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부터 나영석 PD의 팬이었다. <1박 2일> 시즌때부터 좋아했는데 방송시간을 놓칠 때가 많아서 아예 DVR(디지털 비디오 레코더: 하드디스크를 쓰는 VTR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를 사서 예약녹화를 걸어놓고 봤었다. 아마 모든 에피소드를 최소 3번 이상은 본 것 같다.

당시 인터넷상에서 소위 무한도전파와 12일파가 심심치 않게 이게 더 좋네 이게 더 웃기네 하면서 댓글놀이를 하곤 했는데 당연히 난 12일편에 서서 재미있게 댓글 구경을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한도전은 뭐랄까, 젊음, 도회적, 새로움 뭐 그런 이미지였다면 12일은 반대로 세대를 아우르는, 뭐 솔직히 말하면 시골틱한 그런 이미지였는데, 약간 서늘하고 차갑게 느껴졌던 무한도전에 비해 따뜻함이 느껴졌던 12일을 보며 위안을 얻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영석 PD가 만드는 프로그램들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좋아했고, 또 좋아한다.

, 나영석 PDTV 프로그램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과 삶에 따뜻한 시선을 드리우는 콘텐츠들은 다른 미디어에도 정말 많은데, 만화 중에도 소위 '치유계'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고, 영화 중에도 그런 영화들이 정말 많이 있다. 특히 일본 영화 중 그런 소위 '힐링 무비'라 불리는 것들이 많은데, 오늘은 그중 가장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카모메 식당>을 이야기하려 한다.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은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식당의 이름이다. 일본 요리를 핀란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식당의 주인 사치에. 하지만 한달 넘게 손님은 오지 않고 식당 밖에서 안을 구경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다행히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대학생이 첫 손님으로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이윽고 일본인 미도리와 마사코가 식당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면서 시나몬롤 같은 새로운 음식도 만들게 된다.

그런 음식에 이끌려 오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잔잔하면서도 재미있게 스토리가 진행되어가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카모메 식당이란 공간이,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내 주위가 온기로 채워지는 것 같아 좋았다. 특히 음식이 정말 먹음직스럽게 나오는데, <심야식당>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푸드 스타일리스트를 담당했던 이이지마 나미가 음식을 연출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갑자기 사라진 남편 때문에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 핀란드 아주머니가 나온다. 술안주로 딱인 가라아게나 쇼가야키, 연어구이 같은 맛있는 음식들이 나오니 기왕이면 그런 안주와 함께 술을 건강하게 즐기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지만, 술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Koskenkorva Viina. 출처 : 위키피디아

영화 속에서 아주머니가 달라고 하는 술은 코스켄코르바(Koskenkorva)’. 보통은 코수(Kossu)’라고 많이 불리는데 핀란드의 소주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다. 제법을 보면 보리를 연속증류기로 증류해 고순도의 알코올을 만든 후 이를 핀란드의 샘물과 희석한 후 아주 약간의 설탕을 첨가한다고 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보드카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고 38도라는 돗수를 제외하면 우리나라 희석식 소주를 만드는 방법과도 매우 흡사하다.

제법을 봐도 그렇고 해외 주류회사나 주류 관련 웹 페이지들, 심지어 코스켄코르바를 만드는 회사의 영어 홈페이지에서도 자기 술을 보드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정작 핀란드인들은 코스켄코르바는 절대로 보드카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소주가 그런 것처럼 핀란드인들에게 코스켄코르바는 뭔가 정서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코스켄코르바를 쉬지 않고 마셨던 아주머니도 그렇고,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다 외롭고 약한 모습을 갖고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이다. 약한 모습을 갖고 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고, 그러다 보면 서로 그 약한 부분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감정의 표현은 카모메식당뿐만이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나온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도 "달리 살아본들 마찬가지야. 비밀을 알려줄까? 뚱보건 말라깽이건 꺽다리건 백인이건 다 고독해. 당혹스런 노릇이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카모메 식당에서도 미도리가 "세상 어디에 있어도 슬픈 사람은 슬프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워요"라고 말한다. 단단한 마음을 가졌지만 외롭고, 사연이 있어 외롭고, 어딘가 비어 있는 생활에 지쳐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공간 카모메 식당, 그 공간에 흐르는 공기는 마치 나영석 PD가 만든 공간처럼 온기가 흐른다. 그 온기에 이끌려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 공간을 채우는 시나몬롤의 향기에 모두 행복해진다.

개인적으로도 이 영화를 10번 넘게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울할 때면 <아일랜드의 연풍>이라는 영화를 봤다고 하는데 나에겐 <카모메 식당>이 그런 영화였다.

사실 영화에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그냥 잔잔한 생활의 연속일 뿐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익숙해져 있다면 보다 잠들기 딱이다. 하지만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을 때는, 그 약간의 스토리조차 버거울 때가 많다. 최근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가 일본 전문 케이블 PP의 한 콘텐츠로 부상하고 있는 이유도 아마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별다르게 예쁘지도 않고, 별다르게 멋있지도 않고, 별다르게 힘이 세거나 고민이 없지도 않은, 그냥 나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기대가며 만드는 공간 카모메 식당, 따지자면야 나영석 PD의 <윤식당>만큼이나 현실적이지 못한 공간이겠지만 그런 공간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고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영화가 할 일은 다한 게 아닐까.

코스켄코르바는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힘들다. 아마 핀란디아 보드카가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핀란드의 술일 것이다.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 소파에 깊숙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커피와 시나몬롤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만약 필자와 취향이 비슷하다면 영화를 보며 커피 대신 냉동실에서 차갑게 얼린 핀란디아 보드카를 한 잔 해보시라 권하고 싶다. 기왕이면 비슷한 동네에서 온 훈제 연어를 함께 한다면 더 좋겠다. 커피나 보드카 어느쪽이든 숲이 많아 행복한 핀란드의 분위기를 느끼며 휴식할 수 있다면, 또 내일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카모메 식당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출연 고바야시 사토미, 카타기리 하이리

개봉 2006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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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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