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과 영화는 비슷한 속성을 지닌 듯 보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면이 많다. 기원과 태생을 따지면 극과 극으로 분리될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해, 연극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해 왔고, 영화는 19세기 이후 기술 문명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연기를 하고, 시공 배경에 따른 분장 및 세트와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다는 점에선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관람하는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물리적 밀도는 또 다르다.
영화 속의 연극, 연극 속의 성경
영화는 가상의 평면으로 반복 재연 가능하지만, 연극은 그렇지 않다. 일정 기간 똑같은 작품에서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연기를 하더라도 여러 상황 변수(배우의 컨디션이나 연출의 심기 등)에 따라 조금씩, 때로는 완전히 다른 반향이 생길 수도 있다. 그 점이 영화가 살려낼 수 없는 연극만의 독자적 생동감일 것이다. 데니 아르캉 감독의 <몬트리올 예수>(1989)는 연극의 그러한 특성을 스크린에 재현한 매우 독특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영화는 예수의 수난극을 매개로 진행된다. 몬트리올의 가톨릭 교구에선 매년 성당 소유의 산중에서 예수의 수난을 연극으로 재연한다. 기본적으론 선교 내지 전도의 목적일 터이나, 수 십 년 공연을 해 온 만큼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런 차원에서 새로운 인물을 연출 및 예수 역할로 끌어들이는데, 다니엘 콜롱(로데어 블루토)이라는 청년이 그 책무를 맡게 된다.
다니엘은 왜소한 체구에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나, 어딘지 신비스러워 보이는 인물이다. 음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연극을 독학했다고 하는데, 몬트리올로 돌아오기 전 오랫동안 여행을 다녔다고만 할 뿐(인도나 네팔 등지를 떠돌았다는 건 마지막에 살짝 언급된다), 그 외 다른 개인적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가족의 존재 여부조차 알 수 없다. 다니엘은 기존에 공연되던 연극의 내용을 제 손으로 바꿔보려고 계획한다. 그러면서 배우들을 섭외하러 다닌다.
이런 비천한 인물들이 예수를 전한다고?

이전에도 작품에 참여했던 중년 여배우 콘스탄스(조한느 마리 트렘블레이)가 맨 먼저 캐스팅된다. 그녀는 혼자 딸을 키우며 급식소에서 일하는 중이다. 콘스탄스가 공연을 관할하는 사제와 밀월 관계라는 건 영화 초반에 대놓고 드러난다. 신자라면 어딘지 불경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니엘과 콘스탄스는 같이 캐스팅에 나선다. 포르노 음성 더빙을 하는 중년 배우 르네(로버트 르페이지)가 합류하고 햄릿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풋내기 마틴(레미 지라르드) 또한 고심 끝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아름다운 몸매를 무기로 광고계 스타를 꿈꾸던 미레유(캐서린 윌케닝)가 마리아 역으로 합류한다.
연극은 기존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 어째 교구 측에서 제안한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경찰의 호위 및 안내를 받으며 관객들은 흡사 성지 순례하듯 배우들을 좇는다. 매번 장소를 옮겨가며 배우들이 내레이션 및 여러 역할로 분해 예수의 고행을 전하는데, 관객들 반응이 심상찮다. 기적을 행하는 예수의 모습과 설법에 감화해 공연 중에 예수에게 달려들어 구원을 간청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공연은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나, 교구 측에선 마뜩잖다. 마리아가 미혼모라는 설정, 예수가 로마 병사의 아들이라는 암시 등을 딴지 걸며 내용을 수정하라 압박을 가한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상반된다. 성경의 메시지가 현대 사회에 전달되는 방식에 대한 다니엘 나름의 천착이 설득력을 얻는 셈인데, 다른 배우들도 성경 내용에 저절로 감화되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요컨대, 세상의 음지에서 못 이룬 꿈, 그러나 알고 보면 자본과 그로 인한 세속적 욕망과 허울에 불과한 제도적 허영의 올가미에 묶인 채 자기 자신을 파묻듯 살아온 것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특히 미레유가 그러하다.
연기 속에서 개심하는 배우들

미레유는 다니엘을 알기 전, 거만한 광고제작자 저지의 애인이었다. 저지는 미레유에게 “너는 몸뚱이가 재산이야!”라고 엄포한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미레유도 당연히 자신의 몸으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허영에 사로잡혀 살았었다. 그런데 저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니엘과 일하면서 미레유는 새로운 삶에 눈뜬다. 그러면서 다니엘을 사랑하게 된다. 영화에서 주제의 일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미레유는 산중 수난극을 연기하는 도중에 한 맥주 광고 오디션에 참여하게 된다. 오디션에 합격하면 파리로 날아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여기는 건데, 다니엘이 동참하게 된다. 오디션 현장은 수난극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다. 그야말로 자본과 제도와 그로 인한 노골적인 여성 상품화가 호화찬란하게 전시된다. 허름한 일상복 차림으로 참여한 미레유에게 오디션 감독은 탈의를 강요한다. 이때, 다니엘이 무대로 달려간다. “더 화끈한 걸 보여줘?”라 소리치며 집기와 카메라들을 부수자 광고회사 직원 등이 꽁무니를 뺀다. 다니엘은 그 죄로 공연 중 경찰에 연행된다.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매달린 연기를 하는 도중 경찰이 찾아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장면은 우습기도 절묘하기도 하다. 현대의 예수는 결국 제도의 수갑에 채워져 법원 피고석에 앉게 된다.
연극에서 관객이 참여하거나 관객마저 무대의 한 요소가 되는 건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후, 현대 연극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연극의 전통적인 규칙 및 형식을 깨는 것인데, <몬트리올 예수>에선 연극의 그러한 속성을 풍자하는 장면이 적잖게 숨어있다. 다니엘이 법원에 가 있는 동안 수정한 대본을 들고 온 사제를 배우들이 희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배우들이 코미디 프랑세즈 스타일, 뉴욕의 메쏘드 스타일, 할렘의 건달, 가부키 스타일 등으로 변주하며 성경을 읊어대자 사제가 질겁한다. 권력화돼버린 전통과 그리하여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를 옥죄게 된 형식에 대한 감독의 비판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건 성경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듯 성경은 예수 사망 이후 한 세기에 걸쳐 쓰인 책이다. 제자들의 증언과 구전 등을 바탕으로 완성된 짜깁기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 경전을 두고 인류는 2천 년 동안 온갖 해석과 오해와 불신과 외곬의 신앙 사이에서 방황해 왔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물고 늘어진다. 2천 년 전의 불확실한 역사적 인물이 어떻게 현재를 사는 사람들을 여전히 감화시키고, 심지어 그로 인한 맹목과 불신, 전쟁까지 일으키게 되는지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다만 예수가 행한 그대로를 연기했을 뿐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때, 신앙 역시 하나의 투쟁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 투쟁이 한 개인이나 집단 내부의 독단적 신념이나 제도에 의해 강행되는 외부적 분쟁으로 화할 때, 인류는 위기에 봉착한다. 역사상 벌어진 수많은 종교 전쟁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 신앙의 투쟁은 신앙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재고와 회의를 바탕으로 전개될 때 더 깊이 있는 감화와 진정성을 발휘하게 된다. ‘거듭난다’는 것. 혹은 개심(開心)과 회심(回心)은 밑바닥을 모두 들춰내는 순수 고행에 의해서나 반짝이는 아주 진귀한 보석의 발굴에 다름 아니다. 다니엘은 성경 원전을 손대거나 임의로 수정한 게 아니라, 쓰여진 그대로, 다시 말해 예수가 행한 그대로를 연극으로 보여줬을 뿐이다.
그럼에도 제도화된 교구와 거기에 밀착한 모든 정치 경제 문화적 시스템들은 성과 속을 나눈 상태에서 서로를 교환 체계 삼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급급한다. 수난극을 통해 명성을 얻은 다섯 배우들에게도 온갖 유혹들이 빗발친다. 그런데 그 모두가 예수 혹은 현대의 신이라 불리는 자본 및 관료제의 현란한 스펙터클에 지나지 않는다(이것이말로 진짜 엉터리 연극 아니던가). 수난극을 통해 개심한 배우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연기라는 게 곧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아닌가)이 되어 버렸다.
현대의 예수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그러나 여전히 굳건한 제도는 그들을 방해한다. 교구에선 경찰력을 동원해 다니엘 일행이 강행한 공연을 막으려 한다. 그러다가 소동이 일어난다. 관객들은 이미 배우들 편이다. 다니엘이 매달려있던 십자가가 쓰러진다. 병원에 실려 간 다니엘은 끝내 죽는다. 아니, 끝내 죽어 다시 살아난다. 말 그대로 ‘부활’의 20세기 버전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절묘하고, 애잔하고, 슬프고, 그러면서 또 환희에 가득 찬 성가가 다니엘이 사망한 지하철역에 고요히 울려 퍼진다. 35년 전, 한 예수가 그렇게 부활해 또 다른 예수를 찾는 듯하다. 21세기가 다시 인류 최초의 1세기 같아진다고 하면, 과찬일까 망상일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