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장애 아이 육아보다 더 힘든 건 아이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류승연 작가의 에세이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을 원작으로 한 영화 <그녀에게>가 개봉했다. 언론인 출신 작가가 발달장애 아동의 부모가 되며 겪은 일화를 담은 원작처럼 영화는 장애아를 키우며 겪게 된 상연(김재화)의 좌절과 분투, 그리고 삶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10년의 여정을 스크린에 담는다. 허구의 상상력이 더해졌지만 영화 속 사건 모두 원작자와 그의 가족이 실제 겪었던 일로 영화는 오직 경험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감정과 맥락을 덤덤하게 풀어낸다.
"영화가 탄생한 이래 인간의 수명이 세 배나 늘었대". 대만 뉴웨이브 거장 에드워드 양은 유작 <하나 그리고 둘>(2000) 속 대사로 영화적 믿음을 드러낸다. 영화로 타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인생 경험치도 늘어난다는 믿음이다. 원작의 저자 류승연 작가의 엄마는 영화를 본 후 "미안하다. 몰랐어서…"라고 딸에게 고백한다. 딸의 육아를 최전선에서 지원하고, 책까지 읽었던 엄마. 하지만 발달장애인 자녀를 키우는 삶은 아주 가까운 관계라도 직접 그 삶을 살고 있지 않는 한 모른다. 영화를 보고서야 비로소 현실을 알게 됐다는 측근의 고백이 장애 아이 육아보다 더 힘든 건 아이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었다는 작가의 말과 겹치며 영화 보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한다.
좋은 영화란 아마도 에드워드 양의 영화처럼 우리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작품일 테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타인을 헤아려보게 하고, 종국에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들. 우리에게 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고, 모두에게 <그녀에게>를 봐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는 두 명, 교육을 위해 강남 입성 후 노년에는 전원주택으로 이사해 평화로운 생활 영위. 그 사이 정치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의 길을 개척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신혼여행에서 세운 상연의 인생계획은 거침없다. 올해의 기자상을 받고, '권력은 갖는 것보다 까는 맛'이라고 국회를 호령하는 정치부 기자다운, 패기 넘치는 설계도다. 기자의 꽃이라 불리는 정치부에서 후배들은 존경으로, 선배들은 신뢰로 그를 지지한다. 스쳐 지나가는 여성 국회의원의 뒷모습에서 남몰래 인생의 다른 가능성도 슬쩍 상상해 본다. 대치동에서 교육받고 명문대를 거쳐 만족스러운 커리어까지 이룬 주류의 삶. 인생에 고비가 있다면 헤쳐나가면 그만이다. 양수가 터져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와중에도 못 다 마무리한 기사와 다가올 일들을 정리했던 것처럼.
"너 때문에 내 인생 저당잡혔어"

하지만 어떤 난관은 의지만으로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상연은 곧 깨닫는다. 쌍둥이 남매를 낳고 두 아이가 유치원생이 됐을 무렵, 아들 지우(빈주원)가 자폐성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는다. 갑작스러운 분노 발작과 한밤중에 침대를 똥 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순간들이 쌓여간다. 국회를 호령하고, 국회의원의 협박에 맞서 사자후를 내뱉던 상연인데 자식과 단둘이 '장애라는 섬'에 갇히자 어쩐지 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너 때문에 내 인생 저당 잡혔어", 어리둥절한 아들을 향해 혼잣말을 읊조릴 뿐이다. 누가 들을세라 나지막이 소리를 죽여.

주류에서 비주류로 자리를 옮기자, 무지한 사람들과의 달갑지 않은 조우도 일상이 된다. 또래 친구들은 순수하기에 더 잔인하다. 상연의 두 손을 잡고 미안해할 필요 없다 위로하던 한 학부형은 오래 지나지 않아 상연과 지우를 무섭게 쏘아본다. 잘 적응시킬 수 있다며 온화하게 미소 짓던 지우의 학교 선생님은 어느 날 특수 학교 전학을 권유하며 상연에게 언성을 높인다. 치료비 문제로 남편과의 갈등이 고조되는 와중, 딸 지수(이하린)는 지우에게 쏠려있는 부모의 관심에 “나도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속 모르는 말을 쏘아붙인다.
가장 고된 건 상연이지만 그는 다른 이들처럼 회피할 수도 없다.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돌아온 건 강제전학 요청과 싸늘한 시선뿐. 분노가 일자 전생처럼 아득했던 자신의 과거가 생각난다. 상연은 기자로서의 실력을 발휘해 억울한 상황을 알리고 부당함을 호소하려 오랜만에 노트북을 펼친다.
장애인(長愛人): 길게 사랑해야 하는 사람

영화는 장애인(障碍人)의 원래 뜻(신체나 정서적 장애나 결함으로 인해 일상과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는 사람이란 뜻)을 길게 사랑해야 하는 사람(長愛人)이라 고쳐 쓴다. 길게 사랑하기 위해서 영화는 장애등급제도가 개선되고, 경력단절과 육아 노동의 문제가 해결되고, 통합 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말하지만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한 인물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장애 아이 엄마로 살아온 상연이 삶에서 점차 장애를 분리해가며 일과 가정, 부모와 아이 사이의 균형을 맞춰가는 여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돌아보고 함께 사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같은 처지의 '그녀들'인 영화-상연-한별로 이어지는 장애 아이를 가진 엄마를 비추며 연대의 가치와 중요성 또한 역설한다. 영화가 끝나면 “장애란 치료로 낫게 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대사가 맴돌며, 장애는 대부분 후천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명제가 부상한다. 장애는 불편할지언정 불행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존엄을 연대로 완성하자는 메시지가 곱씹힌다.
무표정과 심연의 연기 '김재화'

그간 상업영화에서 짧지만 강렬한 씬스틸러로 활약한 김재화는 불가항력적인 삶의 혼란 앞에 선 상연을 만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당차고 자신감 있는 기자 시절부터 자녀가 장애 진단을 받고 급변하는 생의 어느 한순간, 차라리 죽음을 바랐던 고통의 시간, 부당함에 몸을 떨고 수용하고 성장하는 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10년의 시간이 김재화의 입체적인 얼굴 위로 완벽하게 덧대어졌다.
연년생 아이를 키우며 번아웃이 찾아와 작품을 고사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감독은 김재화의 가능성을 봤다고. 결과적으로 김재화의 연기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운명 같은 작품이 탄생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