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꽤나 괜찮은 코미디 영화를 잘 냈다. 한때는 <머더 미스터리>(2019) <배드 맘스>(2016) 등, 몇 개의 재밌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락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도, 넷플릭스를 구독할 가치가 충분했다. 금요일 밤에 맥주 한 캔 하며 보기 좋은, 영화 취향이 전혀 겹치지 않는 친구와도 깔깔거리며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한 달 치 구독료의 가치를 충분히 뽕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요 몇 년 새 넷플릭스가 내놓는 오리지널 영화는 대놓고 영화제 수상을 겨냥해 너무 무거워졌거나, 아예 장르성이 짙어졌거나, 장르가 코미디라고 하기엔 재미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애매한 작품이 태반이었다.
이게 링클레이터 작품이라고?

그러나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영화 <히트맨>은 누구와 함께 봐도 괜찮은, 예전 넷플릭스가 잘 만들던 오락영화의 계보를 잇는 듯하다. ‘히트맨’(hitman)은 청부살인업자를 뜻하는 말인데, <탑건: 매버릭>(2022)의 ‘행맨’ 역으로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배우가 된 글렌 파월이 가짜 ‘히트맨’을 연기한다. 시놉시스만 보면 액션 코미디일 것만 같지만, 실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의 감독이 리처드 링클레이터라는 사실이다. <히트맨>은 2023년에 베니스 영화제와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그 후 넷플릭스가 2,000만 달러에 구매했다.

대사 깎는 감독 링클레이터의 스크루볼 코미디

물론, <히트맨>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둘 - <스쿨 오브 락>(2003)과 ‘비포’ 삼부작(<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냐 묻는다면, 단연 <스쿨 오브 락>일 것이다. 다만, <히트맨>은 ‘비포’ 삼부작 감독의 장기가 여지없이 드러나 ‘링클레이터’스러운 구석이 꽤나 많은 영화이기도 하다. 링클레이터는 순전히 인물들의 ‘티키타카’로만 이루어진 데뷔작 <슬래커>(1991)부터 줄곧 ‘대화’가 플롯의 핵심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히트맨> 역시, 차진 말맛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사들이 액션 못지않은 속도감을 선사한다. <히트맨>이 범죄 장르의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스크루볼 코미디(남녀 주인공이 나와 재치 있는 대사로 갈등과 애증을 겪는데, 처음에는 갈등의 폭이 커지지만 결국엔 행복한 결말을 맞는 장르*네이버 영화사전)에 더 가까운 이유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삼부작이나 <보이후드>(2014) 등의 인지도가 너무도 큰 탓일까. 그의 영화들은 왠지 진지하거나, 일상적이고 소박할 것만 같지만, 사실 링클레이터는 코미디 장르에 꽤나 진심인 감독이기도 하다. 메가 히트작 <스쿨 오브 락>은 물론, (순수 코미디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에 가깝지만) 잭 블랙과 한 번 더 협업한 <버니>(2013), 글렌 파월이 출연한 <에브리바디 원츠 썸!!>(2016) 등, 링클레이터는 꾸준히 코미디 영화에 대한 욕심을 보여왔다.
팝콘무비에 철학 한 스푼
그렇다고 <히트맨>이 마냥 웃기기만 한 영화라는 건 아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히피스러울 만큼이나 독특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창작 방식은 더없이 특별하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배우의 중요성을 유난히도 강조하는 감독으로, 배우와 함께 작품을 창작한다. <비포 선라이즈>를 찍을 때는 주연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에게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질문하며 배우와 배역의 경계를 흐렸고, <비포 선셋>과 <비포 선라이즈> 때는 아예 줄리 델피, 에단 호크와 함께 각본 작업을 했다. 한 아이가 12년 동안 성장하는 모습을 담은 <보이후드> 역시, 다큐멘터리인지 극영화인지 모를 독특한 형태로 탄생했다.

내가 만약 어떤 페르소나를 연기하고 있다면, 그 페르소나는 나의 일부가 아닌 ‘가짜’일 뿐인가? <히트맨>은 ‘아니’라고 답하는 듯하다. 영화 <히트맨>은 주연 배우 글렌 파월과 링클레이터가 공동으로 각본 작업을 한 영화다. <히트맨> 속 글렌 파월이 연기한 ‘개리’는 대학교수이자, 가짜 ‘히트맨’(살인청부업자)다. 그의 ‘본캐’는 너드미 넘치는 대학교수이지만, ‘히트맨’이 될 때는 고객 앞에서 수없이 많은 ‘부캐’를 연기한다. <히트맨> 주인공 개리는 <아메리칸 사이코>(2000) 속 크리스천 베일이 되기도 하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안톤 쉬거가 되기도 한다(물론, <탑건: 매버릭>의 ‘행맨’스러운 모습도 볼 수 있다!). 글렌 파월이 매번 ‘부캐’를 갈아끼며 능숙한 연기 차력쇼와 함께 큰 웃음을 주는 건 당연지사. 영화는 주인공 개리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앞세워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배우에게 배역과 자신의 그 중간 지점을 찾게 만드는, 링클레이터의 오랜 작업 방식이 영화로 드러난 셈이다.
영화보다 더 놀라운 실존 인물, 가짜 ‘히트맨’ 개리 존슨

현실을 영화화하길 즐기는 링클레이터가 실화에서 영감을 받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링클레이터의 블랙코미디 영화 <버니>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히트맨>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더욱 납득이 간다. 재밌는 것은, <버니>와 <히트맨>은 모두 ‘텍사스 먼슬리’라는 매체의 기사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이다(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텍사스 출신이다).
2001년, ‘텍사스 먼슬리’에는 ‘히트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개리 존슨’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뤘다. 휴스턴에 살던 개리 존슨이라는 인물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고, 이웃들에게 예의 바르며, 조용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인사과에서 일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알고 보니, 유능한 ‘가짜 살인청부업자’였다. 10년 동안 그가 만난 고객만 약 60여 명. 그가 유능했던 이유는, 살인을 의뢰하는 고객에 따라서 새로운 얼굴을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휴스턴의 고급 주택가에 사는 의뢰인을 만날 때는 6만 달러 미만의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련되고 숙련된 암살자의 태도를 취했고, 노동 계급이 사는 동네에 사는 고객을 만날 때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 누구든 때려잡을 수 있는 교활한 시골 소년으로 분했고, 어떤 고객에게는 자신이 마피아와 연관이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으며 또 다른 고객에게는 자신이 미 육군 특수부대 출신이라며 연기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 <히트맨>은 개리 존슨의 삶을 장르에 맞게 극화했으나, 다양한 페르소나를 연기하던 개리 존슨의 캐릭터는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실존 인물 개리 존슨은 <히트맨>이 완성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