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언어는 많고, 그만큼 번역할 것도 많죠! 그중에서도 긴 문장을 단 두 줄로 압축하는 영화 번역은 꽤나 매력적인데요. (에디터 또한 이 매력에 빠져 한때 영상번역 공부를 했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원어를 모르는 상황에서 관객과 영화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영화 속 자막은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때문에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분위기가 달라지는데요.
오늘은! 이토록 중요한 자막을 '창조'하는 영화 번역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세대별 대표 번역가들 위주로 알아보았는데요. 바로 만나러 가볼까요?!
먼저 1990년대 외화 대부분을 번역한 1세대 번역가 이미도, 김은주, 조상구입니다. 90년대 초중반 번역 작업을 시작한 이 세 사람이 10여 년간 번역한 영화는 무려 2천여 편에 달합니다. (이 정도면 독식 수준..!)
조상구 <밀리언 달러 베이비> <화양연화> <맨 인 블랙>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 <레옹> 등 '조상구'라는 이름은 낯설어도, <야인시대>의 '시라소니'는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1986년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배우 데뷔를 먼저 한 그는 다른 번역가들과 달리 생활고로 인해 번역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1987년 비디오데크가 출시되며 미개봉 외화가 비디오로 물밀듯 쏟아지던 때, 영화 <회색도시> 촬영 중 조감독이 비디오 번역하는 것을 보고 번역계에 발을 들이게 되죠. 90년대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며 이미도, 김은주와 함께 3대 번역가로 불렸으며, 그렇게 번역한 작품만 해도 1400여편이 넘습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번역 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그는 <야인시대> 이후 2007년부터 연기 생활에 전념하며, 잠정적으로 번역계를 떠났습니다.
'영화번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요. 공군 교수사관(영어교육 담당장교) 출신으로 1993년부터 번역을 시작한 그는 전성기엔 한달에 6~7편, 평균 3편 이상을 꾸준히 번역해왔습니다. 그렇게 10년간 400여 편을 번역했죠. 그는 번역 작업에 대해, "단순히 직역을 하는 게 아니라 의역, 삭제, 압축 등의 작업과 함께 그 나라만의 고유한 문화가 담긴 표현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바꾸는 이 작업은 제2의 창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2의' 창작으로는 모자랐던 걸까요. 현재는 '창작에 대한 갈증'을 이유로 출판사 운영과 책쓰기에 집중하면서 영화 번역계를 사실상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은주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오션스 일레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매트릭스>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나홀로 집에> 시리즈 등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녀는 일찍이 전공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어 공부에 투자했습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KBS 외화 번역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 일은 이후 20여 년간 영화번역을 하게 되는 발판이 되죠. 그녀가 번역 작업을 하면서 내내 울고,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면서도 울었다는 작품은 바로 <토이 스토리 3>,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작품이라고 하는데요. 한 인터뷰를 통해 "국경과 문화적 차이를 초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리는 작품"이었다고 밝혔습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1세대 번역가들이 차츰 사라지고, 세대교체가 되었습니다. 워너브러더스, 유피아이(UPI) 코리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등 주요 직배사들의 영화를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는 박지훈, 홍주희 등이 있죠.
박지훈 <닥터 스트레인지> <수어사이드 스쿼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인터스텔라> <다크 나이트 라이즈> <어벤져스> <인셉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이언맨> 등
IMF 외환위기와 함께 경기가 안 좋았던 1997년, 그는 영상번역회사를 운영하던 지인을 통해 비디오 번역 일을 하게 됩니다. 첫 작품은 <쉬리>의 영문 번역이었죠. 이처럼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번역 일은 적성과 잘 맞았고, 이후 미로비젼,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에서 한국영화를 해외 수출용으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20년을 번역업계에서 일하며 동판, 레이저, 디지털 자막 시대를 다 겪은 유일한 현역 영화 번역가이기도 하며, 국내에 개봉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 중 반 이상은 박지훈 번역가가 작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이 워낙 많다 보니 그만큼 의역과 오역에 대한 관객들의 불만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홍주희 <소스코드>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스타 트렉: 더 비기닝>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마리 앙투아네트> <엑스맨3> <이터널 선샤인> <이프 온리> 등 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그녀의 원래 직업은 은행원! 하지만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역시 IMF 외환위기 시절 사표를 쓰고 SBS 방송아카데미 영상번역 과정을 이수합니다. 이후 1세대 번역가 조상구에게 번역 기초를 배웠고, 1999년부터 영화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죠. 2000년대 초중반 <디 아더스> <이프 온리> <이터널 선샤인> 등의 작품을 통해 '감각적인' 자막을 보여주며, 훌륭한 번역을 한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2009년부터 블록버스터 영화 번역을 주로 맡으며 동시에 비판도 받기 시작하는데요. 박평식 평론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20자평에 '철딱서니 없는 한글 자막부터 손봐라'고 적었을 정도..! 다시 예전과 같은 좋은 작품의 좋은 번역으로 만나볼 수 있길 바랍니다!
3세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번역가로는 황석희, 정구웅, 윤혜진이 있습니다.
황석희 <로건> <존 윅-리로드> <히든 피겨스> <핵소 고지> <재키> <문라이트> <데드풀> <스포트라이트> <캐롤> <노예 12년> <아메리칸 허슬> <웜바디스> 등 지금 가장 핫한 번역가죠. 네이버 검색창에 '영화번역'까지만 쳐도, '황석희'가 따라 나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미드 <뉴스룸> <NCIS>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 전문 영역을 다룬 작품을 번역해왔기 때문에 번역의 질도 굉장히 좋습니다.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로는 <데드풀>의 '약빤 번역가'가 시작이 아닐까 싶은데요. 사실 그의 커리어가 시작된 작품은 바로 <웜바디스>였습니다. 줄리(테레사 팔머)가 좀비R(니콜라스 홀트)을 놔두고 가버리는 장면에서 "Bitches, man"이라는 대사를 "매정한 년"으로 번역했고, 이후 많은 영화사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하죠.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겨서 더이상 번역을 못하는 그날이 올 때까지 관객과 영화로 수다 떨며 늙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많은 관객들도 그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을 듯합니다!
<데드풀>에서 수많은 자막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ㅋㅋㅋ
정구웅 <소곤소곤 별>(감독 소노 시온, 작업 예정) <더 우먼 인 더 실버 플레이트>(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작업 예정) <이웃집에 신이 산다> <도쿄 트라이브> <고양이 사무라이> <르 아브르> 등
2005년부터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된 영화 번역을 하는 그는 영화번역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영상 번역과 소설 번역의 차이를 짚는 논문을 준비중이구요. 번역작의 경우, 그간 번역한 작품들이 관객이 많이 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개성있는 작품들이 많았는데요. <도쿄 트라이브>의 경우 인터뷰를 통해 "음악적 리듬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운율과 음절을 거의 똑같이 맞췄고, 일본어 모음과 비슷한 한국어 모음으로 어미를 처리해 들리는 소리와 자막이 비슷하게 떨어지게 했다"고 밝혔죠.
또한 <고양이 사무라이>에서도 '심쿵!'이라는 단어를 써, 그의 재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윤혜진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나의 그리스식 웨딩2> <싱 스트리트> <스틸 앨리스> <이미테이션 게임> <컬러풀 웨딩즈> <블루 재스민> <로마 위드 러브> <하얀 리본>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 등을 천 번 넘게 보면서 대사를 줄줄 외우던 중학생 소녀는 커서 영화 번역가가 됩니다. 2004년 케이블 채널에서 <굿 와이프>를 비롯한 미드 번역으로 업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2010년 영화 <하얀 리본>을 시작으로 영화 번역을 시작했는데요.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바로 <로마 위드 러브> 번역을 통해서였죠. 이후 <블루 재스민> <이미테이션 게임> 등을 번역하며 영상번역학원 더라인 아카데미를 설립, 수입·배급사의 통·번역을 맡아 해외마켓을 오다가 직접 수입·배급사 안다미로를 차렸습니다.
게다가 지난 2014년 그녀는 <짝>에 여자 1호로 출연을 하기도 했죠. 다재다능한 매력을 뽐내는 그녀야말로 번역계의 진정한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닌가 싶네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박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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