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각자만의 싫어하는 음식이 있을 것이다. 에디터의 경우 흰 우유가 그렇다. 영화도 음식처럼 저마다 취향이 다르다. 에디터의 영화 취향은 참 좁았다. 영화를 보는 목적은 단 하나. 다 보고 나서 더 나은 기분으로 엔딩크레딧을 보는 것. 현실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을 내는 영화를 사랑했다. 그래서 워킹타이틀 표 로맨틱 코미디 영화나 청소년 성장물, 드라마 장르만 파고들었다. 그러나 영화 관련 일을 하면서부터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봐야 할 영화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를 얻고 있다. 영화 편식하던 에디터를 결국 극복하게 만든 취향 정반대의 영화들을 소개한다.


DC와 마블이 싸워도 나는 그냥 불구경할 뿐
<스파이더맨: 홈커밍>
<원더우먼>

씨네플레이에서 일할 때 실감했다. 영화팬들 정말 히어로 영화 좋아하는구나. 마블이 나은지 DC가 나은지 얘기하면 댓글이 끝도 없이 달린다. '어벤져스'에 누가 합류했다는 등 관련 소식만 떠도 관심이 쏠린다. 입사 전 네이버 영화판 구독하던 나는 절대 클릭하지 않던 글들이었다. 그동안 시리즈 순서에 상관없이 가끔 봐서 그랬는지 마블, DC 영화들은 언제나 내게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원더우먼>을 만나고 그들을 좀 이해하기 시작했다. 톰 홀랜드의 잔망스러운 스파이더맨은 지루할 틈 없이 귀여웠고, 아기자기한 연출로 가득했던 영화는 그동안 히어로물에 갖고 있던 편견을 깼다. <원더우먼>도 마찬가지. 여성 히어로 원더우먼을 연기한 갤 가돗의 매력, 영화의 벅찬 음악도 나를 사로잡았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감독 존 왓츠

출연 톰 홀랜드, 마이클 키튼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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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우먼

감독 패티 젠킨스

출연 갤 가돗, 크리스 파인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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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의 정반대 감독을 만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엔 나의 영화 편식 요소들이 총집합되어 있다. 데뷔작 <파이>. 수학 천재가 필사적으로 암호 해독한다. 뼛속까지 문과생인 에디터에겐 제목부터 아웃. <레퀴엠>은 약물 중독으로 파멸에 이르는 인간의 이야기. 보고 나면 우울해질 게 뻔하다. 서양과 동양의 종교관이 묘하게 뒤섞인 영화 <천 년을 흐르는 사랑>과 성경 속 인물을 모티브로 만든 <노아>. 천주교 신자지만, 신의 존재를 그다지 믿지 않고 큰 관심이 없는 주제다. <더 레슬러>에선 레슬링 선수가 피터지게 맞는다. 스포츠인 거 알지만 서로 싸우고 때리는 거 잘 못 보겠다. <블랙스완>. 손톱 좀 그만 뜯었으면 좋겠다. <마더!>. 제니퍼 로렌스 좀 가만 놔뒀으면 좋겠다!!!

<블랙 스완>

싫으면서 변태같이 이 영화들을 다 본 이유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생애 첫 인터뷰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 그가 연출한 위의 영화들을 추석 연휴 하루에 한 편씩 독파하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절대 픽하지 않을 영화들을 보는 건 새로운 자극이었다. 결론은 '너 참 나랑 안 맞는구나'였지만. 그 중에서도 결국 취향을 넘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는 <블랙스완>. 명성을 익히 듣고 몇 년 전에 시도했으나 나탈리 포트만이 손톱을 뜯어내는 장면을 보며 꺼버렸던 실패의 전적이 있다. 그 장면을 버티고 나니,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니나의 열정과 집착의 아우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버겁게 만들다니 새삼 대단한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확실히 그로 인해 강해졌다.

블랙 스완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나탈리 포트만, 뱅상 카셀, 밀라 쿠니스

개봉 2010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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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일본 영화는 기승전잠...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그동안은 취향이 아니었는데 올해 뜻밖에 좋아하게 된 감독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올해 1월에 벌써 별 다섯 개 준 두 영화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원더풀 라이프>와 <아무도 모른다>. 이전에 그의 영화 두어 편을 보았지만 끝내 잠에게 굴복하고 말았었다. 두 편의 영화는 달랐다. 캐릭터에 이입하는 경험이 줄어들던 중 이렇게 주인공들의 감정에 몰입했던 건 오랜만이었다.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전 어릴 적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원더풀 라이프> 캐릭터들 틈에서 나도 잊고 있던 어릴 적 행복한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 나면 커다란 슬픔을 남기는 <아무도 모른다>도 평소의 나라면 보지 않았을 영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까지 연달아 보고 나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유년기의 감성과 에피소드를 담는 섬세함이 너무 좋아졌고, 몹시 부러웠다. 잔잔한 일본 영화라고 다 기승전잠에 빠지는 건 아니었다.

원더풀 라이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이우라 아라타, 오다 에리카, 테라지마 스스무

개봉 199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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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야기라 유야, 키타우라 아유, 키무라 히에이

개봉 2004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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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극복 시도한 좀비물
<부산행>
<메이헴>
<워킹데드>

좀비물은 아직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1단계로 천만 돌파한 <부산행>이 좋겠다 싶었다. 15세 관람가란 것도 조금은 만만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좀비물이 처음인, 간이 콩알만한 에디터는 결국 <부산행>을 스마트폰으로 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TV로 또 봤다. 대중적 정서를 정말 잘 품은 좀비물이라 생각했다. 또 다른 좀비물을 맞닥뜨렸을 때는 스티븐 연 입덕 시기 즈음이었다. ‘<워킹데드>에서 스티븐 연이 그렇게 멋있게 나온다던데라는 말에 영업 당해 시즌1 첫 회를 봤다. 스마트폰 안에서 깜짝깜짝 튀어나오는 좀비들을 참아가며 기다렸지만 스티븐 연은 나오지 않았다. 2회부터 나온단다. 그를 보겠다는 이유 하나로 좀비물 드라마를 몰아보기엔 내 사랑은 너무 약했다. 영화도 아니고 몇 시간 동안 보다가는 좀비들이 꿈에 나올 것 같아서 아직까지 보류 중이다.(댓글로 누군가 좀 더 영업해준다면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스티븐 연이 첫 주연으로 출연한 공포, 호러 영화 <메이헴>은 영화관에서 봤다.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부산행

감독 연상호

출연 공유, 정유미, 마동석, 김수안, 김의성, 최우식, 안소희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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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싫었던 전쟁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전쟁 영화에는 대부분 국가적 이해관계에 희생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명예로운 이유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장면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 중에 <공동경비구역 JSA>는 마음 편히 본 유일한 전쟁 영화였다. 시대적 이해관계보다, 몇 명 되지 않은 인물들의 감정에 더욱 중점을 두었기 때문. 전쟁 영화를 보며 찝찝해했던 인간애, 그 지점을 이야기한 영화라 좋았다.  

공동경비구역 JSA

감독 박찬욱

출연 이영애, 이병헌, 송강호, 김태우, 신하균

개봉 2000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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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극복 못한 장르들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장화, 홍련>

음식도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좋아지지 않는 게 있는 것처럼 끝끝내 정이 안 가는 장르가 있다. 내겐 미국식 코미디 영화와 공포 영화가 그렇다. 어릴 적 미드 <프렌즈>를 보며 웃을 타이밍을 놓치다 끝내 하나도 못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미국식 코미디를 본 건 손에 꼽는데 그 중 최근에 본 건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 상사>다. 성적 코드가 섞인 미국식 유머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장르다. 영화관에서 <장화, 홍련>을 보며 느꼈던 긴장감이 아직 생생하다. 일단 무서운 사람(?)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부터 도전 중이다. 무서운 집착녀 <미져리>나 23개 인격을 가진 괴물 같은 인간이 나오는 <23 아이덴티티> 같은 영화로.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감독 세스 고든

출연 케빈 스페이시, 제니퍼 애니스톤, 콜린 파렐, 제이슨 베이트먼, 찰리 데이, 제이슨 서디키스, 제이미 폭스

개봉 201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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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

감독 김지운

출연 임수정, 염정아, 김갑수, 문근영

개봉 2003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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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편식 심한 나에게 이 영화들이 와줘서 참 고맙다 생각했다. 더욱 편견 없이 영화 보는 영화 에디터가 되겠다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에디터의 영화 편식 극복에 도움줄 추천 영화가 있다면 댓글에 남겨주시길.

씨네플레이 에디터 조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