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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장르로 정의되지 않는 '가족'이란 이름의 종교 〈엄마의 왕국〉

이진주기자
〈엄마의 왕국〉 포스터
〈엄마의 왕국〉 포스터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저서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문장인 이 글귀에서 필자는 행복한 가정의 모순성을 읽는다. 과연 행복한 가정이란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오는 24일 개봉하는 <엄마의 왕국>의 메시지와 공명한다.

 

지난 15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영화 <엄마의 왕국>의 언론배급시사회와 기자간담회가 진행되었다. 영화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앞서 관객을 만나며 ‘웰메이드 미스터리물’이라는 호평을 받았던 바 있다. 그럼에도 상영 후 무대에 오른 이상학 감독과 한기장, 남기애, 유성주 배우는 짐짓 긴장한 모습으로 기자들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엄마의 왕국>의 첫인상과 함께 제작진과의 담화를 전한다.


*이하 <엄마의 왕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왕국〉
〈엄마의 왕국〉

자기 계발서 「진실의 힘」 작가 도지욱(한기장)은 왕국 미용실을 운영하는 엄마 주경희(남기애)와 단란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경희는 건장한 성인 아들이 여전히 어린아이인 양 살뜰히 챙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가정을 들여다보면 독특한 대화가 오고 간다. 경희는 지욱에게 “엄마의 규칙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나쁜 꿈을 꾸었을 때는 ‘난 행복해’라고 중얼거리라는 처방을 내려주기도 한다.

한편, 지욱은 언젠가부터 점점 엄마가 달라지는 것을 눈치챘다. 경희가 치매를 앓게 된 것. 지욱은 이제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를 보살핀다. 갑자기 왕국 미용실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목사 도중명(유성주). 중명은 경희에게 자신의 형이자 경희의 남편의 실종에 대해 묻는다. 중명의 등장에 경희는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어 지욱에게 접근한 중명은 지금껏 지욱이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지욱은 중명과 경희 사이에서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찾아간다.


〈엄마의 왕국〉
〈엄마의 왕국〉

경희는 진실을 은폐하는 동시에 기억을 잃어가고 아들 지욱은 진실을 밝히고자 기억을 찾아간다. 두 인물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갈 때 엄마의 왕국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기억은 진실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거짓, 비밀. 이 세 가지 키워드에서 시작했다는 영화 <엄마의 왕국>의 이상학 감독은 “가족은 기억으로 유지되고 보호되는 집단”이라면서 “가족 안에서 어떤 기억이 사라지거나 왜곡되거나 탄생했을 때 가족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이것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영화는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치매를 의심하고 진단받은 엄마 경희(초반부), 아버지의 실종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아들 지욱(중반부), 진실이 밝혀지고 이에 대응하는 인물들(후반부)이다.

 

〈엄마의 왕국〉
〈엄마의 왕국〉

 

​<엄마의 왕국>은 97분의 러닝타임 중 초반 1/3가량을 모자(母子)가 치매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다룬다. 경희의 상식 밖의 행동이 이어지고 지욱은 이에 당황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때문에 영화를 장르물로 접근하고자 하는 관객들에게는 다소 느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중후반부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주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질병인 ‘치매’는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드러나고, 당사자보다는 주변인이 먼저 실감한다. 영화는 이를 적당한 거리에서 촘촘히 조명하며 경희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산란한 지욱의 내면에 밀착되도록 한다. 이로 인해 관객은 진실을 찾고자 하는 지욱의 여정에 자연스레 동참하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잔잔한 수면 아래 소용돌이를 숨긴 바다와 같이 관객에게 아늑함과 아득함을 동시에 쥐여준다.

 

경희가 지욱에게 “내가 네 아버지를 죽였다”는 고백을 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과거(진실)와 현재(거짓)를 넘나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지욱이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간 그를 지탱했던 종교와 같은 가족에 대한 믿음은 무너진다. “불안은 진실과 사실이 다를 때 생긴다”는 지욱의 말처럼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근원적 불안에 휩싸인다.

 

〈엄마의 왕국〉
〈엄마의 왕국〉

 

영화 <엄마의 왕국>은 특별한 장르적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스펙터클을 만들기 어려운 저예산 독립영화인 <엄마의 왕국>은 이를 위해 가족의 속성과 인물 간의 관계성에 집중했다. 이상학 감독은 “‘가족’이라는 독특한 집단은 본질적으로 따뜻한 휴먼 드라마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스터리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며 가족을 드라마, 스릴러, 범죄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담아낸 이유를 설명했다.


<엄마의 왕국>이 웰메이드 심리 스릴러로 평가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낸 배우들의 몫이 크다. 극 중 가장 큰 심리적 변화를 가진 도지욱 역의 배우 한기장은 관객을 인도하는 친절한 안내자이자 극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한기장은 “우리는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고 왜곡하거나 낭만적으로 포장하기도 한다”면서 “도지욱이 내리는 선택의 타당성을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전했다.

 

한편, 주경희 역의 배우 남기애는 자신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의 정신적, 물리적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했다. 남기애가 만든 인물 주경희는 각종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유약한 치매 환자의 전형적 모습에서 탈피해 극 전체를 쥐고 흔드는 힘을 가진다. 지욱과 정면으로 맞붙는 도중명 역의 유성주 배우는 서슬 퍼런 눈빛 연기로 공간을 장악한다. 존재만으로도 압도되는 유성주의 아우라는 관객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충분하다.

 

영화는 후반부에 들어서 각 인물의 고유한 두려움을 장르적 연출로 풀어낸다. 특히 가족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재적 정서를 이끌어내는 마지막 시퀀스는 결국 <엄마의 왕국>의 이야기가 인간 존재를 향하고 있음을 내포한다. 이 장면이 간단한 시각효과만으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앞서 쌓아온 인물들의 견고한 서사 덕이다. 지극히 작가주의적 색채로 시작한 영화는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해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르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