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2021)

익숙한 나머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전태일 열사가 그렇다. 대중은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린 그를 잘 모른다. 왜 그가 거리에서 분신을 했는지 전후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국내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드물게 화제가 되고 있는 <태일이>는 살아생전 전태일의 모습을 그리며 그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동운동의 선봉에 섰지만, 때론 노동자들에게마저 냉소를 받았던 전태일. 오늘은 영화를 보기 전, 그에 대해 알아야 할 사실들 10가지를 정리했다. 

태일이

감독 홍준표

출연 장동윤, 염혜란, 진선규, 박철민, 권해효

개봉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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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 역시 재봉사였다

전태일이 어릴 적 찍은 가족사진. 어머니 이소선씨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동생 태삼씨, 전태일, 아버지 전상수씨, 큰아버지.

1948년 8월 26일, 전태일은 대구의 봉제 노동자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한때 작은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거듭 실패하여 결국 6·25 전쟁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에 올라오게 된다. 장남인 전태일의 밑으로는 남동생 태삼과 여동생 순옥, 순덕이가 있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기 피해로 인해 전태일은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나서야만 했다. 


2. 가족 모두 노숙을 했으며 어머니는 동냥했다

1965년 서울 (왼쪽부터) 뉴스보이, 구두닦이 소년

전태일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시절을 유년기로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일거리가 있을 거란 희망을 안고 서울로 몰려들었고 전태일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을 했고, 어머니 이소선은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다. 전태일 가족만 유독 지독하게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다들 동냥을 하고,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고, 고물을 줍고, 심지어는 담배꽁초를 주워 파는 사람도 있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던 시기였다. 전태일 역시 어린 동생 태삼과 함께 솔 등을 거리에서 팔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동냥을 하려던 때도 있었지만, 어머니 이소선은 결코 그가 동냥을 하게 두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가 봉제 일을 다시 하여 월세방을 마련했지만, 1960년, 결국 그들은 다시 대구로 내려가게 된다. 


3. 아버지의 학대와 강요로 자퇴하게 된다

1969년 초,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전태일이지만, 그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은 있었다. 1963년 3월 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라 불리는 청소년 교육기관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는 배움의 꿈을 키운다. 여전히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자부심이자 기쁨이었다. 학교에서 김예옥이라는 여학생을 짝사랑하기도 하며 학생다운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점차 일거리가 많아지자,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했고 결국 전태일은 1학년도 다 다니지 못한 채 자퇴하고 만다. 이대로 포기하면 더 이상 배울 길이 없을 것만 같아 동생 태삼과 함께 가출을 감행하지만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결국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상수는 그런 아들을 구타·학대했고 이로써 전태일은 영영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못하게 된다. 


4. 하루 14시간 근무, 일당 50원이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새벽에는 구두닦이, 낮에는 시다, 밤에는 껌팔이를 하던 시절의 전태일.

전태일은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을 토대로 서울 평화시장의 어느 의류제조회사 견습공, 당시 말로 ‘시다’ 일을 하게 된다. 일일 14시간을 쉼 없이 일했지만 일당은 고작 50원이었다. 커피 한 잔 가격이 5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하루 하숙비가 120원이었기에 그는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 보충했다. 자신이 받는 돈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그때당시만 해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그저 허리가 휘어라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5. 여공들의 열악한 현실에 바보회를 조직한다

1960년대 후반, 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한 전태일(왼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

전태일은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로 인해 일찍이 미싱사가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그 밑에서 일하는 10대 여공들은 똑바로 설 수조차 없는 다락에서 15시간씩 근무했지만 월급은 여전했으며 옷 먼지와 폐쇄적인 환경으로 인해 폐질환을 앓는 이도 많았다. 그러던 중 한 어린 여공이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폐렴을 앓다가 강제 해고되었고, 전태일은 그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1966년, 함께 해고되고 만다. 

1968년, 그는 노동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길로 전태일은 대학을 나왔다는 국숫집 아저씨에게 물어가며 어려운 한자로 적혀있는 근로기준법을 하나하나 독파하기 시작했고, 점차 노동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는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개하며 바보회를 창립,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실의 부당함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바보회는 훗날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꾸려져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기업가들의 부당노동행위를 막는데 힘쓴다.


6. 처음부터 거리에 나선 건 아니다. 노동청에 청원서도 냈다

근로감독관에게 보내는 청원서

전태일의 노동운동 하면 거리에서 소리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법이 지켜지길’ 바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동대문구청, 근로감독관실, 노동청을 찾아다니며 법을 지키지 않는 현실을 호소했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들어주는 이 없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도 냈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그의 외침은 단순한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여공과 시다들을 도와 매일같이 통행금지법을 어겼던 그는 그들에게 상습 범법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제대로 도달하지 못한 채 반송되었다.


7. 반정부 인물이 아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물이기에 전태일은 반정부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는 노동해방이나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을 준수해달라고 청원했다. 분신을 하기 전,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는데 그 안에서도 그는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요구하는 사항들 역시 무리한 요구가 아닌, 근로기준법에 근거하여 작성된 사항들뿐이었다.


8. 사회주의자라고 손가락질 당했으나, 북한을 ‘북괴’라고 표현하며 반감을 갖고 있었다

전태일의 노동운동을 보고 자본가들은 ‘빨갱이’라며 그를 매도하였으나 그는 북한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야수와 같은 북괴는 평화 속에 잠긴 남녁 땅을 피로 물드렸다’라고 적으며 한국 전쟁의 시발점을 북한의 침공이라 판단했다. 


9. 분신 후 방치 당했다

전태일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어머니 이소선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면서 평화시장 노동자의 현실을 전했고, 짤막하게 한줄 씩 나오던 기사는 점차 그 규모가 커져 이후 주요 지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시민들에게 평화시장의 참혹한 현실이 이슈가 되자, 정부는 국정감사를 시행하겠다 발표했고 노동청 역시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게 잘 풀리는 듯 싶었다. 그러나 노동청은 국정 감사를 조용히 넘기자, 약속했던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11월 7일까지 개정하겠다고 했던 노동청이 태도를 바꾸자,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했고 거사는 1970년 11월 13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거사 날, 그는 온몸에 석유와 휘발유를 들이붓고 라이터로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분신하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쳤고, 마지막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며 쓰러졌다. 쓰러진 뒤에도 불타고 있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3분가량 더 불탔고,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 되었다.


10.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활동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1987년 7월26일 되찾은 조합 사무실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밝게 웃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가운데)와 동생 전태삼씨(서있는 이 중 왼쪽 셋째)도 있다.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이 쓰러졌다는 이야길 듣고 병원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그는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뤄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사망했고, 이소선은 아들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했다. 이는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기록되었다. 이소선은 노동운동 시작 후, 노동자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아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이소선은 그의 말처럼 뼈를 갈아 노동·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고, 그는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리게 된다.


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