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알파고’의 포스터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이 “Google Deepmind Challenge Match”를 치른 이후 인공지능이란 화두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일상생활화되었다. 불과 수년 전 비특이화자(話者) 뭐니 해가며 큰 서버에서 간신히 동작시켰던 음성인식이 어느새 작은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와 생활에 안착되기 시작했고 (라면 끓일 때 "시리, 4분 타이머"라고 말해보세요그 음성 속 의미를 분석해 일을 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대 인간이 개라는, 인간에 충성하는 객체를 거둬들였고 키워 왔듯 인간은 늘 자기의 일을 덜어주고 배신하지 않으며 감정을 나눌 존재를 찾아왔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인공지능은 필연적으로 인건비 절감이라는 자본주의에 걸맞는 형태의 목표를 갖고 발전되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이런 인공지능 객체를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오래전 <에이 아이>라는 영화가 그랬고, <휴먼스>라는 영국 드라마가 그랬고, 이제 이야기할 <그녀>라는 영화가 그렇다.

스파이크 존즈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 영화는 2013년 말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2013년 골든 글로브 각본상과 2014년 아카데미상 각본상을 받았지만 각본뿐만 아니라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 역시 명연으로 돋보이는, 영화 전체를 뒤덮고 있는 존재의 쓸쓸함이 공감으로 다가오는 그런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시어도어는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다. 주로 남의 편지를 대필하는 일을 하는 그는 남의 연애편지를 주로 써 주지만 정작 결혼한 아내와 1년 넘게 별거 중인, 그러면서 이혼을 준비 중인 사람이다.

그러다 컴퓨터 OS를 만나게 된 그. OS 사만다를 만나기 이전에도 핸즈프리 이어폰을 통해 우리가 시리를 사용하는 수준의 인공지능을 사용해 왔지만 새롭게 만난 OS 사만다는 왠지 그 이전의 인공지능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뭔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툰 시어도어를 감싸고 위해주며 감정 표현을 돕는 사만다, 그리고 그런 사만다를 접하며 OS에 사랑을 느끼는 시어도어. 하지만 그 둘의 사랑은 순탄하게만 이어지지 않는다.

시어도어가 사만다와 감정적 교류를 계속하지만 육체가 없는 사만다의 근본적 한계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생기고 그런 사건들은 결국 역설적으로 시어도어도 사만다도 외로움과 허전함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러던 중 시어도어는 친구가 소개해준 여자를 만나보기로 한다. 그 여성과 시어도어는 클럽 같은 곳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영화 속에서 그 술이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색과 모양으로 짐작해보면 아마도 진 베이스의 칵테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여기서는 진 베이스의 롱 드링크 타입 칵테일 중 가장 흔하게 소비되는 진 토닉을 말해보려 한다. 영화 속 장면의 여배우와도 잘 어울리는 상큼하고 맛있는 칵테일이다.

대부분의 칵테일들이 100여 년 전에 처음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시작점이랄까, 기원을 명확하게는 알 수 없는데 진 토닉은 예외다. 진 토닉은 인도의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했던 군대를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인도나 다른 열대지방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에겐 말라리아가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였는데 1700년대에 키나 나무의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키니네라는 물질이 말라리아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물질이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게 되었다.

키니네에는 특유의 쓴맛이 있는데 이를 잘 감추기 위해 19세기 초 인도에서 근무하던 한 영국인이 키니네에 물과 설탕, 라임, 그리고 진을 섞어서 말라리아 치료용으로 썼다. 이것이 진 토닉의 시초다.

진토닉. 바 빅블루(양광진 바텐더). 오래전 사진이네요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잔에 얼음을 넣고 드라이진(Dry Gin ·사진)을 적당량 넣고 토닉워터를 부어 잔을 채우면 끝이다. 가끔 레몬 필을 하기도 하고 필 한 껍질을 잔에 넣기도 하고 안 넣기도 한다. 드라이진 중 오이향이 나는 진인 헨드릭스 진으로 진 토닉을 만들 때는 레몬이나 라임 대신 오이를 세로 방향으로 얇게 썰어 잔에 둘러서 서브하기도 한다.

제대로 만들려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마티니 같은 칵테일과는 다르게 만들기도 비교적 쉽고 아마추어가 만들어도 대충은 마실 만한 결과물이 나와 칵테일 공부를 했다면 무조건 한 번 이상은 만들어 봤을 칵테일이다. 또 이성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좋은 칵테일이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도 대부분은 이런 깔끔함이 더 편안한 법이고. 그래서 시어도어가 차라리 이 여성과 연애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 내내 들었었다.

이 영화는 한 존재와 존재 사이의 감정의 교류, 특히 우정과 사랑, 그리고 섹스를 다룬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다면 일면 평범했을지도 모를 그런 관계가 상대방이 바뀜으로써 다른 색을 갖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겪었거나 혹은 겪게 될 다른 존재와의 만남, 교류, 그리고 이별까지,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영화다.

사실 현재의 인공지능은 아직 감정을 갖고 행동할 수준에 도달해 있지는 않다. 최근 비약적으로 올라간 컴퓨팅 성능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기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연역이 아닌 귀납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현재의 인공지능이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감정을 갖고 행동하게 되려면(혹은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느껴질 수준이 되려면) 큰 패러다임의 변화가 적어도 한두 번은 더 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녀 간의, 아니 어떤 존재와 존재와의 모든 관계는 사랑일 수도, 우정일 수도 있다. 시어도어와 사만다 역시 영화 내내 사랑과 우정 사이를 방황한다. 아니 어쩌면 그런 존재 간의 감정을 정의하는 수단으로서의 사랑이나 우정, 혹은 다른 단어들은 그런 감정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상대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하다 못해 인공지능이든 사람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바라는 건 결국 같을 것이다. 배신하지 않을 것, 나만 바라볼 것,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시어도어와 사만다 역시 결국 그것 때문에 헤어진 것이고

이미 미국이나 일본에선 섹스 로봇이 VR(가상현실)과 결합되어 시판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어느 한 증권사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70%가 넘는 사람들이 사람보다 인공지능 전문가를 선호한다는 응답이 나왔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 그 물결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 아이가, 로봇이 아닌 사람과 살았으면 한다. 같은 사람끼리 조금 더 아끼고 보듬어가며 살기를 바란다. 본인을 꼭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행복을 느끼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며 느끼는 이 무한한 행복을 내 아이도 느끼길 바라니까 말이다.

그녀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호아킨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스칼렛 요한슨

개봉 2013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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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