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임이 분명하지만, 가끔 '으, 어우, 저 진상', 명치를 세게 한번 치고픈 배우들이 있다. 오해하지 말라. 지독한 연기 때문이니, 연기자에겐 상찬의 말에 다름없다. 최근 한 배우의 나풀대는 귓속 털과 킁킁거림이 묘하게 거슬리더니, 잊고 있던 급소 강타의 욕구가 불쑥 치밀었다. '수탐' 능력을 활용해 선한 이들에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기어이 불행을 드리우는 드라마 <무빙> 속 '조래혁'을 연기한, 배우 '유승목' 이야기다.
<무빙> 이전에 <헤어질 결심>이 있었으니,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 유승목을 '기도수'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처음 배우 유승목을 의식한 건 <헤어질 결심>보다 15년 앞선, 영화 <검은 집>(2007)에서였다. 보험사에서 처리 못하는 골치 아픈 뒷일을 수습하는 '해결사'역으로 분한 유승목이 입원한 나일론 환자를 내려다보며, 혀로 앞니를 한번 '쩝'거리며 던지는 경멸의 눈빛은 언젠가 뒷골목에서 마주치고 못 본 척 급히 피했던 그 눈이었다!
어쩐지, 1993년 연극배우로 데뷔한 유승목은 <검은 집> 때 벌써 연기 14년 차 베테랑 연기자였다. 막말하는 양아치와 사이코패스 신이화(유선)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는 처연한 인간을 표현한 유승목의 연기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영화가 끝나도 내내 뇌리에 남았다.
봉준호도 사랑한 배우.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해무>(2014)
이런 연기를 하는데, 어찌 거장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그의 진가를 먼저 알아본 건 봉테일 봉준호. 봉준호가 제작자로 참여한 영화 <해무>까지 셈하면, 둘이 함께 한 작품만 세 개다. 유승목은 <살인의 추억>에선 기삿거리를 건지러 애쓰던 박기자를 연기했고, <괴물>에선 남일(박해일)과 노숙자(윤제문)를 태운 택시 기사로 출연했다. 뒷좌석에서 화염병을 제조하는 남일에게 "이 양반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남의 사업장에서"라며 짜증을 부리더니 이내 택시비를 따따블로 준다는 남일의 말에 군말 없이 한강으로 향했던 그 택시 기사가 유승목이다.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단연 영화 <해무>(2014). 청청 패션과 파마머리로 돈과 여자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는 속물적인 캐릭터 '경구'를 연기한 유승목은 당당히 포스터에 얼굴을 올리며 주조연급으로 첫 등장한다. 밀항을 하다 사람들이 죽은 실화 '태창호 7호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직선적이고 거친 인물을 연기한 유승목에 대한 호평은 남았다.
주인공 이름은 생각 안 나도, '기도수'는 생각나는 <헤어질 결심>(2022)
'깐느 박', 박찬욱도 유승목을 지나치지 않았다. <헤어질 결심>을 분명 두 번 봤는데, 기억나는 이름은 '기도수' 뿐. 이름도, 캐릭터도 강렬했던 유승목이 연기한 '기도수'는 서래(탕웨이)의 첫 남편으로 고산에서 실족사한다. 아크테릭스 차림으로 말러의 음악을 들으며 암벽등반을 하는 기도수는 고급스러운 취미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는데, 이것이 서래를 교묘히 구타하고, 서래의 몸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물건에 이니셜 KDS를 새기는 강한 소유욕을 가진 변태적 성향과 시너지를 내며 역사에 남을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유승목은 단역이지만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에도 임 일병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이로써 한국 영화의 세 명장, 봉준호, 박찬호, 이창동 영화에 골고루 참여한 셈.
진상 캐릭터 전문 연기자?! <1987>(2017) <강남 1970>(2015)
이성은 '저건 연기일 뿐이야'라며 달래지만,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다. 많은 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영화 <1987>을 보는 내내 그랬다. 유승목은 이 영화에서 박 처장(김윤석)의 오른팔 유 과장으로 분한다.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 중에 사망하자 사건 은폐를 지시한 대공수사처 박 처장의 말을 받들어 최 검사(하정우)에게 박종철 시신 화장 동의 문서에 서명하라 압박하는 장면에서 유승목은 능글맞게 머리를 조아리다 제 뜻대로 안 되자 급변하는 모습으로 권력에 기생하는 인물 특유의 성격을 드러냈다.
유 과장과 대적할 그의 필모 속 악역은 단연 <강남 1970>(2015)의 서태곤. 누가 <강남 1970>의 주인공이 김래원, 이민호라 했던가. 사실 연기는 유승목이 다하지 않았는가. <강남 1970>의 엔딩도 주연 배우가 아닌 유승목이 장식했다. 그가 연기한 서태곤은 부동산의 큰손이자 조직의 뒤를 봐주는 비리 정치인으로 위선적인 얼굴로 악행을 저지르는 냉혈한이다. 역할을 위해 몸무게를 5~6kg를 불린 스틸컷 속 그의 모습이 조금 낯설지만 귀엽다.
영화 속 속터짐 담당, <한공주>(2014) <터널>(2016)
배우님께 죄송하지만, '어유, 인간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악랄한 연기와 조금 다른 결로 유승목은 사람 속을 터지게도 한다. 영화 <한공주>에서 공주의 아버지를 연기한 유승목. 집단 성폭행의 희생자가 된 딸 공주(천우희)에게 오랜만에 찾아와 대뜸 사인을 하라며 탄원서를 내민다. 가해 학생의 부모가 준 돈으로 딸의 상처를 모른 척 덮고 외면하려는 모습에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의 명치를 칠 뻔했다.
<터널>에서는 직업정신이 아주 많이 투철한 방송국 출신 조 기자로 분해 우리의 속을 터뜨려 놓는다. 조 기자는 무너진 터널에 갇힌 정수(하정우)에게 전화를 걸어 생중계 보도를 시도한다. 바깥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휴대폰의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는진 그의 알 바가 아니다. "아깝다. 하루만 더 있다 나오면 기록 깨는 건데. 삼풍 때가 17일이잖아."라는 기막힌 대사로 이기적이고 몰지각한 인물을 찰떡같이 연기했다.
마무리는 훈훈하게, 선한 역도 OK!
1993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고, 1999년 <박하사탕>의 조연으로 매체 연기에 뛰어든 이래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에서 단역, 조연, 주연 역할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온 배우 유승목. 엄청난 스펙트럼 자랑하는 그의 연기만큼이나, 본 글에 담지 못한 작품들이 더 많다. <대장 김창수>(2017)에는 김창수(조진웅)가 탈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등 죄수들의 적대자에서 조력자로 변모하는 간수 '이영달'을, 염력(2018)에서는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루미(심은경)과 함께 민사장(김민재)에 맞서는 따듯한 인물 '김 씨'를 연기했고, 드라마 <모범택시>에서는 믿음직한 선배의 모습을 한 차장검사로 분해 극의 중심을 잡았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