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이 미국교포 2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작년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의 수상에 이은 또 한번의 낭보! 70년대 한국 대중을 충격에 빠트린 영화 데뷔작 <화녀>부터 최신작 <미나리>까지, 지난 55년간 윤여정이 거쳐온 영화 속 캐릭터들을 망라했다.

<화녀>

TV 드라마에서 발랄한 이미지를 선보이던 윤여정은 데뷔 5년 차인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다. 김기영이 제 영화 <하녀>(1960)를 리메이크 한 작품. 시골에서 상경한 양계장집 가정부로 취직한 명자는 주인집 남자(남궁원)에게 강간 당하고 아이를 가져 아내 대우를 요구한다. 살짝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순진하지만, 자기를 해하는 이에게 복수를 가하고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주장하는 분방한 태도로 똘똘 뭉친 캐릭터다. 윤여정은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충녀>

<화녀> 촬영 중에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고 영화 캐스팅을 여러 차례 고사했지만, 이듬해 또 다른 '하녀' 시리즈인 <충녀>(1972)에 출연했다. 김기영은 소설가 김승옥과 함께 오로지 윤여정을 주인공으로 상정하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남궁원과 전계현도 그대로 그 역할을 맡은 가운데, 다시 한번 무능하고 뻔뻔한 남자로 인한 웃지 못할 파국이 펼쳐진다. 색색의 사탕을 늘어놓고 몸을 뒹구는 전대미문의 베드신이 특히 인상적이다. <화녀>와 <충녀> 모두 그해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코메리칸의 낮과 밤>

윤여정은 한창 인기가 대단하던 1972년 말 미국으로 떠나 결혼했고,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1985년 귀국하기까지 가정을 꾸리는 데에만 열중했다. <코메리칸의 낮과 밤>(1977)은 그 13년간 배우로서 유일하게 작업한 영화였다. 유학생 부부를 둘러싼 비극을 그린 베스트셀러 소설을, 미국에서 활동하던 감독 홍의봉이 영화로 옮겼다. 윤여정은 청소부로 일하며 자식 셋을 키우다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아내 역을 맡았다.

<어미>

미국으로 떠나기 전 윤여정은 김수현 작가의 첫 드라마 <무지개>에 출연한 뒤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았다. 귀국 후 처음 작업한 영화 <어미>(1985) 역시 김수현이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주인공 경애는 오랫동안 실종됐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아이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찾아가 죽인다. 모든 걸 끝내고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마지막 무표정이 서늘하기 그지없다.

<바람난 가족>

<어미> 이후 윤여정의 커리어는 (김기영의 유작 <죽어도 좋은 경험>을 제외하고) 줄곧 드라마에 치중돼 있었다. 그를 다시 영화계로 불러들인 건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 등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던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이었다. 윤여정이 연기한 병한은 한평생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술독에 빠져 살던 남편(김인문)이 죽음을 앞둔 와중, 옛 동창의 품에 안겨 중년의 로맨스를 즐긴다. "평생 나를 푸대접"한 지난 삶을 버리고 "몸 원하는 대로, 몸 위해주면서" 사는 여자.

<꽃피는 봄이 오면>

2000년대 초반까지, 윤여정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모두 어머니였지만 '우리 엄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올드보이> 이후 한껏 힘을 덜어낸 최민식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2004)은 평범한 어머니를 연기하는 윤여정을 만날 수 있다. 나이찬 아들한테 깨알같이 잔소리를 하고, 타지에 간 아들이 급하게 들렀다 가면 반찬이라도 입에 넣어줘야 안심하고, 오랜만에 나란히 누워 "나도 꿈이 많았어" 하고 이야기 하는 그런 엄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에선 모니카 수녀 역을 맡았다. 유정(이나영)의 고모이기도 한 그는 동생이 좋아하던 애국가를 부른 이를 만나고 싶다고 한 사형수 윤수(강동원) 앞에 조카를 데려간다. 상처를 안고 사는 유정의 마음을 어머니보다 더 헤아려주는 고모 모니카 수녀는 한 달간 윤수를 찾아와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유정을 부단히 설득해 둘을 만나게 한다.

<가루지기>

1971년 TV 드라마 최초의 장희빈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던 윤여정은 오랜만에 사극에 출연했다. 송혜교와 함께한 <황진이>(2007)에 이어 작업한 <가루지기>(2008)는 고우영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아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밤일 제대로 하는 남자 하나 없는 마을은 기센 여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할멈(윤여정)은 그 리더격의 캐릭터다. 마을 최고 약골로 불리는 강쇠(봉태규)의 첫 여자인 할멈은 그의 형편없는 정력을 동네방네 소문내 굴욕을 안겨준다.

<여배우들>

<여배우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패션지 화보 촬영을 위해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섯 배우들이 모여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그린다. 윤여정을 비롯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이 모두 자기 자신을 연기해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사실감을 더했다. 배우들은 직접 시나리오에도 참여해서 대사 하나하나 그들의 실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킬힐을 앞에 두고 "이걸 신으라고? 지팽이 줘 지팽이" 하는 윤여정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지 않나.

<하하하>

홍상수는 임상수만큼이나 윤여정에 대한 편애를 드러내온 감독이다. 그 시작은 <하하하>(2010)였다. 통영에서 복집을 운영하는, 영화감독 문경(김상경)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문경이 옷차림을 지적하자 옷걸이를 회초리처럼 들어 때리고, 캐나다로 떠나는 아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꺼이꺼이 눈물을 흘린다. 한여름에 통영을 왕복해야 하는 건 물론 한 신을 2,30번씩 찍는 홍상수의 촬영 방식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까지 홍상수와 다섯 작품을 작업했다.

<하녀>

윤여정과 '하녀' 시리즈의 연은 2010년까지 이어졌다. 임상수가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 해, 새로 들어온 하녀 은이(전도연)를 묘한 태도로 돕는 나이든 하녀 병식 역에 윤여정을 캐스팅 한 것. 병식이 은이와 주인집 남자 훈(이정재)의 불륜을 눈치채게 되면서 <하녀>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오랜 경력에 비해 상복은 적었던 윤여정은 <하녀>로 2010∼11년 시즌 한국의 거의 모든 영화상에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모두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푸른소금>

<푸른소금>에선 무려 킬러 조직의 보스를 연기했다. 원래 시나리오에선 남자였는데 이현승 감독이 <하녀>의 윤여정을 보고 여자 캐릭터로 바꾼 것이다. 온몸을 감싼 까만 수트, 호일펌, 커다란 선글래스를 한 정여사는 세빈(신세경)에게 두헌(송강호)을 죽이라는 임무를 내린다.

<다른나라에서>

빚에 쫓겨 엄마와 모항에 온 원주(정유미)는 프랑스 여자 안느(이자벨 위페르)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쓴다. <다른나라에서>(2011)의 윤여정은 원주의 엄마와 더불어, 시나리오 속 안느가 묵는 펜션 주인을 연기했다. 주로 안느와 같이 붙어 있는 순간이 많아, 한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중년 여성배우가 영어로 대화하는 걸 볼 수 있다. 윤여정은 <다른나라에서>에 이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도 두 손을 모은 채 부처님에게 기도를 올린다.

<돈의 맛>

영화 속 윤여정의 캐릭터는 셌을지언정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임상수와의 네 번째 협업작 <돈의 맛>(2012)의 백금옥은 조금 다르다. 한국 굴지의 대기업 실세인 그는 아버지에게 어린 여자들을 갖다바쳐 자리를 꿰찼고, 데릴사위인 남편(백윤식)이 외국인 하녀와 놀아나는 걸 몰래 보고듣는 것도 모자라 살인을 사주한다. 재벌가의 더러운 이면을 파헤쳐보겠다는 임상수의 나이브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윤여정의 에너지만큼은 빛을 발했다.

<고령화가족>

윤여정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편집 때문에 다시는 송해성 감독과 작업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했지만, 결국 7년 뒤 <고령화가족>(2013)으로 다시 한번 송해성의 배우가 됐다.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제 집에 얹혀 사는 자식들을 보듬는 엄마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 <넝쿨째 들어온 당신>으로 '국민엄마'라는 수식어가 붙던 때라 원작소설보다 훨씬 귀여운 엄마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장수상회>

<장수상회>는 대규모 영화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던 강제규 감독이 확 힘을 덜고 만든 로맨스다. 1971년 <장희빈>부터 오랜 세월 여러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춰온 박근형과 윤여정이 노년의 알콩달콩한 '썸'을 선보였다. 언제나 버럭 하는 까칠한 노신사 성칠을 한눈에 반하게 하는 곱디고운 금님은 분명 처음 보는 윤여정의 면모였다.

<계춘할망>

중년 여성의 욕망을 담아내는 일련의 캐릭터로 새로운 황금기를 지난 윤여정은 <계춘할망>에서 하나뿐인 피붙이를 그리워하는 노인을 연기했다. 유채꽃이 노랗게 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계춘할망>은 '야심'을 덜고 '정'에 초점을 맞춰 차곡차곡 할머니와 손녀의 사랑을 쌓아간다. 윤여정의 연기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낯선 경험을 할 수 있다.

<죽여주는 여자>

<여배우들> 이후 오랜만에 이재용 감독과 협업한 <죽여주는 여자>(2016)는 전적으로 윤여정을 위한 작품이다. 종로 일대에서 매춘을 하는 노년 여성 소영을 따라가지만, 섹슈얼한 긴장보다는 사회 주변부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사람들의 지친 얼굴이 짙게 남는다. '죽여준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은유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절절한 시선이 윤여정의 명연으로써 완성됐다. 너무 막막한 나머지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그것만이 내 세상>

이병헌과 박정민의 안목을 믿고 <그것만이 내 세상>의 출연을 결정한 윤여정은 연기 변신을 꾀한 두 배우를 서포트 한다. 한물간 복서 조하(이병헌)가 17년 만에 만난 엄마의 집에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 진태(박정민)와 우애를 다지는 과정에 힘을 보탠다. <계춘할망>에 이어 사투리 연기를 선보였는데, 윤여정은 기자간담회에서 본인의 사투리 연기는 모두 틀렸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제목 그대로 거액이 든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들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윤여정이 연기한 순자는 치매를 앓아 며느리(진경)가 자기를 죽일 거라고 들볶을 뿐, '지푸라기'를 잡는 데엔 아무 관심이 없다. 단 한순간도 돈가방에 손을 대지 않는 순자가 영화 끄트머리, 턱 하니 내뱉는 말은 막막한 삶에 지친 우리를 토닥여주는 것 같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콤비처럼 작업하던 감독이 어이없게 죽자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한순간에 영화와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다. 일도 돈도 없는 상황, 그럼에도 찬실의 곁엔 늘 친구들이 있는데, 자취방 주인 할머니(윤여정)도 그 중 하나다. <하하하>부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까지, 홍상수 영화의 프로듀서로 활약한 뒤 연출을 시작한 김초희 감독은 단편 <산나물 처녀>(2016)에 이어 윤여정을 캐스팅 해 주인공 찬실에게 '복'을 얹어준다.

<미나리>

윤여정은 이미 <센스 8>을 통해 자연스러운 영어 연기를 보여줬지만, 미국에서 촬영한 <미나리>에선 철저히 한국어만 구사한다. 평생을 한국에서 산 순자는 미국에 사는 딸(한예리)의 가정을 돕고자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가장 제이콥(스티븐 연)이 고집하는 농사 때문에 저 외딴 아칸소, 그것도 바퀴 달린 트레일러에서 살아야 하는 가족에 감도는 불안이 너무나도 평범한 한국 할머니 순자가 전하는 에너지 덕에 겨우 누그러진다. 윤여정은 72세가 되던 해 한여름에 촬영한 <미나리>로 2021년 영미권의 온갖 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을 휩쓸고, 결국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