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발표돼 힙합영화의 고전으로 남은, 에미넴 주연의 영화 <8마일>이 14년 만에 재개봉했다. 차트 상위를 차지하는 래퍼들의 활약과 다양한 포맷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도 점점 힙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 시점에 이 고전을 스크린으로 감상한다는 건 꽤나 진귀한 경험이다. 14년 만에 봐도 'Lose Yourself' 인트로의 기타 소리와 클라이맥스의 랩배틀 시퀀스는 가슴을 뛰게 한다. 그 두근거림을 계속 이어가게 할, 또 다른 힙합영화 7편을 선정해 소개한다.


비기 & 투팍
(Biggie & Tupac, 2002)

투팍과 노토리어스 B.I.G.(이하 비기), 두 사람은 근 40년간의 힙합 역사 가운데 가장 거대한 랩스타로 회자되고 있다. 따라올 자가 없는 음악적 역량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나이와 시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두 사람을 둘러싼 라이벌 구도가 특히 그들을 만신전에 올려놓았다. 투팍과 비기의 영향력이 점점 커질수록 지역(서부/동부), 레이블(데쓰 로우/배드 보이)과 그 대표(슈그 나이트/퍼프 대디) 간의 갈등은 깊어졌고, 결국 그 과정에서 둘 모두 6개월 간격으로 살해된 걸로 알려졌다.

커트 코베인과 코트니 러브의 관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는 닉 브룸필드는 <비기 & 투팍>을 통해 아직 규명되지 않은 둘의 죽음을 파헤쳐 그것이 슈그 나이트의 계획이었다고 밝힌다. 두 거장의 화려한 시절과 '그것이 알고 싶다' 식의 사건 추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투팍의 일대기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투팍: 레저렉션>과 곧 북미에 개봉하는 극영화 <올 아이즈 온 미>, 비기의 삶을 그린 픽션 <노토리어스>도 함께 보면 좋겠다.


블록 파티
(Dave Chappelle's Block Party, 2006)

<이터널 선샤인>, <무드 인디고>의 감독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다큐멘터리다. 스탠딩코미디로 정평난 코미디언 데이브 샤펠이 2004년 여름부터 9월까지 뉴욕 브루클린 등지를 누비며 파티를 연 과정을 담았다. 루츠, 커먼, 모스 데프, 에리카 바두, 질 스캇 등 당시 메인스트림 신에서 살짝 비껴선 채 독보적인 퀄리티의 음악을 만들던 힙합/R&B 뮤지션들의 라이브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당시엔 신인이던 카니예 웨스트와 존 레전드도 출연한다. 무대 사이사이엔 샤펠의 코미디 모놀로그가 곁들여져 있으니, 그야말로 1석2조라 할 만하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Straight Outta Compton, 2015)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은 80년대의 전설적인 갱스터랩 그룹 N.W.A.를 그린 영화다. 워낙 족적이 크고 활동 과정이 드라마틱해서 꾸준히 영화화 소식은 들렸지만, N.W.A.의 멤버이자 훗날 솔로 뮤지션으로서 대성 하는 닥터 드레와 아이스 큐브(감독인 F. 게리 그레이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해온 만큼, 그의 아들이 그를 연기한다)가 직접 제작을 맡아 2015년에야 발표될 수 있었다. 영화는 주축이 되는 세 멤버 닥터 드레, 이지 E, 아이스 큐브를 중심으로 펼쳐져 그들이 팀을 이루고, 힙합 클래식 반열에 오른 데뷔앨범 <Straight Outta Compton>을 발표하고, 서서히 와해되는 과정까지 담았다. 힙합 비즈니스를 사실적으로 그린 음악영화에 범죄 영화를 방불케 하는 갈등극까지 어우러져, 북미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브라운 슈가
(Brown Sugar, 2002)

<브라운 슈가>의 주인공 시드니는 힙합 칼럼을 쓰는 기자다.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드니가 힙합 뮤지션들에게 처음으로 건넨 질문 "당신은 언제 힙합에 빠졌나요?"에 대한 대답을 쿨 G 랩, 블랙 쏟, 피트 락, 델 라 소울, 커먼, 메쏘드 맨 등 실제 뮤지션들의 모습과 말을 통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보여준다. 힙합에 대한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단도직입적인 도입부다. <브라운 슈가>는 우정이 점차 사랑으로 변해가는 꽤나 통속적인 연애 이야기를 그리는 가운데, 끊임 없이 힙합을 향한 애정을 드러낸다. 자꾸만 상업적으로 퇴색해가는 힙합 신을 가볍게 꼬집으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힙합 뮤지션들을 잊지 말자고 말한다. 지나치게 순진한 태도가 살짝 민망하긴 하지만, 꺼내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영화다.


허슬 앤 플로우
(Hustle & Flow, 2005)

시궁창 같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온 사람이 음악을 향한 꿈을 키워나가면서 희망을 바라본다는 서사는 음악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다. <허슬 앤 플로우> 역시 그 공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포주이자 마약 딜러인 디제이는 낡은 키보드를 하나 갖게 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음악 열정을 불태운다. 우연히 작은 키보드가 생긴 그는 옛 친구 케이를 만나고, 그가 관여한 교회에서 가수가 성가를 녹음하는 걸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음악과 함께, 새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영화는 디제이와 같이 사는 여자들의 삶과 자신의 꿈을 동시에 꾸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희망이 퍼져가는 풍경을 '흥겹게' 바라본다. <허슬 앤 플로우>를 두고 "<8마일>보다 감동적"이라고 하는 평이 많은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나스: 타임 이즈 일매틱
(Nas: Time Is Illmatic, 2014)

나스가 1994년 내놓은 데뷔작 <Illmatic>은 걸작 힙합 앨범을 이야기 할 때 언제나 가장 선두로 언급되는 앨범이다. 거리의 삶이 탄탄한 라임 아래 새겨진 노랫말, 잔기교에 의지하지 않은 채 유려하게 흘러가는 랩,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들이 만든 비트. <나스: 타임 이즈 일매틱>은 이 삼박자가 완벽하게 조합된 <Illmatic>을 둘러싼 이야기를 무한한 존경으로 담아냈다. 나스의 가족 이야기부터 시작해, 프로듀서들이 그와 교류하며 비트에 살을 더하는 과정, 사소한 뉘앙스의 변화로 힙합사에 남을 구절을 남긴 사연 등 음반으로만 들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금쪽같은 정보들이 넘쳐난다.


벨리
(Belly, 1998)

<벨리>는 호불호가 뚜렷한 영화다. '졸작'으로 분류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구태여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벨리>의 허세 가득한 터치가 온갖 래퍼들이 내뱉어대는 '스웩'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감독 하이프 윌리엄스는 90년대 힙합/R&B신을 그야말로 씹어먹을 기세로 (한해에만 30편을 작업한 적도 있다) 세를 넓혀갔고, 1998년 유일한 장편영화 <벨리>를 내놓는다. 90년대 말 뉴욕 힙합 신의 선두를 차지했던 나스와 DMX를 주연으로 기용한 영화에는 감각적인 비주얼이 무기인 뮤직비디오 감독 특유의 야심이 도처에 깔려 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런 색감으로 주인공 패거리가 클럽에서 돈을 훔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그게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멋진 이미지를 만들면서 랩스타의 위용까지 드러내느라 바쁜 영화는 서사의 연계 같은 건 미처 챙기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엉성함이야말로 뉴 밀레니엄을 앞둔 힙합이 추구했던 가치, '간지'를 반증하는 초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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