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즘의 나는 <백엔의 사랑>(2014)의 이치코 같다. 이치코는 대학 졸업 뒤에도 쭉 백수로 지내며 부모에게 얹혀 살고 있는 중인 ‘모솔’이다.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내 집 마련의 꿈도 죄다 포기한 ‘N포세대’다. 나는 백수가 아니고, 독립했고, 연애도, 내 집 마련의 꿈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치코와 나는 매사 의욕이 없는 것이 비슷하다. 의욕은 왜 없는가.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한들 내게 장밋빛 미래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면전에 ‘노오력’ 같은 X소리를 하면 따귀를 때리고 싶다. 너나 하세요, 노력.) 연애는 해도 결혼은 안(못?) 한다. 당연히 출산도 없다. 그저 빚이나 안 지고 살면 다행인 삶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지언정 소소한 즐거움 정도는 허락될 것이다. 이십대에 번 월급을 죄다 먹고 노는 데 쏟아 부은 이유다. 아무튼 가족과 홧김에 싸우고 나와 살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잇는 이치코는 뜬금없이 권투를 시작한다. 목적 없이 시작했기에 부담 없이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운동은 왕도가 없어서 그냥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새 꽤 잘하게 된다. 특기가 생긴다는 건 특별한 나만의 기술이 생긴다는 거다. 이치코는 ‘나도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슬쩍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생활에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겨서 몇 달 전 나는 회사 건물 운동센터에 회원 등록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이라도 안 하면 큰 병을 얻게 될 것 같았다. (강제로 P.T를 시작한 나에게 리스펙트.) 시작할 무렵엔 너무 힘들어서 운동하다 말고 반쯤 정신을 놓곤 했는데 요즘은 운동 마치고 난 뒤에 갓 태어난 기린처럼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기분이 좋다. 포털사이트에 ‘심하게 운동을 하면 근육이 파열될 수 있나요?’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면 걸을 수 없나요?’ 따위를 검색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신생아 수준의 근육량을 가졌던 내가 최근엔 레그프레스를 할 때 내 몸무게 이상의 중량을 칠 수도 있게 되었다. 자의로 무언가를 이뤄간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은 소중하다. 권투를 잘하게 된 뒤에도 이치코의 삶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지만 이치코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 인생에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나는 하루하루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간다. 여러 현실적인 부침이 있지만 어쨌든 살 만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