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우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째 되는 날이다.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샤레이드> 등 영원한 명작을 남긴 헵번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정리하며 그녀의 찬란했던 삶을 기려본다.


'오드리 헵번'은 본명이 아니다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익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등을 오가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1940년엔 나치를 피하기 위해 에다 판 힘스트라(Edda van Heemstra)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오드리 헵번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건 데뷔한 해인 1948년부터다.


발레와 레지스탕스

다섯 살에 발레를 시작해, 데뷔 전에는 소니아 가스켈, 후에 런던에 와서는 마리 램버트를 사사했다. 나치 점령  당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는데, 발레 슈즈에 비밀서한을 숨겨 전달하거나 히틀러에 반하는 투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발레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 생전에 힐보다 플랫슈즈를 선호했던 것도 이와 닿아 있을 터. 다만 영화 속에서 그녀가 춤추는 모습은 극히  드물었다.

시크릿 피플 (1951)

19살에 데뷔하다

더치 인 세븐 레슨

치과간호조무사 교육을 받던 헵번은 19살이 되던 1948년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교육용 영화 <더치 인 세븐 레슨>에서 스튜어디스 단역을, 뮤지컬 <하이 버튼 슈즈>에서 코러스 걸을 맡았다. 이후 영화, TV드라마, 뮤지컬 등을 부지런히 작업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1951년 뮤지컬 <지지>의 주인공 역으로 브로드웨이 무대 신고식을 치렀고, 대표작 <로마의 휴일>이 1953년 여름 개봉했다. 그렇게 오드리 헵번의 전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지

25세에 오스카를 거머쥐다

Audrey Hepburn Wins Best Actress: 1954 Oscars

1954년, 할리우드 첫 주연작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데보라 커, <모감보>의 에바 가드너 등이었고, 처음 후보에 오르자마자 바로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너무 감격스러웠던 나머지 트로피를 대기실에 두고 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후 <사브리나>(1955), <파계>(1960),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어두워질 때까지>(1968)로 네 차례 더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진 못했다.


스타일리스트이자 친구, 지방시

헵번은 아름다운 외모와 출중한 연기력만큼이나 단아한 듯 화려한 패션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녀를 스타일 아이콘으로 만든 데는 브랜드 '지방시'의 창립자이자 헵번의 개인 스타일리스트였던 위베르 드 지방시의 공이 지대하다. <사브리나> 촬영 당시 처음 만난 헵번과 지방시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그 유명한 블랙드레스를 내놓았고, 이 스타일은 현재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지방시는 헵번을 위한 향수 '랑 떼르디'를 발표, 그녀는 무료로 광고에 출연해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인공을
마릴린 먼로가 맡을 뻔했다

원작자 트루먼 카포티는 주인공 홀리 역에 마릴린 먼로를 원했지만, 헵번이 캐스팅되자 실망했다고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하면 까만 드레스와 풍성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커다란 선글래스의 헵번이 대번에 떠오르는 걸 생각하면 의외의 사실이다.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트루먼 카포티

사슴을 키웠다

헵번이 동물애호가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요크셔테리어 미스터 페이머스’를 촬영장에 데리고 오거나 화보를 함께 촬영한 적도 많아 그 이름처럼 아주 유명했다. 또 다른 반려동물로 사슴 '피핀'이 있다. 훗날 남편이 되는 멜 페러가 연출한 <녹색의 장원>(1958) 촬영 때 만나, 트레이너의 제안을 받고 오랫동안 같이 살게 됐다. 페이머스, 피핀과 함께 한 화보들에서 헵번은 더더 아름답다.


헤비스모커였다

헵번은 하루에 3갑 이상 피울 정도로 담배를 즐겼다.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샤레이드>(1963), <뜨거운 포옹>(1964), <백만달러의 사랑>(1966), <언제나 둘이서>(1967), <혈선>(1979)에서 담배를 피우는 헵번을 만날 수 있다. '골드 플레이크'와 '켄트'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내성적이었다

많은 스타들과 달리, 오드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거나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원치 않았다. 스스로 내성적인 사람(introvert)이라고 불렀을 정도.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집에 혼자 있을 때 아주 행복했고, 그게 재충전할 수 있는 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EGOT 클럽이다

로마의 휴일


EGOT 클럽이란 '에미', '그래미', '오스카', '토니' 상을 모두 받은 이들을 뜻한다. 오드리 헵번, 멜 브룩스, 우피 골드버그 등 총 12명이 여기에 속한다. 헵번은 1954년 <로마의 휴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같은 해 뮤지컬 <온딘>으로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래미와 에미를 수상한 건 사후의 일. 에미는 헵번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방영된 다큐멘터리 <세상의 정원>(그녀는 정원 애호가였다)의 진행자로서 정보 프로그램 부문 개인공로상을, 그래미는 1992년 발표한 동화 낭송 앨범 <오드리 헵번의 마법 이야기>로 아동용 스포큰워드 앨범상을 받았다.

온딘
세상의 정원
오드리 헵번의 마법 이야기

온 세상의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굶어죽을 위기에 놓일 정도로 비참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헵번은, 당시 받았던 유니세프의 지원을 기억하고 스스로도 이를 실천했다. 1989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취임해, 199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베트남 등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그 나라의 어린이들이 처한 현실을 만방에 알렸다. "기억하렴. 만약 너에게 누군가를 도울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쓰면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네 손이 두 개라는 걸 알게 될 거야. 한 손은 네 자신을 스스로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라는 사실을."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 그녀가 아들에게 읽어준 시 구절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