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명 유튜버를 옭아맨 사이버 레커들의 착취는 '사적 제재'와 '정의 구현'이 얼마나 허황하고 얄팍한 구호인지 보여주지만, 아내를 집에 가두고 성인 방송 출연을 강요한 이에게 내려진 형량 3년에 억울한 가슴 내리치는 딸의 아버지를 마주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사적 제재에 매혹된다.
공적 처벌의 좌절이 사적 복수를 정당화할 순 없다. 사적 복수가 가능한 세계야말로 사회적, 경제적 강자가 지배하는 아노미적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제도와 체계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을 때, 그래서 보통 사람들과 약자의 권리가 심각하게 손상될 때, 우리는 반격의 카드를 슬쩍 꺼내본다. 영화를 통해서다.
오늘은 스스로의 힘으로 정의 구현에 나선 영화 속 인물들을 모아봤다. 통쾌한 복수를 따라가다 보면 잠시나마 현실의 답답함이 잊힌다. 이미 자주 언급된 <테이큰> 시리즈와 <존 윅> 시리즈는 제외했다.
프라미싱 영 우먼 (2020)

비질란테(Vigilante: 자경단)로 대표되는 제3자에 의한 사적 제재는 윤리적·법적 정당성 측면에서 모두 문제가 되는데, <프라미싱 영 우먼>의 캐시(캐리 멀리건)는 피해당사자가 아닌 제3자로, 죽은 친구의 복수를 대신하는 독특한 위치에 선 인물이다.
캐시의 낮과 밤은 사뭇 다르다. 낮에는 한적한 카페에서 평범한 모습으로 일하다가 밤이 되면 노출이 심한 옷을 챙겨 입고 클럽이나 술집으로 향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캐시가 웬일인지 만취한 척 비틀거린다. 그럴 때면 단 하루도 빠짐없이 늘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남자들이 다가온다. 저항 능력이 없는 만취한 여자를 농락하는 수순을 남자들은 매뉴얼처럼 지키는데, 그때마다 캐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일으켜 또랑또랑 묻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남자들은 당황하며 상황을 파악한다. 눈빛이 돌변한 여자를 보고 그들은 즉시 뒷걸음질 친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자 리벤지 캠페인이다. 만취한 여자는 마음대로 농락해도 된다는 남자들의 착각을 깨부수는 중이다. 언젠가 잠재적 성폭행 가해자가 될 수도 있었던 남자들이 전보다 조신한 삶을 살도록 캐시는 '돕는' 중이다.

캐시의 기이한 이중생활과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을 향한 뜻 모를 복수는 죄의식에서 비롯됐다. 7년 전, 캐시의 단짝 친구 니나는 대학 파티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사이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대학 당국의 조직적 은폐와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캐시는 니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학교도 그만두고 방향 없는 삶을 살며 남자들에게 자기 식의 복수를 해 왔던 것이다.
"네 인생을 살"라는 니나 엄마의 애정 어린 충고에도 캐시는 자기 파괴적 복수를 멈추지 않는다. 캐시의 최종 목표는 결혼을 앞둔 강간범 알렉산더 먼로를 처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를 처벌하는 것이 복수의 끝은 아니다. 니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강간범뿐만이 아니라 시스템이기도 하다. 사회가 전도유망한 젊은 남성을 벌주려 하지 않는 사이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은 영영 사라졌다. 남성을 위해서는 성폭행 피해자조차 거리낌 없이 지워버리는 사회 구조. 이것이 바로 캐시가 전복해야 할 대상이다.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은 ‘전도유망한 여성’이라는 뜻인데, 흔히 성폭력 가해자를 ‘전도유망한 남성(promising young man)’이라고 칭하며 두둔하는 행위에 대한 패러디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각종 시상식에서 다수의 상을 안기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노바디 (2021)

비범한 과거를 숨기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무료한 일상을 살아가는 허치(밥 오덴커크). 성실한 가장으로 일과 가정에 최선을 다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들과 아내의 무시와 냉담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강도가 침입하고 허치는 대응 한 번 하지 못 한 채 무력하게 당하고 만다. '힘숨찐'(힘을 숨긴 찐따)의 면모를 알 리 없는 아들과 이웃은 허치를 무능하다 몰아세우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억울함을 삼키는 것뿐이다. 하지만 평범히 살아보려던 그의 노력은 버스에서 '예의 없는 놈'들을 만나며 어긋난다. 겨우겨우 억눌렀던 살상의 기운이 봉인 해제되자 그는 칼자루를 쥔 백정처럼 날뛴다. 버스 안의 혈투로 의도치 않게 러시아 마피아 자금 시스템인 '옵샤크'를 관리하는 마피아 율리안(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의 동생을 불구로 만든 허치는 수류탄, 부비 트랩, 총기 액션이 난무하는 클라이맥스로 내달아 힘숨찐의 클리셰를 보여준다.
<노바디>는 2016년 1인칭 시점의 액션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 <하드코어 헨리>의 연출과 각본을 담당한 일리야 나이슈럴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존 윅> 시리즈의 데릭 콜스태드가 각본을 맡았다. 미드 <브레이킹 배드>와 <베터 콜 사울>에서 천재적인 언변과 남다른 친화력을 갖춘 변호사 사울 굿맨을 연기한 밥 오덴커크가 주인공 허치 만셀을 연기하며 허술한 가장과 살벌한 킬러를 오간다. 8년간 미국 인기 코미디 쇼 ‘SNL’ 작가로 활동하며 1989년 에미상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탁월한 연기력과 코미디 감각을 겸비한 오덴커크는 2년 간의 훈련을 거쳐 총기 액션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존 윅> 시리즈의 각본가와 제작자가 참여해서인지, 세계관이 많이 닮아 있다. 날 것의 액션, 보잘것없어 보이는 인물을 잘못 건드렸다가 된통 당하는 악당들, 총을 쏘고 피가 튀기는 와중에도 멈출 줄 모르는 <데드풀>식 병맛 개그까지. 우주의 작은 먼지 같은 삶을 살다가 가끔 일탈을 꿈꾸는 당신을 대리 만족시켜 줄 만한 90분이다.
비키퍼 (2024)

'먹어 봤자 내가 아는 맛'이라는 유명 다이어트 명언을 뒤집으면, '알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맛'이 된다. 개연성도 스토리도 기대할 수 없지만 폭력의 당위성을 등에 업은 제이슨 스타뎀의 영화들은 '알기에 거부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꿀벌판 존 윅'이라 불리며 제이슨 스타뎀표 액션을 유감없이 보여준 <비키퍼>(2024)도 그중 하나다.
법위에 있는 비밀 기관 '비키퍼'. 그곳의 전설로 남은 탑티어 에이전트 애덤 클레이(제이슨 스타뎀)는 기관의 눈을 피해 자취를 감추고 양봉가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거대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유일한 이웃이자 친구인 친구 엘로이즈를 잃게 된 그는 피싱 조직의 본거지와 그들의 수장을 참교육하기 위해 잠재웠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보이스피싱 일당의 수법은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범죄 행위는 대담해지고 있다.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특히 영화는 IT 기업가, 미국 대통령, CIA 관료가 맺은 견고한 카르텔을 정조준하며 소시민들의 피해를 해결하지 못 하는, 해결할 생각이 없는 시스템적 모순을 폭로한다. 생활 밀착형 병폐를 해결해서일까? 제이슨 스타뎀의 자비 없는 액션이 더 통쾌하게 다가온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한 사적 제재는 영화 <시민덕희>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