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원래 몸집의 0.0364%로 축소시킨다면 인구과잉과 밀집현상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알렉산더 페인의 신작 <다운사이징>은 인간을 5인치의 크기, 무게는 2744분의 1로 줄여 경제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인류의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색다른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감독이 그간 꽤 현실적인 중장년층의 풍자 드라마에 초점을 맞춰왔던 것에 비하면 이런 SF적인 발상은 꽤 놀라운 변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맷 데이먼과 크리스토프 왈츠를 비롯해 크리스틴 위그와 홍 차우, 롤프 라스가드 등 좋은 배우들이 합류해 적절한 무게감을 잡아내고 있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엔 짙은 페이소스와 씁쓸한 블랙 코미디가 공존한다. 연민은 웃음을 자아내고, 그 아린 웃음은 곧 회한의 눈물 한 방울을 남긴다. 시니컬하게 전체를 조망하지만 그로 인해 디테일한 감정이 부각되는 그의 직조 솜씨는 영리하고 정교하다. 절대 끊어질 수 없지만 가장 부셔지기 쉬운 가족의 약점부터 집요하게 파고들며 현대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에 접근해가는 반어적인 화법의 휴머니즘은 데뷔작이었던 <시티즌 루스>부터 이번 <다운사이징>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조금 비현실적인 설정을 가져오긴 했지만 알렉산더 페인은 여전히 자신이 발 담그고 있는 현실의 화두를 던지는데 거리낌이 없다.
 

알렉산더 페인의 음악적 짝패
롤페 켄트
알렉산더 페인과 롤페 켄트

변하지 않은 건 주제의식뿐만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7 작품뿐이 연출하지 않았지만 데뷔작부터 같이 시나리오를 쓰고 공동 제작을 맡고 있는 오랜 동료 짐 테일러와 편집자 케빈 텐트, 촬영의 페든 파파마이클과 이번이 벌써 5번째 공동 작업이 된 영화음악가 롤페 켄트와의 파트너십도 굳건하다. 비록 하와이가 무대여서 하와이언 음악들로만 풍성하게 채워졌던 <디센던트>와 미국 내륙 지방의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포크와 알트컨추리 사운드가 지배했던 <네브래스카>에선 함께 하지 못했지만, 롤페 켄트는 2004<사이드웨이> 이후 13년만의 해후를 여전히 인상적이고도 가슴 따스하게 장식해줬다.

<사이드웨이> OST 중 'Miles' Theme'

사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에서 음악을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여느 블록버스터처럼 주구장창 스코어가 흐르지 않고, 음악 자체도 극적인 효과나 장치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편안하면서도 느슨한 사운드는 절묘하게 상황과 인물에 매칭된다. 과도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면 쉬 가벼워지고 그렇다고 부족하면 진중하고 딱딱해져 위트나 풍자가 살지 않기에, 코미디에서 음악의 적정선을 맞추기란 쉽지 않은데도 롤페 켄트는 더도 덜도 않은 적당한 톤과 분량을 찾아낸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 장르에 최적화된 영화음악가다. 필모 대부분을 코미디가 차지하고 있단 게 그 방증이다.

어바웃 슈미트 / 사이드웨이 OST
영화음악가의 꿈을 이룬
탁월한 멜로디메이커

1962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음악 집안도 아니고, 정규음악 과정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어린 시절부터 모리스 자르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들을 접하며 직감적으로 영화음악가가 되기를 꿈꿨다. 요크셔에 있는 리즈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동했지만 틈틈이 여러 연극들과 애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같은 무대에서 음악을 선보였던 그는 서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영상음악에 참여하게 되는데, 플레이보이 채널에서 제작한 앤솔로지 기획의 성애물 시리즈 <인사이드 아웃>의 음악을 맡으며 당시 연출자 중에 하나였던 알렉산더 페인과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그 관계가 페인의 데뷔작인 <시티즌 루스>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알렉산더 페인이 롤페 켄트를 눈여겨봤던 가장 큰 이유로 그의 탁월한 멜로디 감각을 들었는데, 사실이다. 그의 말랑말랑하면서도 여유롭고 달콤한 태도는 페인이 좋아하던 5-60년대 이탈리안 영화음악가들을 닮았다. 니노 로타나 엔니오 모리꼬네 더 나아가 프렌치 영화음악가인 조르쥬 들르뢰나 프란시스 레이를 연상케 만드는 서정성과 활력 그리고 애수를 함께 지녔다. 현실에서 결코 쉽게 친해지거나 좋아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 군상들을 다루지만 그 루저들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건 바로 롤페 켄트가 들려준 음악의 힘이 크다. 이런 음악은 그들의 상처와 약점을 위로하고 관객들의 쉬운 동화를 이끌어낸다.
 

21세기 코미디 영화음악의 장인

철없이 막무가내로 망가져가던 무책임한 로라 던의 좌충우돌 모습 아래 깔리던 <시티즌 루스>에서의 유유자적 태평스런 음악은 물론, 서로의 속셈을 숨기고 공방을 벌리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다룬 <일렉션>의 의뭉스럽고도 애잔하며 악취미적인 사운드나 은퇴하고 사별한 노인의 모습을 통해 삶의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는 <어바웃 슈미트>에 위안을 안기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심포닉 스코어, 그리고 네 남녀의 달콤 쌉쌀한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낭만적인 재즈 사운드에 녹여낸 <사이드웨이>까지 롤페 켄트의 선율은 소박하지만 다채로우면서도 매력적인 일면을 남기고 있다. 마치 지리멸렬한 삶 속에 한줄기 구원을 내리듯이.

<시티즌 루스> 음악

이런 이유로 알렉산더 페인 말고도 <탱큐 포 스모킹><인 디 에어>, <레이버 데이>의 제이슨 라이트맨이나 <퀸카로 살아남는 법>, <저스트 라이크 헤븐>, <파퍼씨네 펭귄들>의 마크 워터스 같은 감독들도 롤페 켄트를 중용한다. 단순한 미키마우징을 넘어 페이소스와 위트, 사랑스러운 멜로디까지 탑재한 채 (가끔 장편 애니와 드라마들이 있긴 하지만 주로) 코미디만을 묵묵히 걷고 있는 그의 편식(이라 쓰고 특화라 읽는다!)에 장인 정신마저 느껴진다. 과거 로버트 포크나 랜디 에델만이 8-90년대 할리우드 코미디 스코어를 주름 잡았다면 21세기 코미디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그의 몫이다.

<인 디 에어> OST 중 'Security Ballet'
그리고 <다운사이징>의 음악

오랜만에 조우한 그들이지만 세월이 무색하게 <다운사이징>에서도 찰떡 호흡을 과시한다. 시니컬하면서도 풍자적인 페인의 시선을 감싸주는 롤페 켄트의 따스한 휴머니즘 색채의 아름다운 선율은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SF적인 설정을 가미한 만큼 그의 스코어도 그 소인들의 세계관과 모험담을 담아내기 위해 그간 전작들에서 찾기 어려웠던 금관악기 편성이 첨가되고, 코러스를 대동했다는 점이다. 물론 쥬라기 공원(알렉산더 페인과 짐 테일러는 3편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에 들어설 때의 장엄한 서곡이자 모험담에 어울릴법한 대규모 교향시와는 자못 거리가 멀지만 은근히 그런 요소들을 내포한 롤페 켄트의 영리한 접근법은 제법 큰 사운드로 느껴지게 만든다.

여기에 전통적인 노르딕 색채와 왈츠, 엑소더스에 비견될 법한 종교적인 뉘앙스까지 더해지며 심플하고 단아하게만 다가오던 스코어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함의도 갖게 된다. 그러나 여러 화두를 던지고 싶었던 알렉산더 페인의 욕심과 달리 롤페 켄트는 스타일과 개성을 무리하게 남용하지 않아 지루하거나 어수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미상을 5번이나 수상한 영국 최고의 아카펠라 그룹 더 스윙글즈가 참여해 7성부만의 섬세하고 환상적인 화음을 선사하는 ‘A Little Change in the Weather’도 빼놓을 수 없는 곡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투쟁과 선택을 멈추지 않는 소시민들을 위한 축제의 노래로도 손색이 없다.

'A Little Change In The Weather'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