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왜 영화여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변으로 어떤 감독을 뽑아야 한다면 누가 가장 어울릴까.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은 정말 많은데, 어쩐지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송곳니>를 시작으로 전 세계 영화광의 선택을 받은 그는 독창적인 세계관과 개성 강한 연출의 정수를 담은 영화들을 선보인, 그 어떤 영화감독들보다 '영화'에 어울리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을 프리즘 삼아 세계를 들여다보는 건 두세 시간에 딱 적합하지, 시리즈나 다른 매체에는 영 안 맞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베니스영화제에서 그의 신작 <가여운 것들>에게 최고상 황금사자장을 쥐여준 것도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다. 어떤 영화길래 이런 말까지 하는지, 2월 27일 언론배급시사회에서 <가여운 것들>을 미리 만난 소감을 옮겨본다.
원작의 구조를 덜어내고 비주얼로 채우다
<가여운 것들>은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소설 「가여운 것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와 원작 소설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는 있으나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크다. 강으로 투신한 여성과 태아의 두뇌를 결합시킨 새로운 인간 '벨라 벡스터'와 그의 주변인물의 이야기란 공통점은 있지만, 서술하는 관점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원작 소설은 이 벨라 벡스터과 함께 한 사람들, 혹은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모은 회고록 형식으로 진행한다. 작가 그레이는 그 자신조차 회고록을 편집하는 입장이라고 위장하며 환상적 리얼리즘을 강조한다.

반면 영화는 원작의 다소 복잡한 구조를 덜어낸다. 그리고 온전히 벨라 벡스터의 삶을 관찰하는 형식으로 풀어낸다. 벨라 벡스터에게 집중하기 위해 몇몇 설정을 거둬낸 뒤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재배치했으며(종종 플래시백이 있긴 하다) 친절하게 챕터 구분까지 한다. 원작에 비하면, 영화에 걸맞은 구성과 전개로 각색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원작의 복잡다단한 구조 대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선택한 건 환상적인 비주얼이다. '환상적'이란 건 비주얼의 경이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여운 것들>의 비주얼은 정말 현실에서 보지 못한 복합적인 감성을 드러낸다. 런던, 리스본, 파리 등 실제 있는 도시를 배경으로 지목하지만, <가여운 것들>의 프레임에선 모든 것이 오히려 초현실적이다. 강렬한 색감과 벨라의 패션 감각, 곳곳에 묘사되는 과학기술까지 <가여운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현한 비현실적 비주얼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필모그래피 중 가장 화려하다.

원래도 특이한 감독이지만, 그래도 미리 (경고)를 붙여야 할

가장 화려한 <가여운 것들>은 대신 가장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불쾌함과 기묘함으로 정평이 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지만, <가여운 것들>만큼 극단적으로 표현한 바는 없다. 일단 여성의 육체와 태아의 두뇌, 이른바 '프랑켄슈타인'이라 할 수 있는 벨라 벡스터의 탄생 장면을 비롯해 영화는 곳곳에서 적나라한 육체와 사체를 전시한다. 아이나 다름없는 벨라가 아버지이자 '하느님' 갓윈 벡스터(윌렘 대포) 박사의 연구를 따라하며 시체를 훼손하는 장면이나 벨라를 만들기 위해 두개골을 해부하는 장면 등 장면이 많지는 않으나 고어 묘사에 면역이 없는 관객들에겐 이번 영화가 무척 힘들지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렬하게 반응이 갈릴 부분은 성교 장면들일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 벨라 벡스터가 점점 성에 눈을 뜨고 한량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과 뜨거운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은 신체의 자율성을 깨달으면서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획득하는 벨라의 행적과 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열되는 장면은 관객에 따라 과잉으로 보일 수 있다. 심지어 영화의 후반부에서도 다양한(!) 성교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성 문제에서 보수적인 한국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특히 미지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가여운 것들>은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처음부터 성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영화이다. 이런 호불호의 영역 또한 <가여운 것들>의 관객들에겐 좋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다. 다만 엠마 스톤이란 스타를 보기 위해 <가여운 것들>을 찾는 관객이라면 좀 더 영화의 정보를 알아보고 찾는 것이 '내상'을 최소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새로운 국면

<가여운 것들>은 정말 요르고스 란티모스스러운 영화지만, 그의 전작들과 다른 부분이 꽤 명확하다. 먼저 기존 그의 영화들은 현실적인 외피를 쓰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의 대표작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모두 극단적인 설정을 취하더라도 이미지 자체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 하물며 역사적 배경을 차용한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극단적인 광각 렌즈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현실과의 거리감을 유지했지만.
반면 <가여운 것들>은 이미지부터 비현실적이다. 과장된 색감, 개 머리를 한 닭 등 이종이 결합된 동물, '하느님' 갓윈 벡스터가 식사마다 내뱉는 거품 등 <가여운 것들>의 세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세계의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전 그의 세계가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천연덕스럽게 굴었다면, 이번 <가여운 것들>은 뻔뻔하게 허풍을 떠는 모양새라고 할까.

또 이번 영화는 보다 명확하게 질문을 던진다. <가여운 것들>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학대를 당했으면서도 '과학을 위해'라는 이유에 납득하는 갓윈 벡스터와 과학의 산물로 태어났으나 본인의 자율성을 찾아가는 벨라 벡스터의 상황을 대비하며 통제와 자유, 과학과 타고난 본능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물론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동안의 작품들에서 꾸준히 인간의 자유 의지를 논했지만, 이번 작품처럼 논지를 전면에 띄우는 경우는 드물었다(<킬링 디어>가 비슷해보인다). 앞서 <가여운 것들>의 직접적인 폭력과 표현에 호불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질문 또한 직접적으로 던지기 때문에 이번 영화의 자극적인 부분에만 초점 맞춰 본다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큰 그림'을 놓치는 꼴이 될 수 있다.

작품이 워낙 특이해 이것저것을 짚다보니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배우들의 연기. 구태의연한 극찬이지만, 이번 영화의 앙상블은 단연 최고다. 벨라 벡스터를 연기하는 엠마 스톤은 아이의 걸음마부터 세계관이 확고한 여성의 눈빛까지, 벨라 벡스터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소화해 영화를 이끌어간다. (수상까진 힘들겠지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마크 러팔로는 덩컨 웨더번을 능청스럽게 연기해 관객들의 야유와 웃음을 자연스럽게 유발한다. 갓윈 벡스터 역의 윌렘 대포는 그 두터운 분장 아래에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결코 놓치지 않고, 라미 유세프의 맥스 맥캔들리스는 순박한 과학자의 모습으로 영화의 몇 안 되는 순수한 순간을 빚는다.
141분간 관객을 충격과 웃음, 긴장으로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가여운 것들>은 오는 3월 6일 개봉한다. 모두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바 '본전'을 뽑고자 한다면 무조건 추천한다. 말도 안 되는 상상,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기발한 비주얼, 이 모든 '가여운 것들'에게서 비롯되는 질문. <가여운 것들>의 냄새는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에 머물 것이다. 그것이 향기일지 악취일지 느껴보는 것, 그조차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