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을 다시 봤다. 왜냐면 재개봉(3월30일)을 또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비정전>은 2008년 4월 1일, 2009년 4월 1일에 재개봉한 적이 있다. 4월 1일이 무슨 날인지는 <아비정전>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거라고 믿는다. 2003년 4월1일, 장국영이 생을 마감했다.
왕가위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아비정전>은 1990년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국내 개봉했다.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의 인기에 힘입어 사람들은 극장으로 몰렸다. 영화를 본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환불을 요구했다고 한다. <아비정전>은 <열혈남아>와 같은 홍콩 누아르 액션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도 있다. 1, 2부로 나눠서 출시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간 사람들이 딴 걸로 바꿔달라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네 글자 제목의 홍콩 영화가 개봉하면 무조건 극장을 찾던 시기였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에게 홍콩금장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겨줬다. 왕가위 감독 영화의 세계관은 <아비정전>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아비정전>을 다시 보기 전에 먼저 명장면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비정전>을 보지 않은 사람도 아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너무나 유명해서 <아비정전>을 본 것 같은 착각을 만들 수도 있다. ‘난닝구’ 차림의 아비(장국영)가 하비에르 쿠가의 ‘마리아 엘레나’라는 음악에 맞춰 맘보춤을 추는 장면이다. 1990년대 내내 이 장면은 국내 방송에서 반복·재생산됐다.
맘보춤 장면만큼 유명한 장면은 또 있다. ‘영원히 잊지 못할 1분’이다. <아비정전>의 초반부 아비는 수리진(장만옥)을 꼬신다. 꼬신다는 표현이 제일 적확할 것 같다. 대략적인 대사를 아래에 소개한다.
아비/ 내 시계 좀 봐요.
수리진/ 내가 왜요?
아비/ 1분만 기다려 봐요.
(똑딱똑딱똑딱)
수리진/ 시간 다 됐어요. 뭐죠.
아비/ 1960년 4월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하겠군요. 이제부터 우린 친구예요. 이건 당신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죠.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내일 또 오죠.
이 장면 이전에도 아비는 수리진에게 수작을 걸었다. 아비는 수리진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밤 꿈에서 날 보게 될 거예요.” 다음날 수리진은 아비에게 “어젯밤 꿈에서 당신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아비는 대답한다. “물론이지. 한숨도 못 잤을 테니.”
위의 명장면들은 장국영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아비정전>은 철저하게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기댄 영화다. 새삼 느끼지만 아비와 장국영의 묘하게 닮아 보인다.
지금부터 다시 본 <아비정전>에서 눈에 들어온 몇 가지를 얘기해보려고 한다. 영화의 초반부, 클로즈업이 많아 보였다. 아비와 수리진의 ‘잊지 못할 1분’ 장면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있다. 1분의 시간이 흐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벽시계를 보여줄 때를 제외하면 계속 그렇다.
아비와 수리진의 클로즈업은 침대신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비의 말처럼 1분을 함께한 두 사람은 친구가 됐고, 매일 1시간씩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서로 엇갈린 자세로 누워 있다. 아비의 얼굴이 관객에 더 가까이 있다. 역시 장국영의 매력에 기댄 영화가 확실하다. 두 사람은 서로 키스를 하고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에서 수리진은 아비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지만 아비는 거부한다. 수리진은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등지고 웃을 챙겨 입고 떠난다.
아비는 수리진 대신 댄서로 일하는 루루 혹은 미미(유가령, 이하 미미)를 만난다. 여기서도 아비의 엄청난 기술을 볼 수 있다. 그는 집에 가겠다는 미미를 붙들고 키스를 하려고 한다. 미미는 입을 앙 다물고 거부한다. 아비는 미미의 코를 막고 “숨 안 쉬고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라고 말한다. 미미가 숨을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는 순간, 두 사람은 키스하고 화면은 전환된다.
아비-수리진에 이어 아비-미미의 침대신이 이어진다. 같은 장소의 아비-수리진의 경우보다 카메라는 멀찍이 두 사람을 비춘다. 두 사람은 한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대화한다. 한 명이 화면에서 사라지더라도 한 사람은 남아 있고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사람은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또 위의 수리진의 경우처럼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잡는 경우가 많다.
보통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말하는 사람을 보여주는 액션 숏과 듣는 사람을 따로 보여주는 리액션 숏으로 나눠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아비정전>에서는 두 사람이 한 화면 속에서 액션, 리액션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롱테이크가 아닌 이런 촬영 기법은 두 사람의 정서적 거리를 매우 가깝게 보이도록 만든다. <아비정전>에서 남자/여자 연인의 관계에서 이런 촬영기법은 계속 반복된다. 단, 아비와 양어머니(반적화)의 경우처럼 정서적으로 먼 경우에는 액션/리액션 숏으로 구성된다.
장국영-유가령의 침대신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뤄지는 와중에 시계 초침 소리가 계속 들린다. 미미는 아비에게 “지금 몇 시냐”고 묻기도 한다. 침대신이 끝나면 초침 소리는 사라지고 벽시계를 닦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영화의 초반 아비와 수리진이 함께한 ‘영원히 잊지 못할 1분’은 화면에 계속 등장하는 시계로 여운을 남긴다.
아비를 잊지 못하는 수리진은 야간 순찰 중인 경찰(유덕화)을 우연히 만나고 그에게 의지하게 된다. 한 화면 속에 있는 경찰은 수리진에게 아비를 잊으라는 말한다. 그의 말을 듣던 수리진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다. 갑자기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이때 화면이 전환되면서 12시를 가르키는 커다란 벽시계와 닫히는 철문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수리진은 아비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비가 필리핀으로 떠나고 남겨진 미미는 수리진을 찾아온다. 그때 수리진은, 아비는 자신과 더 이상 관계 없다는 식으로 잘라 말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아비는 우연히 필리핀에서 다시 만난 (선원으로 직업을 바꾼) 경찰에게 “지금 몇 시지? 시계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아비는 영화 내내 줄곧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아비가 필리핀에 간 이유는 생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비가 수리진도 미미도,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입양아이고 버려졌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스스로를 ‘발 없는 새’라고 부르는 그는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 “발 없는 새는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 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라고 아비는 말한다. 그런 그를 필리핀의 생모는 만나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아비의 뒷모습을 담는다. 아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단 한번만이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싫으시다면 나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화면은 점점 어두워지고 <아비정전>의 메인 테마 음악(Los Indios Tabajaras의 ‘Always in my heart’)이 흐른다. 생모에게 거절당한 아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걷는다. <아비정전> 속에서 반복 등장하는 뒷모습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아비정전>을 다시 보면서 사소하게 눈에 띄는 점들을 정리해봤다. 클로즈업, 액션/리액션 숏이 없는 대화, 시계, 뒷모습 등이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비정전>을 다시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싶은 사람도 있겠다. 사실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 장숙평 미술 감독이 만들어내는 그 분위기만 느껴도 성공적인 영화 관람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이후 <화양연화>에서 영화 제목처럼 그들이 창조한 최고의 시기를 함께 보냈다. <화양연화>는 <아비정전>처럼 1960년대가 배경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신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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