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눈의 청년이 시공을 초월해 우리를 응시한다. 그 위에 걸린 영화 <스텔라> 포스터 속 '타락의 해부학'이라는 헤드라인이 의미심장하다. 정면을 향하는 눈은 지금 관객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생존을 위해 당신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나?", "타락한 나를 쉽게 비난할 수 있는가?".
이것은 곧 감독의 질문이기도 하다. 민감한 사회, 정치적 이슈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시대의 민낯을 고발해온 킬리안 리드호퍼 감독은 20년 전, '금발의 유령'이란 제목의 기사를 읽고 스텔라 골드슐락의 기막힌 인생사에 매료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념에 사로잡힌 감독은 이 질문을 현대의 관객에게 정면으로 던지기로 결심한다. 반대와 우려가 따랐다. 왜곡이나 미화 없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전달해야만 했다. 감독은 방대한 역사적 자료와 관계자들의 자문을 모아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한다. 그렇게 생존과 타락을 오간 스텔라, 역사의 피해자이자 민족의 가해자였던 스텔라, 미국 진출을 꿈꾸던 촉망받는 재즈 가수에서 신분증 위조 브로커, 나치의 비밀 요원으로 전락한 유대인 '스텔라 골드슐락'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치밀한 해부학이 우리를 찾아왔다.
가수 지망생인 평범한 여성에게 닥친 비극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독일. 반짝이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노래를 시작한다. 백댄서가 분위기를 띄우고 브라스 밴드의 연주는 장내를 가득 채운다.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몸을 들썩이더니 이내 환호와 휘파람을 보낸다. 인생, 이름 따라간다 했던가. 스텔라(폴라 비어)는 무대 중앙에서 별처럼 빛난다. 꿈에 그리던 브로드웨이 매니저가 명함을 건넬 정도로 인상적인 무대였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밴드 친구들의 가족들이 하나둘 끌려가고 홀로코스트가 움트기 직전임을 감각하지만 오늘만큼은 예술은 삶의 찌꺼기가 아닌 본질이라고 외치며 젊은이들은 기세 좋게 샴페인을 터뜨린다. 이제 사랑하는 연인과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광기의 시대, 희망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폭주하는 이민 수요로 미국 비자 발급이 좌절되고, 홀로코스트의 광풍에 휘말려 꿈을 펼치기도 전에 스텔라는 어두운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3년 후, 카메라가 그녀를 발견한 곳은 군수 공장이다.
폭력과 죽음 앞에서 선택의 기로

1943년 2월. 화려한 조명 아래 무대를 장악하던 스텔라는 이제 어두침침한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자신감으로 반짝이던 만면의 생기는 빛을 잃고, 그의 영혼은 어두운 소문들과 죽음의 공포에 잠식당한다. 공장에 들이닥친 독일군들이 유대인을 무분별 사살하고, 강제 연행해가는 것을 지켜본 후 스텔라는 살아남기 위해 위험한 시도에 나서기 시작한다.
나치의 눈을 피해 숨어살던 그는 답답함을 견디다 못해 유대인 배지를 달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는 겁 없는 행동도 한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스텔라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외모와는 동떨어진 덕에 나치의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롤프(야니스 니에브외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를 도와 신분증 위조 브로커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밴드 동료였던 잉게의 밀고로 5개월 만에 게슈타포에 붙잡혀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수감생활 중 치과를 방문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하지만, 곧 다시 가족 전체가 체포되는 수난을 겪는다.
스텔라는 인생 최초의 구타에서 너무나 생경해 심오한 경이로움마저 불러일으키는 폭력의 잔혹함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선택해야 한다. 폭력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갈 것이냐 아니면 베를린에 숨어 있는 유대인들을 고발할 것이냐.
시대의 광기에 휩쓸려 말살된 인간성,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결국 스텔라는 유대인 비밀 요원이 돼 동포들을 색출하는데 앞장선다. 요원이 되면 유대인임에도 나치 독일 장교와 어울리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동포를 체포해 실적을 올리면 수당도 받는다. 함께 음악을 한 동료, 그들의 친구나 가족, 딱 한 번 얼굴을 본 게 전부인 지인 등 스텔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타깃이 된다. 갓난쟁이 아이가 있는 지인까지 밀고하며 결국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실제 스텔라의 밀고로 적게는 600명, 많게는 3,000명의 유대인이 수용소로 사라졌다고. 끝날 것 같지 않던 나치 패망이 찾아와 스텔라의 죄를 심판할 날이 오면 관객은 윤리적 역설에 빠진다. 스텔라는 생의 의지가 남달랐던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나, 수백 명의 동포를 사지로 내몬 잔악한 부역자였나. 인간은 선과 악으로 양단할 수 없는 모순적 존재라는 뻔한 답에서 영화는 한 단계 더 나아가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생환자 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며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하며,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말한다. 과거의 전쟁에 현대인들은 책임이 없다. 다만 재발 방지의 책무는 지닌다. 두 번 다시 수용소라는 사유를, 논리적 귀결을 허용해선 안된다. 과거의 아픔을 불길한 경종으로 가슴에 품고 경계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영화를 구원하는 건, 파올라 베어의 입체적 연기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운디네>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며 산드라 휠러, 니나 호스를 잇는 독일의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한 폴라 비어는 캐릭터의 모호함, 금발 곱슬머리와 어린애 같은 눈 뒤에 숨어 있는 나르시시즘, 추방과 죄책감으로 얼룩진 삶의 비극을 온몸으로 연기한다. 피해자이자 사형집행인이고, 팜므 파탈이자 옆집 소녀의 얼굴을 한 폴라 비어의 스텔라는 선악의 판단을 모호하게 해 영화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스텔라의 마지막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종전 후 숨어 지내던 그는 1945년 체포돼 10년간 복역했으며, 베를린에서 열린 2차 재판에서도 유죄를 선고받지만, 가중 처벌하지 않는다는 판결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고 1994년, 평생을 짓눌러온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72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동포를 팔아 지키려 했던 그녀의 부모도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