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영화의 끝에서>:
장편 영화, <파스카>(2013) 와 <나의 연기 워크샵>(2016)과 같은 출중한 작품들로 인정을 받았던 안선경 감독의 신작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공개되었다. 영화는 10년 동안 손댔던 모든 영화가 엎어졌던 영화감독, 공시원(박종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가까스로 제작자를 만난 그는 산악 영화 제작을 앞두고 있는 중이다.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았던 영화 제작은 더더욱 예기치 않은 일들로 현실과 멀어진다. 사랑하는 반려 고양이, 루카마저 떠나보내고 그는 망연자실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영화는 175분이라는 러닝타임으로 짐작할 수 있듯, 연이어 계속되는 롱테이크와 긴 호흡, 그리고 읊조리는 대사들로 가득하다. 놀라운 것은 이토록 긴 (감정) 서사극에 단 1초도 지루해지거나 집중을 잃을 틈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가느다란 희망에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결국 공중분해되는 과정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그려내는데, 이 3시간 여의 감정극에서 안선경 감독은 일대 사건이 아닌 ‘정서’와 ‘일상’에 집중한다. 예컨대,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서서히 무너지는 공감독의 감정과 정서를 영화는 일상의 캐리커처와 이미지들로 중첩하여 병치하는 것이다. 물론 이 대단한 영화의 또 다른 성취는 배우, 박종환의 귀환이다. 이미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종횡무진하며 맹활약을 하는 배우지만, 박종환의 시그니처는 늘 캐릭터 스터디였다. 전작 <얼굴들>(이강현, 2019)에서도, <절해고도>(김미영, 2023)에서도 그는 메인 캐릭터의 행동과 감정을 치밀하고 유연하게, 영화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빚어내어 또 다른, 그만의 스펙터클을 완성한다. <이 영화의 끝에서>는 단연코 감독 안선경과 배우 박종환의 (지금까지의) 최고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최근 어떤 영화에서도 전율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 영화의 끝에서>가 그런 경험을 선사해 줄 것이다. (개봉 미정)
2. <패스트 라이브즈>:
작년 선댄스 영화제, 올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평론가과 관객들의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넘버 3>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의 딸, 셀린 송(Celine Song)의 장편 데뷔로 유태오와 그레타 리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을 중심으로 한다. 어느 날 나영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고 해성의 존재를 잊게 된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르고, ‘노라’(Nor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뉴욕에 살고 있던 나영은 페이스북을 통해 해성이 자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온라인으로 재회하게 되고 매일 대화를 이어 나간다. 그러나 각자의 일상의 변화로 인해 이들은 다시금 헤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또다시 12년이 흐르고 해성은 이미 결혼한 나영을 찾아 뉴욕을 방문한다. 영화는 로맨스 장르의 프레임을 띄는 듯 하나, 궁극적으로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디아스포라의 관계를 서정적인 문체로 보여준다.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 특히 나영의 여정과 그녀의 선택은 이민 2세대의 서사이기도, 역사이기도 하다. 이제 30대 초중반을 지나는 감독(1988년생)의 어린 나이와는 반대로 영화는 80년대 한국 이민사를 (압축적으로나마) 친밀하고, 영리하게 그려낸다. (올해 개봉 예정, CJ 배급)
3. <빌려온 시간> (Borrowed Time):
올해 ‘뉴 커런츠’ 섹션에 소개된 중국영화다. 영화를 연출한 초이지 감독은 1988년생으로 89년생의 비간 감독(<지구 최후의 밤>)과 함께 주목해야 할 중국의 신세대 감독이다. 영화는 결혼을 앞둔 ‘막유엔팅’이 20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를 찾아 홍콩으로 떠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아버지는 광저우로 일하러 왔다가 유엔팅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했고, 10년을 함께 보낸 뒤 훌쩍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에 이미 가족이 있었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를 들고 홍콩으로 온 유엔팅은 태풍이 지나는 거리에서 ‘빌려온 시간’(Borrowed Time) 이라는 CD를 주었던 오래전의 연인과 재회하게 된다.
중국 영화의 새로운 바람이 분다. 지난 5세대 감독들이 중국의 역사와 중심 사건들을 영화적 스펙터클로 변환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면 현 세대(80, 90년대생)의 감독들은 현재 중국의 정체성, 그리고 홍콩 반환 이후의 중국 사회를 최대한 세속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예컨대 비간의 경우는 시(時)로, 초이지 감독은 판타지와 음악으로 그려낸다. 물론 이들의 몽환적인 재현 모드는 이들 고유의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극심한 영화 검열의 영향에 의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선에서의 중국, 다시 말해 자유와 억압이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있는, 이상적인 화합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는 중국 사회는 이들의 시선에서 절대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공간이다. <빌려온 시간>을 지배하는 미학적인 이미지들은 중국과 홍콩의 예찬이 아닌, 이들의 분리를 은유하고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제작을 맡은 관금붕 감독의 자취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제목, ‘빌려온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이 시간은 홍콩이 영국에게 맡겨져 있던 시간이기도 하고, 자유를 쟁취해야 할 홍콩이 중국에게 종속된 현 시간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홍콩의 전경, 환상 시퀀스로 보이는 숲의 이미지들 만큼이나 몽환적이고 인상적인 또 다른 영화적 요소는 바로 음악이다. <파더 투 선>(샤오 야 췐, 2018),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샤오 야 췐, 2011)을 비롯해, <반교: 디텐션>(서한강, 2019) 등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음악 감독, 서머 레이(Summer Lei)는 이번 작품에서 역시 영화만큼이나 혹은 영화를 능가하는 스코어를 선보인다. 그녀의 음악은 유엔팅의 여정에 따라 톤과 장르를 달리한다. 예를 들어, 유엔팅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는 혼란과 불안이, 그리고 예전 연인을 재회하면서부터는 설렘과 환희가 서머 레이의 서정적인 운율로 그려진다.
오랜만에 정말로 수려한 중국영화를 만났다. 지금도, 앞으로도 훨씬 더 기대되는 젊은 작가들의 영화가 산재할 것이라는 흥분과 기대를 갖게 하는 작품이 틀림없다. (개봉 미정)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