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2024년을 힘차게 열며, 네이버 영화 콘텐츠 공식 파트너사인 ‘씨네플레이’와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함께 진행한 영화감독 인터뷰 시리즈 <한국영화, 감독>을 이어갑니다. 매주 씨네플레이 네이버TV(tv.naver.com/cineplay)와 네이버 연예면 메인 ‘최신 영화 소식’을 통해,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한 감독당 1부와 2부로 나누어 우선 공개된 뒤, 씨네플레이 유튜브에서 그다음 주 월요일에 1부와 2부를 묶은 합본 영상 1편이 공개됩니다. 그중에서도 매번 씨네플레이의 두 명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감독들이 장편 데뷔작을 내놓기까지의 이야기만을 담은 ‘데뷔의 순간’은 글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진행: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 이진주 기자)

씨네플레이
네이버 영화 콘텐츠 공식 파트너사인 씨네플레이가 드디어 한국영화감독조합과 ‘한국영화, 감독’이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대한민국 대표 영화감독 여덟번째 손님으로 이철하 감독님을 모셨습니다.
이철하
반갑습니다. 이철하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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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은 중앙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을 졸업하시고 광고 회사에 들어가셨어요. 광고 역시 넓은 의미에서 영상 관련 직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감독님은 언제부터 영화의 꿈을 가지게 되셨나요?
이철하
어렸을 때부터 영화의 꿈을 키워왔던 시네마 키즈는 아니었고요. 저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건반, 드럼 등 연주 쪽으로 중고등학교 때 활동했어요. 부모님 몰래 나가서 연주했고 그래서 속도 많이 썩였어요. 당시에는 비주얼 록이 굉장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긴 머리에 귀걸이를 하고 다녔고요. 굉장히 날씬했죠. 지금은 아무도 안 믿어요. (웃음)
그러다 학력고사를 봤어요. 1지망, 2지망, 3지망을 선택했고 3지망이 일어일문학과였거든요. 그런데 그게 합격이 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배우게 된 일어가 후에 제가 영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음반도 준비하고 작곡도 하면서 폼을 되게 많이 잡고 다녔는데 잘 안됐죠. 저의 실력과 현실의 벽을 느끼고 군대를 다녀왔어요. 미래를 위해서 취업도 생각해야 하고 해서 광고 회사에 들어갔어요. 당시에는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광고계로 많이 넘어갔어요. 나름 공부도 좀 하고 놀기도 잘 노는 친구들이 자유로운 직업인 광고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게 굉장히 폼 나는 시절이었거든요.
처음에는 FD로 시작을 했어요. 현장에 있기보다는 찍어놓은 그림에 음악을 입히고 편집해서 감독에게 보여주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을 했어요. 밤새워서 일을 했는데도 혼자서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어요. 대학교 졸업한 후에는 조금 더 큰 광고 대행사에서 PD로 일을 했어요.
그렇게 한 3년 정도 일했을 때였어요. 해외 촬영을 몇 번 다니면서 제 시야가 넓어진 거예요. ‘내가 계속해서 이 영상 업계에 있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을까?’, ‘나의 10년 후, 20년 후 모습은 뭘까?’ 고민했죠.
씨네플레이
당시 마이클 베이나 데이비드 핀처와 같이 광고업계 출신 감독님들이 큰 인기를 끌었잖아요.
이철하
맞아요. 그분들이 막 데뷔해서 영화감독으로서 한 계단, 두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거든요. 저한테 꿈이 작게 생긴 거죠. 그리고선 한국에서 회사 일을 하는데 회사 일이 되겠어요? 안 되죠. 그래서 일하면서 꽤 많은 돈을 모아놨으니까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미국 본토에 가서 학위를 따보자’고 생각한 거죠. 그때가 97년이었어요.

씨네플레이
거의 바로 IMF가 터졌네요.
이철하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웃음) 당시 다니던 회사가 큰 광고 회사였지만 절반 이상의 분들이 다 퇴사를 했거든요.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어요.
당시에 1달러가 2300원까지 올랐어요. 햄버거 하나 사 먹기도 힘들었어요. 1달러짜리 베이글로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하숙집에서 죽 끓여서 김에다 먹었어요. 친구들 만나면 제일 싸구려 와인 한 잔씩 했죠. 그때 친해진 분이 영화 <범죄도시>(2017)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님이에요. 강 감독님이 저랑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거든요.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 아카데미는 단편 영화를 만들어서 통과가 되어야 입학 허가를 내줬어요. 그때 만든 첫 영화가 <칫솔>이라는 단편 영화예요. 10만원영화제에서 수상하고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어요. 그걸로 입학허가도 받고 영어 공부도 하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안성기, 강수연 주연의 영화 <그대 안의 블루>(1992)를 연출하신 이현승 감독님과 연결이 되었어요. 한국의 유명한 감독님이 샌프란시스코에 잠깐 머물려 하는데 호텔보다는 한국인이 있는 하숙집이 나을 것 같다고 해서 제가 방을 드리겠다고 했어요. 영화 <그대 안의 블루>를 너무 좋아했거든요. 그렇게 이현승 감독님과 함께 일주일 정도 다니면서 제 단편영화 <칫솔>도 보여드리고 수업 시간에 쓰는 시나리오에 대해서 이야기도 했어요. 많이 가까워졌죠.
그때 제가 29, 30살이었는데요. 이 감독님이 ‘늦은 나이에 영화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라면서 겁을 좀 주셨어요. 제가 ‘그래도 영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했더니 본인이 새 영화에 들어가는데 객원 연출부로 일해보라고 권해주셨어요. 그래서 한 학기 끝나자마자 휴학하고 한국으로 왔어요.
씨네플레이
그렇게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게 되신 거네요.
이철하
네. 그 영화가 이정재, 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2000)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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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은 어떤 생각이 들거나,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캐치해서 밀고 나가시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이철하
저도 고민도 많은 편이고 선택을 잘 못해요.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저와 만났던 인연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제 아들한테도 ‘네가 누굴 만날지 결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굉장히 소중한 인생의 인연이 된다’고 얘기해 줘요.
씨네플레이
당시의 현장 분위기는 지금과도 다를 것 같은데 어땠나요?
이철하
제가 처음 캘리포니아에서 보았던 화려한 촬영 현장이나 한국에서의 CF 현장과는 또 달랐죠. 정말 열정 하나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분위기가 저랑 잘 맞았어요. 제가 영화 촬영 들어가기 몇 달 전에 결혼을 했거든요. 제가 한국에 들어왔으니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 지금 아내와 결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촬영이 계속 연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날짜가 꼬인 거죠.
당시 아내는 정말 악몽 같았을 거예요. 제가 거의 집을 못 들어갔거든요. 너무 미안한 일인데 저는 현장이 너무 즐거웠어요. 영화에는 가까워질 수 있지만 결혼 생활과는 점점 멀어지는 셈이죠. (웃음)
씨네플레이
<시월애> 촬영을 끝내고는 학교로 돌아가셨나요?
이철하
마음 같아서는 한 편을 더 하고 싶었는데 학교가 3학기가 남아서 어떻게든 빨리 학교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어요. 약 5년 정도의 계획을 잡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또 재미난 사건이 터졌어요.
제가 학교 과제로 친한 친구들이랑 뮤직비디오를 만든 적이 있는데요. 당시 보스턴에서 유학 중이던 김동률 씨와의 연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서 여기저기 출품을 했죠. 그 작품이 대학생들에게 수여하는 에미상을 수상했어요. 뮤직 드라마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저희가 이 상을 받은 걸 당시 기자였던 이동진 평론가님이 기사를 내주셨어요. 그 기사를 보고 한국의 한 회사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어떤 뮤직비디오를 LA에서 찍어야 하는데 원래 촬영하기로 한 감독님 비자가 현장에서 거절되었다는 거예요. 감독님이 미국에 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뮤직비디오로 상을 받은 젊은 친구들이 와서 찍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이랑 차를 몰고 가서 찍었죠. 그게 god의 ‘거짓말’이었어요. 나름 큰 예산이었고 저에겐 첫 할리우드 프로덕션 경험이었어요. 그 뮤직비디오가 초대박을 쳤어요. 그래서 제 계획이 또 바뀐 거예요. 이후에 계속 뮤직비디오 일이 들어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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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god뿐만 아니라 SES, 양동근, 보아 등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작업을 쭉 하셨어요. 그러다 한순간에 뮤직비디오 작업을 그만두시고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로 데뷔를 하셨어요. 굉장히 잘나가던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는데 그만둘 용기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요.
이철하
당시에 청담동에 큰 사무실을 두고 일했어요. 커다란 강아지도 키우면서 폼생폼사로 살았죠. 그런데 주변에 영화로 연을 맺었던 동료분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아쉬워 보였나 봐요. ‘영화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특히 우노필름 이후에 싸이더스였던 차승재 대표님과 윤상오 PD님이 ‘더 늦어지면 못할 것 같다’고 쓴소리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영화를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미련 없이 뮤직비디오 연출을 그만두겠다 선언했어요.
그리고 시나리오 작업에 뛰어들었어요. 몇 번을 미끄려져서 4~5년 정도 시나리오만 쓰면서 보냈어요. 어느 날 차승재 대표님이 갑자기 부르시더니 CD 10장을 주셨어요. 일본 드라마였어요. ‘너 일본어 전공했지?’하면서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일본 음악은 좋아했지만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쭉 보니까 느낌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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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가 세상에 나왔군요. 당시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것이 싸이더스에서 나온 두 작품이 같은 날에 개봉했어요. 이철하 감독님의 <사랑따윈 필요없어>와 이정범 감독의 <열혈남아>가 같이 개봉했죠. 물론 투자, 배급은 달랐지만 그래도 같은 제작사의 두 영화가 같은 날 개봉한다는 것이 전무후무한 일이죠. 특히 요즘은 제작편수 자체가 줄어서 그럴 일이 없어요. 그것만 놓고 봐도 그때는 한국 영화계가 많은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철하
호황기라고 했죠. 2005년, 2006년에는 연출부 중에 감독 데뷔 못하면 능력 없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한국 영화가 일주일에 4-5편씩 개봉했어요. 그러다 2007년 이후부터 한국 영화 개봉 편수가 확 줄고 위기가 왔어요. 그때 제가 두 번째 영화를 못 만들게 되니까 한참을 방황하게 되기도 했죠.
씨네플레이
한 번도 영화감독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으세요? 사실 감독님은 여의도의 유명 빵집 사장님이기도 하시잖아요.
이철하
네네. 여의도에서 ‘브레드피트’라는 빵집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제가 영화를 그만두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에요. 말씀드렸다시피 두 번째 작품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꾸준히 작업은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만들었다고 얘기할 수 없는 작품들만 나오면서 5~6년의 시간이 간 거예요. 그 사이 둘째도 태어났고요. 생계를 위해서 아내와 함께 고민을 하다가 카페를 차리게 되었어요. 제가 커피를 좋아하거든요. 영화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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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감독님들이 예술가적인 자의식이 강하다 보니 약간 고지식한 분들이 많아요. 가령 다른 일을 해본다고 하는 것은 거의 꿈도 못 꾸고, 심지어 어떤 분들은 언제 영화에 들어갈지 모르기 때문에 학교에서 강의도 안 맡으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 고집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감독님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게 건강하다고 느끼기도 하거든요.
이철하
정곡을 딱 찌르셨네요. 저도 영화를 시작한 초반에는 지금 말씀하신 그런 감독이었어요. 고집이 굉장히 강했거든요. 빵 가게를 시작했는데 주변에서 ‘영화를 그만두는 거 아니냐’는 질문도 많이 했어요. 창피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서 저의 스킬을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씨네플레이
현재 한국 영화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이철하
지금은 영상업계 전체가 위기인 것 같아요. 특히 저는 한국 영화계가 후배 양성에 소홀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우리가 과연 그동안에 잘하는 후배들, 잘하는 학생들을 영상업계로 얼마나 이끌어줬는지를 돌아보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신인 감독들이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독려해 주는 게 한국 영화의 미래를 위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씨네플레이
그러면 이제 영화계로 입문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자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철하
저는 두려움을 다 잊고 그냥 달려들었으면 좋겠어요. 위험성도 있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주는 직업이잖아요. 저는 영화가 굉장히 행복한 공동체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만약에 그것이 매력으로 느껴진다면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