하는 ‘운짱’의 모습에 질겁했다는 건 누구라도 납득 가능하지만, 그전에 ‘운짱’의 고백 어느 구석이 그녀를 화나게 했을까. 다시 돌려봐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복도에 마주 선 채 대화하는 ‘운짱’의 뒷모습만 선연할 뿐이다. 전갈은 ‘운짱’의 숨겨진, 어쩌면 더 실체에 가까운 존재일 수도 있다. 앞모습만 보면 수더분하고 멀끔한 얼굴이지만, 등에 전갈이 새겨지는 순간, 그는 뒤틀린 슈퍼히어로, 그러나 초능력은 불가능한 어둠 속 인물이 된다. 등에 자신의 어둠을, 그것도 살벌하고 잔혹한 본능을 숨긴 자. 그러면서 때로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자. 아이린은 그의 등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본성을 봐버린 걸까.
사랑하고 싶지만,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무조건 자신을 아끼고 보호하려 하지만, 그 사랑과 보호 자체가 독침으로 여겨지게끔 만드는 존재. 때로 그런 존재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질식시킬 수도 있다. ‘운짱’ 입장에서는 모든 게, 5분 안에 분명해져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아마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확신하고 싶었을 것이다. 등에 있는 전갈을 지우고 거기에 사랑하는 존재를 업은 채 평범한 한 남자로 사는 삶을. 하지만 아이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었고, 그것이 너무 슬퍼 그의 뺨을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운짱’은 어디론가 떠난다. 사랑도 범죄도 세상엔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뻔한 결말일 테니까. 그는 늘 그랬듯 또 다른 누군가의 위험을 대신 감수했을 뿐, 여전히 이름도 과거도 사랑도 없다. 그게 스턴트맨의 운명이니까.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