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으로 야심차게 시작한 18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순항하며 반절에 접어들고 있다. 축제가 제일 북적이는 주말을 지나면서, 올해 상영작들 대부분이 전주의 관객들을 만났다. 더불어 화제작도 슬슬 굳어지는 분위기다. 에디터는  곳곳에 개설된 티켓 부스들에 문의하고, 영화제 홈페이지 내 티켓 교환 게시판을 살펴보며, 이번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가장 열렬한  관심을 이끌어낸 작품 다섯을 추렸다.


매니페스토
Manifesto
   
감독 줄리안 로즈벨트
출연 케이트 블란쳇

부스를 돌며 "관객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영화가 뭔가요?" 묻자 대부분 "매니페스토"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돌아왔다. 그럴 수밖에. <매니페스토>는 케이트 블란쳇이 1인 13역을 맡아 일찌감치 화제가 된 영화다. 독보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블루 재스민>, <캐롤> 등을 통해 보여준 완벽한 연기를 떠올린다면 다역을 맡은 그의 연기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니페스토>에서 블란쳇은 열세 명을 연기하지만, 열셋의 인생을 보여주진 않는다. 애초 미술관에서 '~주의(~ism)'을 설명하기 위해 기획된 이 작품 속에서 블란쳇의 무기는 코스프레에 더 가깝다. '선언문'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을 단 영화는 교사, 공장 노동자, 안무가, 뉴스앵커, 과학자, 인형술사, 미망인, 노숙자 등으로 분한 블란쳇의 육체를 빌려 '20세기 예술'이라는 주제를 조곤조곤 설명한다. 빼어난 배우의 스펙트럼만큼이나 예술 사조를 설명하려는 딱딱한 의지 역시 두드러진다. 


초행
   
감독 김대환
출연 김새벽, 조현철

작년 개봉한 장편 데뷔작 <철원기행>으로 자기만의 화법을 확실히 알렸던 김대환 감독의 새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걷기왕>의 김새벽과 여러 독립영화를 지나 <터널>, <마스터> 등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조현철이 호흡을 맞췄다. 6년째 동거 중인 지영, 수현 커플이 임신을 맞닥뜨리고, 그동안 미뤄온 각자 부모님과의 만나기 위해 삼척과 인천을 오가는 과정을 그렸다.

언뜻 두 사람의 현실적인 로맨스 비춰질 수 있지만, 영화를 맴도는 가장 묵직한 테마는 역시 '가족'이다. 김대환 감독은 전작 <철원기행>에서도 각자 떨어져 있던 가족이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김새벽, 조현철 두 배우 모두 독립영화계에서 꽤나 건강한 행보를 보여줬지만, 함께 작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를 맴도는 사실적인 공기는 대부분 두 배우의 애드립으로 이뤄진 촬영 방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안티포르노
Antiporno
   
감독 소노 시온
출연 토미테 아미, 츠츠이 마리코

일본영화의 영원한 무법자, 소노 시온이 '로망 포르노'를 끌어안았다. '로망 포르노'는 80년대 일본영화의 중요한 사조 중 하나로, 포르노에 준하는 에로스와 상업영화 논리에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력이 어우러진 장르다. 최근 몇 년간 이 장르를 계승하려는 의지가 두드러졌고, 소노 시온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소노 시온의 영화적인 기운은 갈래의 영향력에 가려지지 않는다.

<안티포르노>의 주인공 쿄코(토미테 아미)는 소설 속 인물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의 모델을 다시 이야기로 쓰는 작업으로 유명해진 아티스트. 그녀가 성적인 판타지에 완전히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과정을 소노 시온은 예의 무분별한 화법을 통해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 어수선한 이야기에 맞춰 소노는 이를 카오스 그 자체로 표현한다. 지극히 한정된 공간이 무색하게도, 볼거리가 끊임없이 등장해 '육감'을 만족시킨다. 오는 6월 15일 개봉 예정.


시인의 사랑
   
감독 김양희
출연 양익준, 전가람, 전혜진

양익준이 시인으로 돌아왔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시인 현택기는 오로지 시만 생각하며 빈둥대는 남자다. 돈 벌어오는 아내 눈치를 보랴 시에 대해 고민하랴 나름 바쁜 그는 도넛 가게에서 만난 소년 세윤을 만나 사랑을 느낀다. 와병 중인 아버지와 돈돈돈 하는 어머니에게 질려버린 소년 역시 타인의 관심을 받으면서 점차 마음을 연다.

제목부터 줄거리까지, 제주도의 햇살이 느껴지는 영화다. 택기와 세윤에게는 현실이라는 팍팍한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그들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시와 사람에게서 느끼는 희망이다. <시인의 사랑>은 그 설렘에 초점을 맞춘다. 신예 김양희 감독은 내내 밝고 유쾌한 톤을 유지하는 가운데 어느새 마음에 굳건한 감정을 새겨놓는다. 양익준 특유의 느슨하고 능글맞은 연기도 훌륭하지만, <4등>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정가람의 생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시인의 사랑>은 작년 JPM(전주프로젝트마켓)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초행>과 함께) 올해 전주시네마프로젝트를 통해 공개된 작품이다.


나인 송즈
9 Songs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
출연 키에란 오브라이언, 마고 스틸리

올해 특별전을 통해 소개되는 영국의 시네아스트 마이클 윈터바텀.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 가운데 <나인 송즈>는 단연 인기를 독차지한 작품이다. <나인 송즈>의 형식은 단출하다. 미국에서 온 교환학생 리사와 영국인 매트가 첫눈에 빠져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사이사이에 밴드들의 라이브 공연 클립이 자리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 리사와 매트의 섹스는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수위로 묘사된다. 관객들의 열띤 티켓팅 역시 그 악명높은 이미지를 스크린으로 확인하겠다는 의지였을 터.

기존의 필모그래피에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동적인 에너지로 인물들에게 따라붙는 솜씨를 선보인 윈터바텀은 <나인 송즈>에서 역시 두 연인이 정사를 나누는 과정을 끈질기게 쫓아간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밀어닥치는 말초적인 이미지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격렬한 몸짓과 공간의 공기를 확연하게 전달하는 에너지에 놀라게 된다. 프란츠 퍼디난드, 블랙 라벨 모터사이클 클럽, 프라이멀 스크림, 엘보, 수퍼 퍼리 애니멀스 등 2000년대 초중반을 휘어잡던 밴드들의 강렬한 라이브를 감상하는 묘미도 빼놓을 수 없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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