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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년들〉 설경구 “도저히 그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씨네플레이
배우 설경구 (제공=CJ ENM)
배우 설경구 (제공=CJ ENM)

 

1999년 전북 삼례 나라슈퍼마켓에서 일어난 강도 살인사건 범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형을 살았던 세 소년은 무려 17년 후 청년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고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은 삼례 나라슈퍼마켓 사건을 토대로 공권력에 희생된 약자들이 자신들을 규명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가슴 뭉클한 휴먼 드라마다. 2010년대 들어서도 변함없이 <부러진 화살>(2012)과 <남영동1985>(2012), 그리고 <블랙머니>(2019)로 대한민국의 사법체계, 공권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얼굴을 그려 온 정지영 감독의 작품의 맥을 잇는 사회 고발성 드라마다.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적당히 해요.” 설경구는 소년들의 사건을 담당한 형사로, 저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아이들을 대신해 거대한 공권력에 맞서 앞장선 형사 황준철을 연기한다. 도통 ‘적당히’를 모르는 직설화법의 캐릭터를 위해, 정지영 감독이 설경구에게 요구한 건 <공공의 적> 시리즈의 무대포 형사 ‘강철중’이었다.

 

설경구는 20여 년 전의 강철중과 닮았지만, 그 강철중이 외부의 압력으로 고꾸라지고 나약해지는 면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황준철이 걸어온 17년의 세월이 가진 무게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쉬지 않고 연달아 작품을 이어 가는 동안, 관객들이 자신의 얼굴에 절대 물리지 않도록, 새로움을 갱신하는 이 배우의 노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배우 설경구 (제공=CJ ENM)
배우 설경구 (제공=CJ ENM)

 

정지영 감독님과 이번이 첫 작품이에요. 그간 작품의 활동 기간으로 볼 때 접점이 있으셨을 텐데, 조금 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게요. 처음이었어요. 사실 전에 한번 제안을 주신 적이 있었는데 스케줄이 안되어 고사한 적이 있었어요. 그 죄를 탕감하고자, 이번엔 무조건 한다 했죠. 그러다 상갓집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한번 해야지” 하시길래, “영광이죠. 책 주십시오” 했는데, 진짜 일주일 만에 주시는 거예요. (웃음)

 

정지영 감독 데뷔 40주년이 되는 시기에 같이 작품을 하신 것도 의미가 더해지는데요. 세대를 넘어 꾸준히 작업을 하는 감독님의 비밀을 옆에서 보셨을 텐데요.

저도 정지영 감독님처럼 나이 먹고 싶더라고요. 전에는 나이도 있으시고 경력도 많으시니 꼰대 기질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이지 그런 게 없으세요. 상하관계가 아니라 좋은 어른 같더라고요. 언제 어디서든 스태프들과 거침없이 싸우시고 언성이 높아요. (웃음) 싸움인 줄 알았는데 보면 토론이었고,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현장이었어요. 에너지도 대단하세요. 보통 요즘 감독들은 모니터에서 무전기로 얘기해 주거든요. 감독님은 무전기 안 쓰세요. 직접 뛰어오세요. (웃음) 아, 그리고 촬영장 오실 때 배낭에 아령 4kg짜리 2개 들고 오세요. 쉬는 시간에 운동하시려고 가지고 다니세요.

〈소년들〉
〈소년들〉

 

<소년들> 출연은 정지영 감독 작품의 완성도, 추구하는 방향성 등 여러 면에서 믿음이 바탕이 되셨을 것 같은데요.

 

<부러진 화살>(2012)을 정말 재밌게 봤었거든요. 사회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풀어서 흥미로웠고, 감독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다 싶었어요. 그런데 <남영동1985>(2012)는 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감독님, 영화를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냐고, 너무 보기 힘들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그 힘든 걸 ‘니들도 한번 맛봐라’하고 찍은 거라고. 누가 돈 들여서 그 힘든 걸 봐요. (웃음)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감독님이 참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억울한 사건들을 겪은 이들의 마음을 한번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봐라라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영화를 찍는 그 마음이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세월호 참사를 바탕으로 한 <생일>(2019), 조두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원>(2013) 같이 사건 피해자의 아픔과 규명을 다룬 작품들이 필모그래피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데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만큼, 이들 작품이 주는 부담도 클 것 같은데요.

 

그래서 촬영 전에는 저는 피해자분들을 잘 안 보려고 하는 편이이예요. 써 있는 텍스트만 표현하려고 해요. 이번에도 그랬고요. 촬영 동안에는 그냥 연기만 하려고요. 사실 이기적인 건데, 그렇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요. 공개되면 그제야 만나 뵙고 인사드리고 해요. 그런데 작품 끝나고 만나도 더 아픈 마음이 남는 것 같아요. 그분들 얼굴만 봬도 각인이 되더라고요. 근데 안 할 수가 없어요. 감독님이 책을 들고 올 때 기운이 달라요. 책을 쓰실 때부터 족히 4년 정도 피해자들을 만나고 공감해서 쓴 책들이에요. 이미 분노 게이지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상태예요. 막 씹어 먹을 것 같은 채로 저한테 오기 때문에 그 눈을 회피할 수가 없어요. (웃음)

〈소년들〉
〈소년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에 비하자면, 언론의 주목이나 대중의 인지는 사실 크지 않은 사건이기도 한데요. 이번 영화의 소재가 된 삼례 나라슈퍼 사건에 대해서는 작품 이전에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서두에 ‘많이 알려진 삼례 나라슈퍼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 그거 잘못된 거 더라구요. 안 알려진 사건이더라고요. 영화 보고 관객이, 본인도 전주 사람인데 지금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특히 젊은 세대들은 오래전 사건이라 접하지 못했고요. 저도 이 사건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뉴스나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 봤으니까요. 막상 촬영해보니 이 이야기를 진짜로 알고 있던 게 아니더라고요. 사건의 이름만 안다고 해서 그 실체까지 다 아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죠.

최근 피해자들을 만나기도 하셨는데요.

 

시사 끝나고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요. 그 자리에 나라슈퍼 사건으로 누명을 쓴 실제 피해자와 증언을 통해 이들이 누명을 벗는 데 일조한 사건의 진범, 그리고 낙동강 살인사건, 이춘재 8차 살인사건 등에서 범인으로 지목되어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도 영화를 관람했어요. 그분들을 뵙는데 무언가 초월한 분들 같더라고요. 낙동강 사건 피해자분은 ‘애가 돌 때 수감됐는데 나와 보니 스물네 살이 돼 있더라'라고 말씀하시고, 이춘재 사건 피해자는 23살에 감옥에 수감되어 44살에 나왔대요. 빼앗긴 세월이 도대체 얼마예요. 근데 정작 그분들은 말할 때마다 웃어요. 사진 찍을 때 하트도 하시고. (웃음) 미치겠더라고요. 잘못된 법과 조작으로 악용된 분들이죠, 근데 웃어요. 이분들이. 그분들의 공통점은 다들 약자라는 것뿐이죠.

〈소년들〉
〈소년들〉

 

잘못된 공권력에 희생된 약자들이 정의를 되찾는 것. 결국 영화의 주제 의식도 거기서 출발하는데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공권력에 의해 뒤죽박죽이 된 사건을 결국 유족과 누명 피해자들 같은 약자들, 힘없는 소시민들이 제자리로 가져다 놓아요. <소년들>은 그 과정을 그린 영화고요. 돌이켜 보면 정지영 감독님은 영화계의 현안이 있을 때마다 책임감을 가지고 직접 나서서 농성하고 목소리를 내셨던, 행동하셨던 분이셨어요. 이 영화를 만든 것도 이런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다는 자각으로 만드신 거고요. 감독님께서 ‘이 작품이 사회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이라고 말하셨어요. 감독님을 보면서 저도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고발>이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를 받으셨는데 <소년들>로 바뀌었어요. 황반장의 활약보다는 피해자들을 조명하는 톤앤매너로 바뀐 것 같은데요.

 

<블랙머니>(2019) 보면 금융비리를 밝히기 위해 (조)진웅이가 ‘고발한다, 고발한다’ 하잖아요. 거기서 <고발>이라는 제목이 나온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사건을 조사한 형사 황준철이 수사를 하면서 어떤 활약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감정표현도 못 했던 소년들이 성장해서 용기를 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향이라 <소년들>이 더 맞다 싶어요.

〈소년들〉
〈소년들〉

<부러진 화살> <남영동1985> <블랙머니> 등 사회를 향해 날리는 정지영 감독 방식의 직설 화법을 연기한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분명 쾌감도 있었을 텐데요.

 

오래간만에 소리 지르며 할 수 있었어요. 최근에 감정을 그냥 여과 없이 그냥 막 멱살 잡고 질러버린 경험이 별로 없어요. 황준철 별명이 ‘미친개’라고 그래서, 제가 그렇게 내지르는 걸 감독님도 크게 개의치 않고 놔두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이대로 해야지 하고 나갔죠. 사실 전 마지막에 법정에서 소년들이 ‘우리는 살인자가 아니다’‘ 외치는 대사가 너무 직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 장면을 촬영하는데 감정이 확 오더라고요. 감독님이 세상에 외치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느껴졌어요. 사건을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가 영화를 보고 너무 고맙다고, 실제로는 법정에서 그렇게 못했는데, 영화에서라도 소년들이 목소리를 내게 해준 것에 대해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정지영 감독님이 황반장 캐릭터에 대해, <재심>(2017)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약촌오거리 사건의 형사반장에서 빌려 온 인물’이라고 하셨는데요. 다른 사건에서 가져온 인물을 접목하는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

 

감독님이 단순하게, 그냥 “강철중 한번 하자” 그러셨어요. 예전엔 <공공의 적> 시리즈 이후에 비슷한 역할이 많이 들어와서 경찰 역할을 좀 피했었거든요. 그런데 책을 보니까 황반장은 ‘정리할 줄 아는 강철중’인 것 같더라고요. 개인적으로 1999년 사건이 일어난 이후 17년의 시간이 흐른 2016년 황준철의 모습이 더 중요했어요. 약촌오거리 사건 담당 형사 분도 이후에 힘들게 사셨다고 하더라고요. 술을 하루에 다섯 병을 마시고, 살 수가 없어서 뇌경색까지 올 정도였다고. 어마어마한 상처를 받으셨대요.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데 다 막으니까. 그래서 열정이 있던 과거와 피폐해진 현재의 대비를 최대한 표현하려고 했어요.

〈소년들〉
〈소년들〉

 

수척해진 모습에서 1999년에서 2016년도를 오가는 황준철의 변화가 단박에 읽혀졌어요. 살을 얼마나 빼신 건가 싶더라고요.

 

일단은 살을 뺀 이유가 힘이 좀 쫙 빠졌으면 좋겠던 거죠. 딱 봤을 때 첫 장면이 뒷모습이잖아요. 원래 황반장은 뒷모습보다는 자신만만하고 열정적인 앞모습인 사람인데, 뒷모습부터 나오잖아요. 감량은 그냥 굶었어요. 사실 단기간에 감량을 하자면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처음 감독님께서 살 빼는데 처음에 3주 주기로 했었어요. 3주면 좀 될 것 같았어요. 근데 그게 코로나라 장소가 섭외가 됐다가 취소가 되고, 비가 오고 그런 게 반복되면서 촬영이 미뤄지고 미뤄져 결국 저한테 주어진 날은 일주일이었어요. 미치겠더라고요. 촬영팀은 다 서울로 올라갔고 저는 촬영장 숙소에 남아서 그때부터 굶기 시작했어요. 촬영 직전까지는 굶었던 것 같아요.

 

<더 문> 이후, 바로 신작으로 뵙는 건데요. 사실 코로나 기간에도 쉼 없이 신작으로 관객과 꾸준히 만나오셨는데요. 앞서 저조한 흥행 기록에 대해 ‘충격적’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셨어요. 위축된 극장 상황에 대한 체감도 클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자신 있게 선보이시는 변을 들어 본다면요.

 

지금은 피부로 느껴져요. 작품을 한 지 한 30년 됐는데 이런 정도는 처음인 것 같아요. 올해는 촬영을 한 게 아니고 개봉만 하고 있어요. 이렇게 연달아 하기는 또 처음이에요. 관객과 만남이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네요. 2000년대 초반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 하잖아요. 그땐 영화가 다양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찬반 논쟁도 많았고, 대담도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없어진 것 같아 그립기도 하고,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잘되면 ‘이런 작품도 되네’ 이러면서 의미 있는 영화에도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소년들〉
〈소년들〉

이화정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