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글을 보시는 시점에서) 연휴가 하루 남았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푹 쉬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사람마다 쉬는 방법이 다르다보니 그래도 조금은 알차게 쉬고 싶은 이도 있을 터. 그런 분들을 위해 이번 포스트는 짧고 굵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들을 모았다. 짧게는 6분, 길어도 30분이면 돌파 가능한 영화들이니 쭉 훑어보시라. OTT 플랫폼이나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고, 각 기자들이 애정하는 '보석함'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작품들이니 관람하길 추천드린다.
추아영 PICK _ <아임 히어>(2010)
감독 스파이크 존즈 / 29분 / 유튜브 공개


공상 과학 러브스토리 <아임 히어>(I’m Here)는 멜랑콜리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에 탁월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작품이다. 30분 분량의 단편 영화로 2010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아임 히어>는 쉘 실버스타인 작가의 유명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모티브로 삼았다. 스파이크 존즈는 주인공 로봇의 이름을 원작 작가의 이름을 따서 ‘쉘든’이라고 지으며 오마주 했다. 소년에게 밑동만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내어준 나무처럼 쉘든도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내어준다. 쉘든 역은 앤드류 가필드가 목소리 출연해 그의 색다른 연기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로스앤젤레스. 낡은 컴퓨터 모양의 머리를 가진 회색 로봇 쉘든(앤드류 가필드)은 공공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한다. 어느 날, 쉘든은 그와 달리 자유로운 성향의 여성 로봇 프란체스카(시에나 길로리)를 우연히 만난다. 둘은 각자의 외로움을 채워주며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준다.
인간이 꺼리는 노동을 대신하는 로봇, 차에 부딪혀 부서져 있는 로봇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교통사고 현장. 쉘든은 매일 로봇과 인간의 권리가 불균형적인 풍경을 마주한다. 그 속에서 쉘든은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프란체스카는 주류에서 벗어나 세상을 겉돈다. 쉘든은 방황하는 그녀에게 한 쪽 팔과 다리, 끝내 몸통까지 내어준다. 그가 프란체스카에게 건넨 것은 그녀의 충족되지 않는 외로움과 자학적인 삶의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의 절대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아임 히어>는 인간의 지각이 미처 다 뻗지 못한 곳에서 진실성을 마주하게 한다.
성찬얼 PICK _ <더미: 노 웨이 아웃>(2015)
감독 박재범, 이두희, 김은성 / 7분 / 왓챠

좋은 단편을 만나는 건 좋은 장편을 찾는 것보다 어렵다. 기본적으로 산업 자체가 장편 위주로 돌아가니 일하는 입장에서도 단편보단 장편을 많이 볼 수밖에 없다. 웬만하면 '이야기'라는 결과물이 남는 장편과 달리 단편은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인상적인 단편이 반드시 온라인 공개까지 하는 건 아니니 아무래도 이 작품이다 싶은 것을 찾기 어려웠는데, <더미: 노 웨이 아웃>이라면 추천할 만하다. 제목처럼 충돌 테스트용 더미가 주인공인 이 영화, 발상은 <토이 스토리>를 떠올리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훨씬 처연하다. 처음부터 파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더미들은 원하는 이상향을 위해, 오로지 사는 것을 위해 다시 한번 파손(=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영화는 사물로서의 더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투쟁을 강행하는 더미들의 모습에서, 6분 남짓의 영상에서 관객은 자신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필사(必死, 죽음을 각오하고 행하는 것)의 노력이 조롱 받는 세상에서, 그들의 도전은 한결 더 고귀하고 경건하다. 2023년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으로 오랜만에 한국산 스톱모션 장편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스튜디오 요나의 단편이다. 추천의 절반은, 이 스튜디오에 보내는 응원의 마음 때문임을 고백한다.
김지연 PICK _ <젖꼭지 3차대전>(2021)
감독 백시원 / 24분 / 왓챠

단편은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장편을 제작하기에 앞서 그들의 재능을 펼치는 통로와 같은 창구다. 극장 상영이나 배급, 투자 등에서 한풀 자유로운 형식이니만큼 단편 중에는 재기발랄하며 자유롭고, 보석 같은 작품들이 많다.
최근 왓챠에 들어온 <젖꼭지 3차대전>은 그 제목만큼이나 파괴력 있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한 방송국의 PD는 노브라 연예인의 젖꼭지를 모자이크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가릴수록 더욱 돋보이는 것을.
<젖꼭지 3차대전>은 B급의 외피 속,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블랙 코미디다. 여자, 남자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태어난 젖꼭지가 과연 논쟁거리가 될 수 있냐마는, <젖꼭지 3차대전>은 지금까지도 현실에서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는, 그리고 과거 한차례 뜨겁게 일어났던 논쟁을 영화화한 것뿐이다. 젖꼭지가 왜 선정적이고 불편하냐고 하면 '선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내가 선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선정적이다'라는 도돌이표 같은 순환논리만이 돌아오는 시대, <젖꼭지 3차대전>은 그래서 더 웃기다. 더욱 재밌는 것은, <젖꼭지 3차대전>을 연출한 사람이 실제 방송국 PD라는 사실이다. <젖꼭지 3차대전>의 감독 백시원은 SBS PD로, <TV 동물농장> <그것이 알고 싶다> <본격연예 한밤> 등에 몸담았다. 그가 얘기하는 방송국의 '젖꼭지 논쟁'이 더욱 재밌게 들리는 이유다.
이진주 PICK _ <백년해로외전>(2011, 장편 <촌철살인> 수록)
감독 강진아 / 30분 / 왓챠, 티빙, 웨이브

웃음에도 종류가 있다. 추석 명절에 찾는 웃음이란 뒤끝 없는 개운함을 풍기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내는 웃음을 좋아한다. 해학을 즐기는 지극히 한국적인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영화 <촌철살인>은 제4회 대단한 단편영화제의 상영작 중 네 편의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이다. 감독 박형익, 윤홍란의 <라인>, 감독 이용승의 <런던유학생 리차드>, 감독 강진아의 <백년해로외전>, 감독 엄태화의 <유숙자> 등이다.
이 중 강진아 감독의 <백년해로외전>은 여자 친구 차경(김예리)의 죽음을 맞이한 남자 혁근(이종필)의 이야기를 담았다. 자책하는 혁근과 차경의 모습이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는 배우 한예리(당시 ‘김예리’로 활동)의 풋풋한 신인 시절의 모습과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탈주> 감독 이종필의 연기를 볼 수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백년회로외전>이 죽음을 다루고 있음에도 피식 웃음이 터지는 것은 두 신인 배우의 덕이 크다. 오렌지 빛깔의 짧은 머리를 한 채 해맑게 자신의 과거를 읊는 차경 역의 한예리는 지금의 성숙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수룩한 모습으로 차경의 사랑스러움을 배가시킨다. 또한 현재는 감독으로 잘 알려진 이종필은 차경의 남자 친구 혁근을 맡아 여자 친구의 죽음에 대한 부정, 자책, 분노 등을 지나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강진아 감독의 단편 <백년회로외전>이 포함된 영화 <촌철살인>은 웨이브, 티빙, 왓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성철 PICK _ <프레임 속의 기억들>(1994)
감독 봉준호 / 6분 / 왓챠

봉준호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모든 감독은 단편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얘기가 봉준호 감독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찍었던 <백색인>(1993)이건, 학교에서 과제처럼 만든 습작 <프레임속의 기억들>(1994)이나 이미 널리 알려진 졸업작품 <지리멸렬>(1994)이건 간에 ‘봉준호 스타일’ 혹은 모두가 습관적으로 얘기하는 ‘봉테일’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로 만든 <인플루엔자>(2004)는 그의 첫 번째 디지털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변희봉 배우가 한강 매점 주인으로 출연해 <괴물>(2006)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20주년 기념 이공 프로젝트 중 <싱크 앤 라이즈>(2004) 등 그는 단편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넘어, 늘 단편과 함께 해왔다.
현재 OTT 왓챠에서 감상 가능한 봉준호 감독의 단편은 <프레임 속의 기억들> <지리멸렬> <싱크 앤 라이즈> 3편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프레임 속의 기억들>은 ‘소년 봉준호’를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그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중이던 1994년에 만든 <프레임속의 기억들>은,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온 소년(최성우)이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방울이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애타게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공부하는 책상에 방울이의 사진 액자를 올려둘 정도로 아끼던 강아지를 꿈에서도 찾아 헤맨다. 밤에 자다 깨어서는 대문 밖을 서성이기도 하는데, 결국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문을 열어두고 등교한다. 5분여의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영화 속 시대 배경이 1976년 즈음이기에 그 주인공의 모습에 ‘소년 봉준호’의 기억이 투영되어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싱크 앤 라이즈>가 <괴물>의 출발점이 됐던 것처럼, <프레임속의 기억들>은 잃어버린 개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의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2000)를 떠올리게 한다.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와 그 지하실 공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단독 주택의 이미지다. 방울이를 기다리며 자신의 손으로 열고 닫았던, 소년에게는 거대하게 보였을 그 대문을 통한 그리움의 정서는 신비로운 향수를 자아낸다. 그를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쓸쓸한 유년기의 기억을 전체 러닝타임 안에서 제법 긴 꿈 장면과 겹쳐지게 담아낸 <프레임속의 기억들>은, 기술적인 플래시백이나 환상 장면 연출을 즐겨 하지 않는 봉준호의 영화에서 이질적인 느낌마저 주는 신선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