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에디터의 집.

1.
예상치 못하게 에디터칼럼의 순서가 돌아왔다. 오후엔 글을 완성해야 하기에 영화라는 키워드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급히 고민을 시작한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부동산이라 영화로 할 말이 크게 없다. 나도 은행에 아파트 대출금으로 월 몇십, 몇백씩 바치는 하우스푸어가 되어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가가 생기겠지. 그게 30년 뒤라도. 현실은 그냥 학자금 갚는 중이다. 완납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전셋집의 꿈을 꾸어본다. 아마도 <>(2015)에서 조이와 잭이 사는 방이 지금 내가 사는 월셋방과 비슷한 크기인 것 같다. (물론 조이와 잭을 나와 비교하는 건 아니다. 실화이기에 농담하기조차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영화는 영화니까 그냥 영화로 생각하겠다.) 싱크대와 변기의 몹시 가까운 거리가 내가 사는 집과도 비슷하다. 내가 사는 집은 그 사이에 문이 있긴 하다. 조이와 잭이 천장에 붙은 유리창을 보며 탈출을 꿈꿨듯 나는 휴일이면 벽면을 꽉 채운 커다란 창문을 닦으며 언제쯤 전세로 옮길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조이에게 그랬듯 창문은 이 집에서 나의 유일한 낙이다. 창을 바라보며 앉아 있으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는데 그 때 기분이 몹시 좋다. <>의 후반부는 조이의 트라우마 극복기를 그리고 있지만 어쨌건 해피엔딩이다. 과거보다 나아진 현재라면 틀림없이 해피엔딩인 것이다. 자유와 안식을 찾은 조이를 보며 은근한 낙관을 가져본다.


<그녀>
오늘 아침의 내 컴퓨터 상황. 내가 찍은 사진은 아니고 구글에서 검색했다.

2.
회사 컴퓨터가 미쳤다. 문서는 무작위로 글자의 앞뒤가 바뀐 채로 저장되고, 무선마우스는 아침마다 USB를 다시 꽂아줘야 작동한다. 오늘 아침에는 나 몰래 무슨 시스템 업데이트를 한 건지 부팅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길고도 긴 주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보니 드디어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자유의지라도 갖춘 듯 점점 사용자인 내 뜻과 다르게 움직이는 컴퓨터를 보며 <그녀>(2013)의 사만다를 떠올린다. 언젠가 이 컴퓨터도 갑자기 내 뒤통수를 치진 않을까 걱정하며 습관적으로 저장을 누르고 USB에 중요 문서를 백업한다. (지금 저장을 한 번 더 눌렀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사랑하고 신뢰했지만 나는 언제까지 쓰게 될지도 모르는 이 컴퓨터를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생 첫 듀얼모니터가 나의 디지털 생활을 몹시 풍요롭게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a.k.a. 신세계). 위에 썼다시피 집이 몹시 좁아 자취 10년째 노트북만 쓰고 있는 나로서는 회사에서라도 듀얼모니터를 쓰는 것이 아주 행복하다. 내가 사는 집의 해 잘 드는 커다란 창 하나가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의 좁은 집을 견딜 수 있게 하듯 문서내용 무작위 저장의 공포와 두 시간 부팅의 불편함은 듀얼모니터의 축복으로 상쇄가 된다. (문득 두려움이 밀려와 저장을 한 번 더 눌렀다.) 차분히 생각해보니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가려 한다. 인간 여자처럼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않고, 숙련된 대화 기술과 센스로 풍요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데다 업무와 생활의 여러 편리함까지 나서서 제공해주는 사만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고작 듀얼모니터 하나로 이렇게 행복함을 느끼는 쉬운 인간인데.


<백엔의 사랑>
'의욕적으로' 구입하였으나 뱃살이 부끄러워 두 번밖에 입지 못한 운동복.

3.
요즘의 나는 <백엔의 사랑>(2014)의 이치코 같다. 이치코는 대학 졸업 뒤에도 쭉 백수로 지내며 부모에게 얹혀 살고 있는 중인 모솔이다.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내 집 마련의 꿈도 죄다 포기한 ‘N포세대. 나는 백수가 아니고, 독립했고, 연애도, 내 집 마련의 꿈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치코와 나는 매사 의욕이 없는 것이 비슷하다. 의욕은 왜 없는가.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한들 내게 장밋빛 미래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면전에 노오력같은 X소리를 하면 따귀를 때리고 싶다. 너나 하세요, 노력.) 연애는 해도 결혼은 안(?) 한다. 당연히 출산도 없다. 그저 빚이나 안 지고 살면 다행인 삶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지언정 소소한 즐거움 정도는 허락될 것이다. 이십대에 번 월급을 죄다 먹고 노는 데 쏟아 부은 이유다. 아무튼 가족과 홧김에 싸우고 나와 살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잇는 이치코는 뜬금없이 권투를 시작한다. 목적 없이 시작했기에 부담 없이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운동은 왕도가 없어서 그냥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새 꽤 잘하게 된다. 특기가 생긴다는 건 특별한 나만의 기술이 생긴다는 거다. 이치코는 나도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슬쩍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생활에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겨서 몇 달 전 나는 회사 건물 운동센터에 회원 등록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이라도 안 하면 큰 병을 얻게 될 것 같았다. (강제로 P.T를 시작한 나에게 리스펙트.) 시작할 무렵엔 너무 힘들어서 운동하다 말고 반쯤 정신을 놓곤 했는데 요즘은 운동 마치고 난 뒤에 갓 태어난 기린처럼 팔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기분이 좋다. 포털사이트에 심하게 운동을 하면 근육이 파열될 수 있나요?’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면 걸을 수 없나요?’ 따위를 검색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신생아 수준의 근육량을 가졌던 내가 최근엔 레그프레스를 할 때 내 몸무게 이상의 중량을 칠 수도 있게 되었다. 자의로 무언가를 이뤄간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은 소중하다. 권투를 잘하게 된 뒤에도 이치코의 삶에서 크게 바뀐 것은 없지만 이치코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 인생에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나는 하루하루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간다. 여러 현실적인 부침이 있지만 어쨌든 살 만한 인생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윤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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