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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에 대하여, 〈장손〉

이진주기자
〈장손〉 포스터
〈장손〉 포스터

 

장손(長孫). 장손인 이에게도 장손이 아닌 이에게도 부담스러운 이름이다. ‘요즘 어느 집이 장손을 따지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지만 2024년의 대한민국은 한 세기를 아우르는 세대가 모여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이다. 이들이 한곳에 모이는 명절이 되면 가족의 뿌리 깊은 문제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세대와 젠더, 계급이 다른 이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끊임없이 어긋나는 영화 <장손>을 앞서 보았다.

 

영화 <장손>은 대대로 두부공장을 운영하는 대가족의 이야기를 담는다. 1대인 할아버지 김승필(우상전)과 할머니 오말녀(손숙)는 전쟁통에서 살아남아 그럴듯한 두부공장을 키워냈다. 모든 것이 조상의 음덕과 부부의 노력 덕이라고 믿는 그들은 이 오랜 지혜를 후대에 남기고 싶어 한다. 멀쑥하게 한복을 차려입을 정도로 정정한 노년이지만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산을 받들 이들과 세대교체를 준비한다. 

 

김 씨 집안 3대가 모두 모이는 제삿날. 여전히 두부공장은 바쁘게 돌아간다. 영화는 뿌연 연기에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화면에서 하나, 둘 공장 노동자들의 윤곽이 드러나며 시작한다.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가족’의 진짜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포부로 보인다. 


*이하 <장손>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음을 알린다.

 

가족, 그 복잡한 감정의 교차로

 

〈장손〉
〈장손〉

영화는 김 씨도 아니면서 김 씨 집안의 제사를 지내는 여자들이 모여 앉아 전을 부치는 모습에서 선명한 가부장제 가정의 모습을 관객에게 빠르게 각인시킨다. 첫째 딸 김혜숙(차미경)은 병치레를 하는 남편 없이 홀로 본가에 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기독교의 편의에 대해 설파한다. 둘째 아들 김태근(오만석)의 아내이자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 그리고 두부 공장의 살림꾼인 임수희(안민영)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으니 상조회사에 가입하라’는 할머니의 말에 난색을 표한다. 그 옆에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이들의 큰 딸 김미화(김시은)가 있다. 4개월 차 임산부인 그는 남편 재호와 함께 두부 공장을 돕는 전형적인 K-장녀이다. 

〈장손〉
〈장손〉

 

그리고 뒤늦게 등장하는 김 씨 집안의 3대 장손, 김성진(강승호). 배우를 하겠다고 호기롭게 상경을 했지만 변변치 않다. 그런 그를 가족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한다. 장손이기 때문이다. 집안의 권력을 쥐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성진이 유일하다. 

 

영화는 현대 사회에 만연한 갈등을 보편적인 정서를 지닌 한 가정에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영화 속 각 구성원들은 가장 유사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성별을 지니고 각자의 시대에서 분명한 차이를 지닌 사회적 위치를 배경으로 살아가며 완벽한 타인이 된다. 어느 한 지점에서 만난 이들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고자 했을 것이다. 기대와 선의가 실망과 부담이 되어 스스로를 짓누르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계절이 흐르는 집

 

〈장손〉
〈장손〉

<장손>의 영어 제목은 <House of the Seasons>, 일명 ‘계절이 흐르는 집’이다. 영화는 가족 공동체 내 구성원의 명암뿐 아니라 계절(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가정의 모습을 거시적으로 바라본다. 

〈장손〉
〈장손〉

 

시작은 30도가 넘어가는 뜨거운 여름이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솟구치는 날씨에 그들은 서로에게 날 선 말들을 쉬지 않고 내뱉는다. 진리의 화살은 서로에게 날아가 뜨겁게 꽂힌다. 예견된 일이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역사 속에서 생존한 전쟁 세대, 치열한 노력으로 자산을 일군 1960년대 베이비붐 세대, 자기 자신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1990년대 밀레니엄 세대 등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와 같은 시공간을 있어도 함께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손〉
〈장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가족들이 다시 모인 건 산이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이 되어서이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와의 이별에 가족들은 무너진다. 찰나의 순간 지나가버려 더욱 아쉬운 가을처럼 할머니의 부재는 가족들에게 큰 공허함으로 남는다. 하지만 삶은 영화보다 긴 법. 남은 이들은 그들의 몫을 챙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장손>은 이 ‘진짜 인생’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원래 인간이란 이렇듯 ‘멋없는 존재’라는 듯이. 

〈장손〉
〈장손〉

 

소복이 쌓인 눈이 겨울이 왔음을 알리고 다시 가족들은 한데 모였다. 가족은 여전히 할머니를 애도한다. 그 사이 미화는 출산을 했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또 한 사람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영화는 할아버지, 아버지, 고모 등 성진 앞에서 속절없이 마음을 풀어놓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홀로 선산으로 향하는 할아버지는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며 자조 섞인 말을 던지고, 아버지는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말을 흩뿌리기도 한다. 성진은 그들 사이에서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다.

 

영화 <장손>은 선명하게 계절을 분류해 내고 그 성질에 상응하는 관계성을 배치하며 인간이 거대한 자연에 속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이를 통해 영화가 바라보는 ‘가족’이 제도적 관계가 아닌 운명적 관계의 집합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족의 의미가 흐려지는 시대이지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가족은 언제나 불가피한 인연이다.

 

<장손>의 감독 오정민은 세 계절의 모습을 온전히 담기 위해 세 번의 프로덕션을 구성했다. 길어지는 촬영 기간과 로케이션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부담감에도 계절감을 잘 담아내야 한다는 뚝심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다채로운 인물로 자아낸 보편적인 정서

 

 

〈장손〉
〈장손〉

 

영화 <장손>의 등장인물들은 익숙하고도 낯설다. 관객은 분명 <장손>의 김 씨 집안과는 다른 가풍에서 성장했음에도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이는 단편 <성인식>, <백일> 등 오랜 시간 영화를 통해 인간과 관계, 특히 가족에 대해 깊이 탐구해 온 오정민 감독이 보편적이고 표준적인 한국 가정의 모습을 잘 구현해낸 덕이다. 오 감독은 자전적인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이 이입할 만한 대중적 요소를 발견해 인물에 녹여냈다.

 

오정민 감독이 그려낸 다양한 인물상은 배우들을 만나 더욱 다채로워졌다. 특히 주인공 성진 역을 맡은 배우 강승호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전통과 현대의 충돌 등 이 시대의 청년이 겪는 어려움을 다층적으로 표현해냈다. 집에서는 가업을 물려받을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쉴 새 없이 이름이 불리지만 사회에서는 자신의 이름 한번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신세인 성진의 괴리감은 그의 찬찬한 얼굴로 인해 극대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