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빌 S. 밸린저의 소설 <이와 손톱>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이 개봉했습니다. 원작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버리지 않았고, 원작에서 1950년대 미국으로 묘사되었던 시대 배경을 해방 무렵의 경성으로 바꾼 시도 역시 자연스러웠습니다. 당대의 의상과 미술 포인트를 효과적으로 구현했고,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을 통해 긴장을 놓치지 않은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석조저택 살인사건>

각색에서 선방한 미스터리 소설 원작 영화를 한편 보고 나니 과거의 사례들도 궁금해졌습니다. 잘 알려진 작품들 위주로 살펴봤습니다.


<말타의 매>

미스터리 소설 원작 영화화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어떤 영화가 최초로 미스터리 소설을 각색한 영화인지는 에디터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걸작 <말타의 매>(1941)입니다. 더쉬엘 해미트의 동명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죠. 무려 세 번이나 영화화되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나일 살인 사건>(1978) 1981년에 국내 개봉도 했습니다. 단관 개봉해서 20만 명쯤 보았으니 제법 흥행했네요.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을 영화화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너무 영미권 영화만 꼽았나요? 일본 미스터리 소설 거장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름은 다들 아실 겁니다. 에도가와 란포와 더불어 일본 미스터리 소설계의 양대 산맥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 손가락의 남자>(1947), <이누가미 일족>(1976) 등의 주인공 긴다이치 코스케의 이름도 어쩐지 익숙하시죠?

<이누가미 일족>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사건을 풀어가는 소년탐정 김전일의 일본 이름이 긴다이치 하지메입니다. ‘김전일긴다이치’(金田一)의 한국식 독음입니다. 따라서 김전일의 할아버지가 긴다이치 코스케 되겠네요.
 
옛날 영화까지 생각해내려니 너무 많습니다. <석조저택 살인사건>을 보고 나서 떠올린 아이디어니까 한국영화로 한정해 소개해볼까 합니다. 원작의 팬층이 두텁고,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호평을 들은 작품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독 김동빈 출연 신은경, 정진영, 김창완, 배두나 제작연도 1999

이제 <> 시리즈는 미스터리 영화의 고전이나 다름없네요. 스즈키 고지의 소설 <>을 원작으로 일본 영화, 미국 영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한국 버전은 일본 영화 버전과 거의 흡사하며 일본 영화 버전에서 생략한 원작의 소소한 설정도 추가했습니다. 나카다 히데오가 연출한 일본 버전 <>(1998)의 제작사인 오메가프로젝트에서 제작비의 반을 부담했다고 합니다. 사실상 한일 합작영화였네요. 에디터의 추억을 되짚어보면, 일본 버전보다 한국 버전이 훨씬 실감났다고 기억합니다.


검은 집
감독 신태라 출연 황정민, 유선, 강신일 제작연도 2007

기시 유스케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습니다. 원작은 일본 작품입니다만 당시 한국영화로선 드물게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사용한 사례입니다. 대체로 한국식으로만 바꿨을 뿐 원작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는데 결말은 원작과 조금 다릅니다. 문제의 사이코패스가 파멸하는 방식이 원작과 달라졌습니다. 각색하면서 지나치게 드라마를 들이부은 느낌이 드네요. 영화 엔딩에만 추가된 설정도 있는데, 꼭 그런 방식으로 여운을 남겼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감독 박신우 출연 한석규, 손예진, 고수 제작연도 2009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과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가 이미 국내 관객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원작의 분량을 효율적으로 압축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 흔적이 있지만, 대체로 무난한 각색이었습니다. 원작의 주인공 이름인 유키호는 한국판에서 (손예진이 연기하는) ‘유미호로 바뀌었습니다. 원작의 어둡고 폭력적인 남성 중심적 서사도 한국 영화로 제작되는 동안 최대한 대중적이고 가볍게 변했습니다. 다만 그만큼의 깊이와 정서도 옅어졌다는 것이 흠이네요.


하울링
감독 유하 출연 송강호, 이나영 제작연도 2012

종족을 초월한 아웃사이더들이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짠하게 다가오는 영화입니다. 노나미 아사의 소설 <얼어붙은 송곳니>가 원작이고요. 남성 형사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여성 형사 은영(이나영)과 도시의 늑대개가 주인공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장르가 미스터리물보단 사회드라마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는 느껴지지만, 그 의도가 효과적으로 연출되었는가에 대해선 판단을 망설이게 됩니다. 동정심을 자극 받는 것과 장르적 재미를 느끼는 것은 별개니까요.


화차
감독 변영주 출연 김민희, 이선균, 조성하 제작연도 2012

<아가씨>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있기 이전, 김민희를 연기파 배우로 발돋움하게 한 작품입니다. 사라진 약혼녀 선영(김민희)을 찾아 헤매는 문호(이선균)의 여정을 그립니다. 다만 문호는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원작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오리지널 캐릭터입니다. 원작의 주인공 혼마 형사 대신 약혼자 문호가 배치되고, 원작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던 쇼코 대신 실물 선영이 등장하면서 영화 속 인물들의 정서적 당혹감이 마치 의 생생한 감정인 듯 느껴졌습니다. 정서가 플롯을 압도한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스터리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최근 사례들 중에서도 선방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용의자X
감독 방은진 출연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 제작연도 2012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이 원작입니다. 방은진 감독은 영화 제작 시점부터 원작과 차별화된 각색을 시도하겠다 밝혔습니다. 원작에서 수학자 이시가미와 이성적인 두뇌 대결을 펼친 물리학자 유가와를 대신해 영화에선 뜨거운 심장의 형사 민범(조진웅)이 수학자 석고(류승범)와 싸웁니다. 영화는 원작이 견지했던논리를 뛰어넘는 사랑보다 사랑의 대상을 향한 헌신에 초점을 맞춥니다.


방황하는 칼날
감독 이정호 출연 정재영, 이성민 제작연도 2013

<방황하는 칼날>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딸의 죽음을 접한 가장 상현(정재영)이 딸을 성폭행하고 죽인 자들을 살해한 뒤 도주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원작과 이야기의 큰 줄기는 비슷합니다만 상현을 좀 더 가난하고 불행한 인물로 그려 더 큰 감정적 동요를 유도했습니다. 미성년 범죄자를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도 더 강력한 방식으로 던집니다. 미성년 범죄자에게 쉬이 가질 수 있을 동정을 덜어낸 것은 장점으로 보입니다. 정재영과 이성민의 호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얼마 전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솔로몬의 위증>이 동명의 국내 TV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고 현재는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과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골든 슬럼버>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의 탄탄한 플롯과 서스펜스에 기대는 바가 적지 않을 텐데요. 영상으로도 더 치열하고, 복잡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미스터리 소설 원작 영화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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