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2024년을 힘차게 열며, 네이버 영화 콘텐츠 공식 파트너사인 ‘씨네플레이’와 ‘한국영화감독조합’(DGK)이 함께 진행한 영화감독 인터뷰 시리즈 <한국영화, 감독>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매주 씨네플레이 네이버TV(tv.naver.com/cineplay)와 네이버 연예면 메인 ‘최신 영화 소식’을 통해,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한 감독당 1부와 2부로 나누어 우선 공개된 뒤, 씨네플레이 유튜브에서 그 다음 주 월요일에 1부와 2부를 묶은 합본 영상 1편이 공개됩니다. 그중에서도 매번 씨네플레이의 두 명의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감독들이 장편 데뷔작을 내놓기까지의 이야기만을 담은 ‘데뷔의 순간’은 글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항주니’가 영화감독의 꿈을 꾸고, 대학에 들어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 뒤 영화사와 방송국을 오가면서도 그 감독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드디어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2002)를 만들기까지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진행: 씨네플레이 주성철 편집장, 이화정 객원기자)

씨네플레이
네이버 영화 콘텐츠 공식 파트너사인 씨네플레이가 드디어 한국영화감독조합과 ‘한국영화, 감독’이라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그 첫 번째 손님으로 바로 장항준 감독님을 모셨습니다.
장항준
안녕하십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본업이 영화감독인 장항준입니다.(웃음) 나이가 들면서, 내가 언제까지 내가 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거죠. 야구로 치면 바로 지금이 나의 9회인지, 아니면 5회인지 알 수가 없어요. 내가 끊임없이 더 노력해서 지금이 중반전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9회는 아직 저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타석에 들어서야죠. 그렇게 언제나 ‘플레이 항준’으로 9회가 언제 올지 모르는 채로 한방 터트려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죠.
씨네플레이
오래전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조합 소속 감독들의 데뷔 직전 청춘의 이야기만 담은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을 낸 적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도 장항준 감독님께 그 이야기를 청하고 싶습니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나오셨으니 일단 비슷하게 전공도 하셨고, 데뷔 이전 방송 작가 및 시나리오 작가 생활도 하셨는데요, 언제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는지 궁금합니다.
장항준
고등학교 2학년 때 장래희망을 써내라는 거예요. 아무튼 옛날에는 학교에서 무조건 써내라고 했어요.(웃음) 변호사, 판사, 의사, 대통령이 많았고 공부도 더럽게 못하는 애들도 일단 과학자라 써내기도 했죠. 노벨상이 직업이 아닌데 그냥 ‘노벨상’이라고만 쓴 친구도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왜 그랬는지 지금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감독’이라고 썼던 것 같아요. 내가 뭘 하면 가장 재밌고 행복할까, 생각해 봤더니 ‘영화’인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입시의 계절이 왔고 원서를 써야 했죠. 지금은 연극영화과나 영화과가 전국 대학에 엄청나게 많지만 그때는 5개인가 6개 정도밖에 없었어요. 일대일 대결도 못 이기는 내가 수십 대 일을 뚫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또 당시만 해도 성인영화들이 범람하면서 한국영화를 ‘방화’라고 부르던 시절이어서,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집안 어른들이 굉장히 안 좋아했죠. 그래서 그냥 일반적인 학과로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토요일에 모의고사가 끝나고 한 친구가 종로경찰서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가 받아온 영화 초대권을 보여주면서 영화 보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허리우드 극장’에 가서 <썸머 스토리>(1988)라는 영국 영화를 봤어요. 영국 전원의 아름다운 여름 풍경을 배경으로 도시 청년과 시골 처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그린 정통 멜로 영화인데, 나도 저런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 솟구쳐 오르는 거예요. 그렇게 토요일에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그때는 지하철 노선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고 버스 전용 차선이라는 것도 없고 주 5일 근무제를 하던 때도 아니었으니 정말 토요일은 교통지옥이었죠. 사실상 버스는 길에 서 있는 수준이었는데 당시 명동 중앙극장 앞에서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데 이 중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시간도 많으니까 한 번 세어보자 하는 생각에 세어봤어요. 어차피 버스도 서 있겠다, 그냥 내 ‘감’을 기준으로 삼아서 세어 봤는데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하는 길로 가도 인생을 조질 놈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인생을 조질 놈이니, 기왕이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인생을 조지자, 그렇게 결론을 냈죠.(웃음) 그래서 나중에 내가 버스에서 먼저 내리면서 그 친구한테 그 초대권을 달라고 했어요. 오늘의 결정으로 내 인생이 바뀌게 된다면 그게 ‘내 인생의 티켓’이 될 테니 갖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서울예대에 진학하게 됐어요. 그 티켓은 지금도 집에 고이 가지고 있답니다.

씨네플레이
학과 자체는 영화과가 아니라 연극과였어요. 학교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또 공부를 하셨나요.
장항준
연출도 있고 작가도 있고 여러 방향이 있는데, 일단 저는 연극과에 연극 연출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배우를 하게 됐고 4학기 내내 배우만 했어요.(웃음) 그래서 영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만의 시간표를 따로 만들었어요. 공강 시간이 없게끔 시나리오 작법이나 영화 연출은 물론이고 제작 실습 강의까지 들었죠. 제작 실습을 들으려고 거의 매일 아침에 한 9시쯤 학교에 갔고, 마지막 극작과 수업까지 끝나면 밤 10시 반이었어요. 그렇게 들을 때는 앉아서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었죠. 당시 서울예대는 2년제였잖아요. 신입생 아니면 졸업생이야.(웃음) 그렇게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거죠. 힘들게 합격했고 신이 내게 2년의 기회를 줬는데,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내 인생에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열심히 했어요. 어쩌다 공강 시간이 나면 학교 영상자료실에 갔고 또 학교 건너편에 당시 영화진흥공사가 있었어요, 거기 가서 영화도 봤죠. 휴일에는 일본문화원에 갔고요.
씨네플레이
대학생 항준이는 예상과 달리 진짜 바쁘게 살았네요. 그때 눈에 들어온 감독은 누구였나요.
장항준
맞아요, 다시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짜 바쁜 항준, busy 항준이었죠.(웃음) 그때 좋아했던 감독은 우디 앨런과 에밀 쿠스트리차였어요. 특히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1993)을 정말 좋아했고 그 뒤에 <언더그라운드>(1996),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1999)도 좋았죠.

씨네플레이
그리고 사실 그때는 또 요즘처럼 어떤 공모전 같은 것도 많지 않아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미래를 어떻게 좀 꿈꾸셨는지도 참 궁금해요
장항준
그렇죠, 그때는 진짜 너무 막연했죠.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청강을 많이 했던 영화과의 고 강한섭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웬일이냐고 그러시길래 “교수님 이제 제가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정말 너무 영화가 하고 싶은데 영화 쪽에 끈이 없어서, 어떤 작품의 어떤 포지션이라도 좋고 돈을 안 받아도 좋으니 부디 영화 일을 할 수 있게끔 좀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이게 무슨 자격증이 있는 학과도 아니고 이거 말고는 아무런 길이 없으니 절박했죠. 그때는 정말 영화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전화번호 적어놓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그냥 집에서 하루종일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며칠째 전화가 없어서 다시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아 맞어, 장항준 학생, 알겠어 알겠어, 여기 전화번호 적어놓고 가” 또 그러시더라고요.(웃음) 역시 전화는 안 왔죠. 영화과에서도 1년에 80명씩 졸업하고 그들도 다 소개시켜주기 힘든데, 하물며 청강생 신분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겠죠. 그런데 제가 워낙 영화과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해서 사모님하고 좀 친분이 있었어요. 조교님한테 사모님이 일하시는 곳의 주소를 받아가지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간 적 있어요. 당연히 깜짝 놀라셨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막 웃으면서 전화번호 써놓고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다음날 진짜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항준 학생, 우리 마누라를 찾아갔나요?” 그러시기에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다음 말이 뭐가 나올지 너무 긴장되는데 “받아 적어” 하시더라고요. 당시 ‘모가드코리아’라는 영화사가 있었는데, 자기가 얘기를 해놨으니 몇 층의 누구를 찾아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영화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됐죠.
씨네플레이
사실 감독님의 그런 적극성에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힘들게 시작한 영화사 일은 어땠나요.
장항준
출근해서 청소하고, 촬영 현장에 나가서 차량 통제하고 소품 나르면서 고생하는데, 그게 너무 즐거운 거죠.(웃음) 촬영이 시작된 지 보름 정도 지난 영화였는데, 객원 연출부처럼 들어가게 됐죠. 형들과 같이 다니면서 밥도 먹고 방도 같이 쓰고, 다음에 다른 영화에서도 만나자 그러면서 잘 지냈는데 회사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첫 직장이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죠. 이제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극작과 청강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형이 생각났어요. 그 형이 방송작가가 됐다는 소식을 들어서 한 번 만나자고 했죠. 그렇게 방송국 FD(Floor Director)로 들어가게 된 거죠. 한번은 일을 하다가 한 방송작가분이 잠수를 타고 원고 펑크를 낸 적 있어요. 난리가 났죠. 당시 저는 항상 회의가 끝나면 그 내용을 토대로 대본을 썼거든요. 누가 시킨 게 아니고 왠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늘 집에 돌아가면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게 딱 도움이 된 거예요. 당장 촬영을 시작해야 되는데 구체적인 대본이 없는 상태에서, 당시 AD(Assistant Director)였던 김병욱 형에게 “제가 집에서 써본 게 있는데 가져와 볼까요?” 했더니 그러라고 하시더라고요. 바로 그 대본으로 촬영을 할 수 있었고 얼마 뒤에 저는 방송작가가 됐죠.(웃음)

씨네플레이
학교 진학에서부터 청강 수업, 그리고 영화사에서 방송국에 이르는 그 과정이 한 편의 영화 같네요. 그렇게 시작한 방송작가 일로 굉장히 잘나가셨던 걸로 압니다. 그러다 어떻게 다시 영화 일로 돌아가게 됐는지도 궁금해요.
장항준
다행히도 방송작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제가 맡았던 프로그램이 엄청나게 히트를 쳤어요. 당시 「쎄씨」같은 청소년 잡지나 「경향신문」같은 데서도 저를 인터뷰했죠. 그러니까 제가 신문에 실린 거예요. 그걸 당시 모가드코리아에 있던 실장님이 보시고 전화를 주셨어요. 일요일에 집에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딱 알겠더라고요. 반가워서 “실장님!” 그랬더니 “이 새끼야, 이제 사장이야” 그러더라고요.(웃음) 신문 잘 봤다면서 “지금도 시나리오 쓰고 싶냐?” 그러시길래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니 어디로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갔더니 정말 영화사가 있었어요. 그 형, 아니 사장님이 “넌 영화로는 아직 신인이라 돈은 별로 못 줘. 일단 한 번 시켜보는 거야” 하면서 준비하고 있는 영화 얘기를 들려주시더라고요. 여자가 집을 나가서 남편이 찾아오는 내용이고, 그 둘은 다시 잘 살면서 해피엔딩으로 잘 끝나는 이야기라고 했어요. 그래서 집에 가서 쓰기 시작하는데 내가 봐도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집 나간 아내를 남편이 찾으러 나갔는데, 아무리 써도 스릴러가 되는 거죠.(웃음) 두 사람의 갈등이 해결이 안 됐는데 어떻게 잘 살지? 하는 생각에 흥신소 직원을 주인공으로 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어요. 사장님께 드렸더니 “야, 넌 쓰라는 거 안 쓰고 이상한 걸 써 왔어? 그런데 사무실 직원들이 다 재밌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저의 시나리오 작가 데뷔작 <박봉곤 가출사건>(1996)이 나오게 된 거죠.
씨네플레이
1996년 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이었던 <박봉곤 가출사건>의 초보 작가가 무려 27년 뒤인 2023년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항주니의 밤’이라는 행사를 열게 될 거라는 건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것 같아요.(웃음)
장항준
그렇죠.(웃음)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돈을 정말 잘 벌었어요. 케이블TV라는 것도 막 생겨서 회의만 하고 가도 한 달에 얼마를 주겠다는 제안도 꽤 있었고요. 그런데 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영화가 압도적으로 좋았어요. 그리고 저 멀리 푸른 벌판이 보이는데 그보다는 거친 땅일수록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 높죠.(웃음) 사실 그때만 해도 영화라는 게 그다지 매력적인 업계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영화가 좋았어요. 그리고 방송국 일과 영화 일을 잠깐이나마 병행해서 하다 보니까 확실히 ‘영화는 감독의 것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온전한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더 강해졌어요. 그래서 당시 일종의 ‘절필 선언’같은 걸 했죠. 더 이상 방송 일 받지 않고 내 데뷔작을 쓰고야 말겠다는 결심이었죠. 당연히 그와 동시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수입이 정말 빵원이 됐어요.(웃음) 마침 그때가 결혼 직후였어요. 당시 우리 어머니가 아내인 김은희 작가에게 결혼 전에 했던 얘기가 있어요. 우리 아들 사주를 봤는데 항준이가 너무 사주가 좋아서 결혼 후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나게 큰 재물운이 생긴다고 했대요. 김은희 작가는 그 재물운이 언제 생기나 하면서 계속 참고 기다렸는데, 20년 정도 지나고 보니 남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재물운이었다는 걸 알게 됐죠.(웃음)

씨네플레이
<박봉곤 가출사건>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서 굉장히 승승장구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작품 자체는 굉장히 좋았는데 당시 분위기로만 놓고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이긴 했죠. 그래서 그런지 장편 데뷔까지 시간이 좀 더 걸렸어요.
장항준
개인적으로도 쓰고 여기저기서 의뢰받은 것들도 쓰고 있었는데, 당시 썼던 시나리오들도 다 좀 이상해요. 일단 제목이 다 이상해.(웃음) <뛰다가 생각이 나면>이라는 작품도 있었고 <중간 보스의 고민>도 있었어요. 김은희 작가가 지금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뛰다가 생각이 나면>은 거의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에는 안 됐죠. 아무튼 그런 고난의 시간을 또 보내다가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했던 시네마서비스의 이관수 PD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항준아, 너 어떻게 돼가냐?” 하고 물으시길래 “형, 어제 엎어졌어요” 그랬죠. 감독 지망생의 하루 일상이 늘 초조와 불안이었어요. 결과는 늘 ‘엎어짐’이었죠. 그런데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는데 네가 감독을 해보면 어때?”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받은 게 <라이터를 켜라>(2002) 시나리오였어요. 딱 봐도 많이 고쳐야 하는 시나리오였어요. 그런데 하도 엎어지니까 그러든 말든 일단 계약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돈이 없었거든요.(웃음) 시나리오 수정을 위해 초고 작가인 박정우 작가랑 만나야 했어요.
씨네플레이
당시 충무로에서 코미디 감각을 갖춘 ‘글빨’로는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만남이었네요.
장항준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2001) 시나리오를 쓰면서 당시 잘나가던 박정우 작가는 저와 동갑이고, 이전부터 여기저기서 스치듯 본 적은 있죠. 솔직히 ‘네가 뭘 그렇게 잘 났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웃음) 아무튼 만나서 여기 고치고 저기 고치고 이런 것도 저런 것도 고쳐야 한다고 얘기했죠. 어쨌건 내가 감독이니까 분명히 얘기했어요. 그런데 박정우 작가가 별 반응이 없으니까 이관수 PD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서로 내가 고쳐야 한다고 막 싸웠죠. 급기야 박정우 작가는 “내 허락 없이는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속으로 ‘김수현 났네, 김수현 났어’라고 생각하다가,(웃음) 마지막까지 둘 다 고집을 안 꺾으니까 결국 이관수 PD가 같은 시나리오를 들고 다른 호텔방을 잡아줬어요. 결론이 안 나니까 일단 그렇게 한 거예요. 솔직히 저는 내가 감독이니까 나중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 바꿔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죠. 그렇게 박정우 작가와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친한 친구가 됐어요. 물론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정우가 각본상을 받았는데, 저는 신인감독상 후보에만 오르고 상은 못 받아서 빈정이 상했지만요.(웃음)

씨네플레이
그런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라이터를 켜라>가 시작됐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코미디 장르 안에서도 굉장히 스피디하고 새로운 감각이 돋보이는 코미디 영화였습니다.
장항준
놀라운 건, 진짜 영화가 들어가는 거예요. 솔직히 쉬운 영화가 아니었거든요.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열차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니까 마지막까지 제작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죠. 하지만 당시 시네마서비스의 수장이었던 강우석 감독님의 감각 덕분이었다고 봐요. 한국영화 최초의 천만 영화인 <실미도>(2003)를 비롯해 여러 흥행작을 연출하셨고 제작 및 투자자로서도 이창동 감독님의 데뷔작 <초록 물고기>(1997), 새로운 공포영화 붐을 일으킨 <여고괴담>(1998),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2007) 등 한국영화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셨죠. 아무튼 전 술자리에 강우석 감독님만 계시면 늘 옆자리에 앉아서 아부를 떨었어요. “감독님, 전 감독님이 너무 좋아요. 감독님이 일인자시잖아요. 저 좀 밀어주세요” 그러면서.(웃음)
씨네플레이
그처럼 믿기지 않게 시작된 영화 <라이터를 켜라> 첫 촬영 날 기억은 어떠신가요?
장항준
지금도 생각나요. 창신동의 한 낡은 골목길에서 첫 촬영을 했는데, 그때 워낙 친하게 지냈던 윤종신 씨가 제 뒤에 있었거든요. 영화음악을 맡기도 했고요. 아무튼 그를 비롯해 김은희 작가와 앞서 엎어졌던 영화의 연출부들까지 다 와서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레디, 액션! 하니까 뒤에서 윤종신이 “눈물 난다, 눈물 나” 그러는 거예요.(웃음) 첫 촬영 떠올리면 그게 가장 기억나요. 돌이켜보면 <라이터를 켜라>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님의 힘과 역할이 대단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당시 한국 대중 상업영화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던 분이셨죠. 제가 최고 권력자에 대한 리스펙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술자리에서 강우석 감독님 옆에 앉았어요. 조선시대의 간신들처럼.(웃음) “감독님~ 저는 감독님이 너무 좋아요” 그러면 “야, 너 또 왜 그래?” 그러시고, 그럼 나는 또 “감독님이 일인자라서 좋아요. 절 밀어주세요” 그러면서 아부 떨었죠.

씨네플레이
데뷔작 이후 곧장 <불어라 봄바람>(2003)이라는 두 번째 장편을 만드셨는데, 이후 <끝까지 간다>(2014) 각색과 드라마 <싸인>(2011) 집필을 비롯해 여러 편의 단역 출연 정도를 제외하면 <기억의 밤>(2017)까지 사실상 굉장히 긴 시간 영화감독으로서의 연출 기회를 갖지 못하셨죠.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적당히 익숙한 것과 별개로 거의 15년 동안 영화감독이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데뷔작을 만들지 못할 때의 고통만큼이나 남모르는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장항준
사실 <기억의 밤> 직전까지 굉장한 슬럼프였어요. 약간 무기력증도 있었어요. 그러다 장원석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솔직히 저는 장원석 대표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박봉곤 가출 사건> 때 대학교에 다니던 제작부 막내였고, 나중에 <왕의 남자>(2005) 제작실장을 거치면서 정말 왕성하게 활동했죠. 친구로서도 동료로서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장원석, 윤종신, 김은희 작가를 비롯해 몇 명 지금도 계속 만나는 모임이 하나 있는데 그때도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희박해 보이는 사람이 김은희 작가랑 장원석이었거든요.(웃음) 그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 참 속단하기 힘든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기억의 밤>은 장원석 대표가 나를 잘 알고 있으니까 믿어준 면이 크죠. 그리고 제가 <싸인>(2011)이라는 드라마의 각본을 즐겁게 썼던 것도 잘 알고요.
씨네플레이
오늘 인터뷰에서 놀라는 것 중 하나는, 그동안 장항준이라는 감독을 굉장히 오해하고 있었구나, 하는 점입니다. 왜 그런 거에 놀라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일단 굉장히 열심히 사셨고(웃음), 상상 이상으로 주도면밀하고 극강의 적응력을 갖추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썸머 스토리>라는 멜로영화부터 <기억의 밤>이라는 스릴러까지, 취향의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어요.
장항준
살면서 주도면밀한 인간이라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웃음), 아무튼 여러분의 예상과 달리 열심히 살아온 인간인 건 확실합니다. 사실 요즘 영화계가 어렵다는 얘기가 많이 나올 때, 그걸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늘 영화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드라마에도 도전해보고 하는 적응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찌 보면 기후로 치자면 사계절과 몬순, 아열대와 혹한 그런 것들을 다 포괄하는 내구성이랄까. 성능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남극에서도 달릴 수 있고 적도에서도 달릴 수 있는 그런 차의 쓰임새가 큰 것 같아요.

씨네플레이
장항준 감독님은 대한민국 영화 역사 전체로 봐도, 정말 처음 보는 유형의 감독인 것 같긴 해요. 예전에는 ‘인기 감독’이라고 하면 주로 시사나 교양 쪽이었지 ‘예능’은 아니었거든요.(웃음) 자신의 그런 포지션에 대해 스스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장항준
솔직히 장원석 대표는 예전부터 저한테 예능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충무로에서 저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냐면, 영화보다 예능을 좋아해서 감독을 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진짜 예능을 딱 끊었던 적도 있어요. 근데 참 그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해요. 일단 방송을 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죠. 그리고 내 속에는 그런 반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령 옛날에 저희 어렸을 때는 언제나 듣는 얘기가 ‘남자는 묵직해야 한다, 진중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저는 뭐 입만 살아 가지고.(웃음) 학교에서도 칠판에는 늘 ‘떠든 사람’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었죠. 아무튼 영화감독이 그런 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게 대중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다는 게 요지였어요.
씨네플레이
영화감독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임권택 감독님이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이른바 ‘국민감독’이라는 칭호로 불리셨을 때, 그게 한때 ‘딴따라’라 불리던 ‘영화’의 국민적 인식 자체를 높였다고 봐요. 그래서 장항준 감독이라는 사람이 방송에 많이 나오는 게, 막연하게 영화를 동경하거나 영화계라는 곳에서 일해보고 싶거나 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봅니다. 물론 그러다 보니 감독님의 최근작 <리바운드>(2023)의 경우 직접 예능 프로그램인 MBC ‘전참시’(전지적 참견 시점), SBS ‘미우새’(미운 우리 새끼)에도 출연하셔서 홍보에 열심히셨는데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이 충격적이긴 했어요.
장항준
솔직히 개봉하고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니까 할 수 있는 얘기인데, <리바운드> 흥행 결과에 좀 충격을 받긴 했어요. 물론 주변에서는 “네가 김지운도 이기고, 김용화도 이겼어”라고(웃음) 얘기해주긴 하지만(김지운의 <거미집> 31만, 김용화의 <더 문> 51만에 비해 <리바운드>는 69만 관객), 사실 굉장히 슬픈 얘기죠. 이제는 박스오피스 오프닝 스코어가 시간대 별로 바로 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영화를 시작하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성적표인 거예요. 심지어 개봉 첫 날 비도 왔는데, 이제 와 얘기하는 거지만 진짜 절망적이었어요. 홍보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했죠. 제작자나 투자자가 뭐라고 해도 이 영화가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했고, 그걸 믿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거든요. 그런데 내가 틀린 건가, 이제 어떤 기준을 믿어야 하지? 하는 걸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됐어요. 사실 그전에 제작자인 장원석 대표가 개봉하기 한 반 년 전에, 관심을 보이는 OTT가 있다며 거기로 가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그때 상황이 너무 안 좋았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선원들이 가득 탄 이 범선이 저 대양의 보물섬을 찾아 이제 막 항구를 떠나기 직전인데 그 배에서 내리자고? 그냥 지켜만 보자고? 그건 우리가 원했던 삶이 아니잖아. 망해도 바다에 나가서 망하자” 뭐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약간 정색해서 그런 얘기를 하니까 장원석 대표도 그냥 해본 소리라고 하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흥행이 그렇게 되고 보니, 그때 내가 정색하며 내렸던 결정이 과연 옳았던 걸까, 하고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아무튼 요즘 정말 생각이 많습니다.(웃음)

씨네플레이
씨네플레이와 한국영화감독조합이 함께 시작한 ‘한국영화, 감독’ 인터뷰의 첫 번째 손님인 장항준 감독님을 보내드려야 할 텐데요. 오늘의 대화 정말 즐거웠습니다. 마지막 인사 말씀 부탁드릴게요.
장항준
영화계뿐만 아니라 요즘 좀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시기입니다. 어쨌건 제가 인생의 절반 넘게 살아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행복’이란 게 진짜 중요하다. 돈과 명예는 수단일 뿐이고 내가 편하고 행복해야 내 가족과 친구들 모두 편하고 행복해진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 행복이라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잊지 말자고 생각해요. 그걸 2024년 새해의 목표로 삼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빙하기를 겪고 있는 우리 영화인들도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면 녹슨 기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영화인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 하는 걸 보여주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