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의 마라톤 장면은 놀랍다. 역시 마라톤 선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강제규 감독의 전작 <마이웨이>(2011)에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손기정(윤희원)과 제2의 손기정을 꿈꾸는, 아마도 <1947 보스톤>의 서윤복을 모델로 삼은 것 같은 김준식(장동건)이 등장하는데, 당시와 비교해도 확 달라진 마라톤 장면을 보여준다. 강제규 감독은 “배우들이 실제 마라톤 선수처럼 보일 때 관객은 영화를 믿고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 마라톤 국가대표 권은주 감독과 함께 했다. 권 감독은 1997년 10월 춘천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26분 12초로 대한민국 여자 마라톤 최고 기록을 세운 장본인이다. 이 기록은 이후 무려 21년간 깨지지 않았기에, 권 감독은 오랜 시간 한국 여자 마라톤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난 은퇴한 적 없다’는 마음으로 현재까지도 마라톤을 지도하고 있는 권 감독은 <1947 보스톤> 마라톤 현장 지도를 맡아 마라톤 선수의 자세와 표정, 호흡 등 기초적인 부분부터 훈련 방법, 심리적인 컨디션까지 배우들에게 훈련시키며 트레이닝을 진행했다. 여기에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1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 등 화려한 기록을 보유한 이봉주 선수와 1950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자인 고 함기용 선수(안타깝게도 영화 개봉 전인 2022년 11월 9일, 향년 91세로 별세) 등 실제 보스턴마라톤대회를 뛴 경험이 있는 ‘전설’들이 자문을 맡아 경기 장면의 리얼리티를 높였다.
권 감독은 현재 런포라이프 대표로서 러닝클래스 ‘런위드주디’를 운영하고 있다. 보행과 러닝 패턴 분석을 통해 개개인의 부상을 예측하여 방지할 수 있고, 개인의 러닝 패턴에 맞는 클래스를 병행하며 마라톤과 러닝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지금도 달리고 있다. 선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47 보스톤>이라는 영화를 만나 함께 하기까지 그와 긴 대화를 나눴다.
<1947 보스톤> 촬영 전부터 종료까지 달리기 장면에 대한 전반적인 지도를 맡았는데, 촬영 전의 훈련과 촬영 현장에서의 지도는 어떻게 진행됐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한 달 반 정도 훈련했다. 그리고 촬영 시작하고 달리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은 늘 현장에 대기하며 지도했다. 영화에서 손기정 감독(하정우)이 “무릎 더 올려!” 하는 것처럼 동작을 지도했고, 그런 장면이 영화에 반영되기도 했다. 팔을 이렇게 저렇게 해라, 숨소리를 어떻게 내는 게 좋겠다, 하는 것도 얘기했다. 컷이 끝나면 모니터로 배우들의 동작을 확인하면서 자세 교정도 했다. 그렇게 크랭크업하기까지 달리는 장면에 대한 전반적인 지도를 맡았다.
서윤복 선수를 연기한 임시완 배우는 어땠나.
임시완 배우가 진짜 열심히 했다는 건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웃음) 아이돌 가수로서 몸을 잘 써서 그런지 운동신경도 상당히 좋아서 동작을 잘 익혔다. 기본적으로 정해진 코스를 전력질주한 뒤 속도를 늦춰서 잠깐 쉬고 열이 식기 전에 다시 전력 질주를 반복하는 인터벌 훈련을, 4백 미터 인터벌 훈련으로 했다. 속도를 더하고 구간을 통과할 때의 느낌을 잘 체감하기 위해서다. 한창 더울 때여서 진짜 힘들었을 거다. 선수로서 호흡하는 것부터 자세 유지하는 것까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치려고 했다. 시키는 대로 정말 잘 따라와 줬다. 마라톤 영상도 계속 보면서 감각을 익혔고, 나중에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에도 나가서 10km를 실제로 뛰었다. 기록이 41분 정도였는데 나보다도 불과 30초 정도 늦은 수준이다.
영화에서 서윤복 외의 다른 선수들도 상당히 훈련한 것처럼 느껴졌다.
맞다, 함께 달리는 주변 선수들의 리얼리티도 중요하기 때문에, 나중에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달리는 외국인 선수 배우들도 함께 운동하고 지도했다. 마찬가지로 서울숲과 체육센터에서 따로 모여 한 달 정도 운동했다. 그들 역시 한여름에 촬영한 게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 선수들도 한여름에는 시원한 곳으로 가서 전지훈련을 하니까 배우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마라톤 선수로서의 ‘표현’을 위해 중점을 둔 부분은 어디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속도감’이다. 마라톤이라고 하면, 보통 천천히 달리는 거라 생각한다. 마라톤 TV 계를 봐도 사실 그 속도는 잘 체감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라톤 구간 기록을 보면 백미터를 16초나 17초 정도로 달려야 그런 기록이 나온다. 20초가 절대 안 넘는다. 특히 서윤복 선수가 후반부에 경쟁 선수들을 따라잡으며 질주할 때는 거의 백미터를 12초로 달리는 속도를 내어야 그런 역전이 가능하다. 보통의 성인 남자가 그냥 단거리 전력 질주로 백미터를 12초대에 끊어도 엄청난 기록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마지막 역주를 보며 왜 저렇게 빨리 뛰지? 너무 비현실적인 것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서윤복 선수는 그때 진짜 그렇게 달렸다. 그게 팩트다. 실제로 무척 경쾌하게 결승선까지 들어왔고 절대 기진맥진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조국을 생각하며 뛰었을 것이다. 그럴 때 본인도 모르는 초인적인 힘이 나올 수 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마라톤 장면의 ‘현장 지도’는 사실상 ‘연기 지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연기 지도라고 하면 쑥스럽지만, (웃음) 그냥 배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숨이 차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텐데, 대사도 하고 연기도 해야 하니까. 완성된 영화를 볼 때는 편집이 되어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 실제로는 배우들이 한 장면 촬영하기 위해 거의 매번 1km 이상을 뛰었다. 필요한 장면만 얻기 위해 잠깐씩 달리고 멈춘 게 아니라, 진짜 마라톤을 하는 느낌으로 길게 달린 다음 나중에 편집한 것이다. 구간마다 호흡이나 표정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길게 달릴 필요가 있었다. 그처럼 중점을 둔 건 각 구간마다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거였다. 일단 출발선에 섰을 때의 설레고 상기된 표정이 중요했다. 힘들게 이 자리에 선 만큼 빨리 총성이 울려서 뛰쳐나가듯 달리고 싶을 수도 있고, 영영 그 총성이 울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섞여 있다. 어쩌면 서윤복 선수는 국제 대회가 처음이고 출전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겪었기에 굉장히 흥분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 뛰는 남승룡 선수가 그가 처음부터 지나치게 속도를 내지 않게끔 훌륭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서윤복은 후반부 코너에서 선두에 섰다가 어떤 관객의 개가 달려드는 바람에 넘어져서 무릎과 팔꿈치가 다쳤지만, 이후 2킬로미터 오르막길까지 질주해 우승을 따냈다. 그런 황당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영화 속 장면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 있다.
후반부에 개가 달려들어서 쓰러졌다가 다시 달렸다는 건, 부끄럽지만 이번에 영화를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 손기정, 서윤복 두 대선배님의 우승만 알았지, 그 험난한 과정을 몰랐던 거다. 그래서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살면서 마치 당연하게 얻어낸 결과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코 당연하게 얻어낸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 영화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당시 선수들은 지금으로 치면 북악스카이웨이 쪽의 험준한 언덕 지형으로 달리기 훈련을 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영화에도 나오는 하트브레이크 언덕을 비롯해 보스톤 지형에 잘 맞는 훈련이었다. 우리 영화는 제천에 있는 굽이굽이 오르막 지형의 산에서 훈련하고 촬영했는데, 역시나 한여름이어서 배우들이 진짜 힘들었을 거다.
마라톤 선수로서 실제로 손기정, 서윤복 선수를 만나 뵈었을 텐데 어땠나.
손기정 선생님은 내가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난 다음 찾아뵌 적 있다. 당시 병원에 계실 때였는데, TV로 마라톤을 봤는데 잘 뛰더라면서 칭찬해 주셨다. “내 기록(2시간 29분 19초) 보다 더 좋네, 잘했어. 계속 열심히 해요”라고 말씀해주시는데 정말 울컥했다. 내게는 TV 속의 88올림픽 성화봉송주자로 기억되는 손기정 선생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거다. 서윤복 선생님은 당시 협회의 행정 관련 일을 맡으셔서 종종 뵐 일이 있었는데, 정말 인자하신 선배님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영화에 자문으로 참여하신 고 함기용 선생님도 기억난다. 언제나 경기장에 가면 꼭 계셨던 분이고 선수들의 태도나 마음가짐에 대해 엄하신 분이었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자이시기도 한데, 놀랍게도 1950년 대회에서는 송길윤 선수 2위, 최윤칠 선수 3위를 기록하면서 1, 2, 3위를 한국 선수들이 모두 차지했다. 정말 믿기 힘든 기록이다.
마라톤 영화에 참여하다 보니 선수로서의 지난날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겠다.
한국 여자 마라톤이 아직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적 없다. 당시 내 최고 기록이 월드 랭킹 톱10 수준이었고, 올림픽 메달권에 가장 근접하다는 얘기가 많았지만, 아쉽게도 메달을 따지 못했다. 운동선수라면 언제나 올림픽 시상대에 서는 걸 꿈꾸기 때문에 왜 아쉬운 마음이 없겠나. 1997년에 신기록을 세운 뒤 1998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초청도 왔고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도 있었지만, 결국 부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때가 21살이었는데 1997년에 기록을 세우고 갑작스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사람들이 이걸 진짜 내 실력이라고 인정해 줄까’ 하는 생각에, 성과를 연달아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너무 무리를 했다. 당시 대부분의 기사 제목이 ‘여자 황영조 등장’, ‘제2의 임춘애 등장’ 이었다. (웃음) 큰 대회가 끝나고 하면 쉬면서 회복하는 것도 중요한데 스스로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다 보니 부상이 왔다. 운동선수로서 의욕만 앞섰을 뿐 사실상 무지했다. 아파도 참고 울면서 달린 거다. 그렇게 일본에 가서 수술을 받게 되면서, 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안타깝게 흘려보냈다. 임시완 선수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했다고 해야 하나. (웃음) 그만큼 내게 의미가 깊은 영화다.
그럼 실제 선수 입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아준다면.
아무래도 태극기를 달고 뛰게 되는 순간이 가장 좋았고 뭉클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장면이 아닐 수도 있는데 선수들이 통하지 않는 언어 때문에 답답해하는 장면이었다. 나도 선수 시절 런던마라톤대회나 로테르담마라톤대회에 나가본 적 있는데 해외 선수들과 자연스레 교류하고 정보도 얻고 싶어도 언어 문제로 그런 게 늘 아쉬웠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선수들이 무언가를 막 얘기하고 싶어도 ‘아임 러너’, ‘프렌드십’ 그렇게 초보적인 단어로만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예전 선수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와닿았다.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의 삶은 어떤가.
사실 (이)봉주 오빠처럼 공식적인 은퇴식은 안 했고, 영원히 선수라고 생각한다. (웃음) 운동선수로서는 어떤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서른 살을 앞두고 있던 때가 가장 힘들었다. 내가 세운 한국기록이 오래도록 깨지지 않았는데, 그게 큰 짐이었고 그 뒤로 나 스스로 더 나아지지 못하면서 우울증이 왔다. 출발선에 서는 것이 무서웠다. 당시 감독님에게 그만두겠다고 얘기하던 순간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러다 제주시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입단했고 2006년에 인천국제마라톤대회 하프 여자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제2의 마라톤 인생이 시작됐다. 그러다 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했다고 보면 된다. 2027년이 내가 춘천마라톤대회에서 한국기록을 세운지 30주년이라, 그때는 한번 춘천에서 다시 달려보고 싶다. (웃음)
현재 하고 있는 런위드주디는 어떻게 운영하게 됐나.
해외 전지훈련을 갔을 때, 코치와 선수가 보여주는 신뢰가 좋았다. 솔직히 부러웠다. 나 또한 선수 출신이라, 나중에 지도자가 되면 선수와 함께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꿈꿔온 지도자상이었다. 폭넓게는 러닝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올바르고 재밌고 건강하게 달릴 수 있게끔 지도하는 클래스를 3년째 해오고 있다. 건강이나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개인적인 기록 단축을 시도하는 분들에 이르기까지 달리기의 효과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그저 지금도 달리는 게 좋고 재밌어서 중독처럼 하고 있다. 함께 달리는 분들에게 늘 ‘우리 할머니가 되어서도 같이 달려요’ 그러고 있다. (웃음)
주성철 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