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들에 대한 모창이 주를 이루었던 개그씬이 변화했다. 모사의 대상이 배우가 되고 배우와 개그맨 사이 교류가 활발해졌다. 과거에도 배우를 모사하는 개그맨들은 종종 있었다. 배우 김희애를 모사하는 김영철, 배우 주현을 모사하는 문세윤 등이다. 하지만 많은 배우들이 예능과의 접촉을 꺼리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배우를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에 당사자가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등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그맨은 적극적으로 배우의 연기를 따라하고 이것이 화제가 되면 해당 배우는 이에 반응하며 새로운 관계성을 구축한다. 때로는 직접 만나 또 다른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한다.
최근 개그맨 곽범의 성대모사가 연일 화제이다. KBS 공채 27기 개그맨 출신인 곽범은 배우의 특징을 포착해 극대화하며 웃음을 선사한다. ‘안 비슷한데 비슷한’ 곽범의 성대모사는 조롱과 개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영화계 내에서는 함부로 거론할 수 없던 배우들의 개성 혹은 쪼(‘특이한 습관’을 뜻하는 은어)를 담아낸 곽범의 성대모사 필모그래피를 훑어보고자 한다.
정우성

단언컨대 곽범의 대표작(!)은 정우성이다. 보는 사람도 정우성의 눈치가 보이는 조롱력으로 곽범은 정우성의 탈을 쓴다. 그가 연기를 시작하면 공기가 변한다. 두 팔로 몸을 감싸고 고개를 돌려 흘기듯 쳐다보면 절반은 완성이다. 쏟아질 듯 강렬한 눈빛으로 몸을 흔들며 말을 내뱉는다.
이 성대모사가 특히 중독적인 이유는 정우성만의 느낌을 잘 살려냈기 때문이다. 건들거림과 힘이 가득한 대사 톤, 잔뜩 찌푸린 미간 등 정우성의 이미지를 모두 모아놓았다. 결국 이 연기는 정우성에게 닿아 둘은 유튜브 채널 ‘경영자들’을 통해 실제 만나게 되었다. 이경영을 연기하던 곽범은 정우성 앞에서 그를 연기하고 정우성은 자신을 연기하는 곽범을 따라하는 괴상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곽범이 연기하는 이 장면은 JTBC 드라마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이다. 2011년 12월 첫 방송을 한 이 작품은 종합편성채널 JTBC의 개국특집 드라마이다. 정우성, 한지민 주연으로 억울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 양강칠(정우성)과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아주는 여자 정지나(한지민)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장혁

장혁은 지금껏 수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타겟이 되었다.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장혁의 독특한 연기 톤 때문이다. 특히 2010년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추노>에서 장혁은 추노 이대길 역을 맡아 그의 독보적인 연기력을 뽐냈다. 이후 각종 예능에서는 이대길의 대사 중 하나인 “언년아”를 부르짖는 스타들이 모습이 줄을 이었다.
곽범은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대사 없이 장혁을 베껴온 것이다. 지난 9월 9일 KBS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예능 <메소드 클럽>에 게스트로 출연한 장혁 앞에서 그는 “혀가 조절이 안 돼서 흘리듯 말하다 끝을 얼버무리는 발성”을 가졌다고 평했다. 그러고는 “대사 없이도 보여줄 수 있다”며 알 수 없는 음성을 내며 장혁 성대모사를 선보였다. 주변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이를 보고 있던 장혁 역시 실소를 터뜨리며 ‘내가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메소드 클럽>에서 곽범이 연기한 장면은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2011)이다. 이정명 작가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2011년 10월 첫 방송했다. 조선 초 세종의 한글 창제를 다루는 <뿌리 깊은 나무>는 25%의 시청률을 돌파하며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한석규

대부분의 성대모사가 개그맨만의 영역이었다면 한석규의 것은 배우들까지 즐겨 찾는다. 유지태, 정해인, 박중훈 등 후배 배우들은 한석규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대사처리를 잘 모사해낸다.
<메소드 클럽> 2회에서 선보인 곽범의 한석규 연기는 곽범다웠다. ‘곽범답다’는 것은 유사성이 높지는 않지만 특정 포인트에 집중해 느낌을 잘 살린다는 것이다. “곽 선생(곽범)은 확실히 본인 연기가 있어. 다른 사람을 절대 안 따라해”라는 이수근의 말처럼 그는 모사하지 않는 모사로 웃음을 선사한다.

곽범이 연기한 한석규의 장면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이다.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이 작품은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짙은 감수성으로 담아내며 많은 이들에게 ‘인생 영화’로 꼽힌다. 극 중 한석규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 정원을 맡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감정을 잘 담아냈다.
이경영

이경영만큼 많은 성대모사를 양산한 배우가 있을까? 권혁수, 황제성, 조충현 등 개그맨과 배우 손석구, 가수 장기하까지 도전하는 이경영 성대모사는 비슷하지 않은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이다.
그중 곽범과 권혁수, 황제성은 <경영자들>(현 <호랑이들>)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할 정도로 이경영 유니버스에 진심이었다. 각자 이경영을 연기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곽경영(곽범+이경영)은 디테일이 가장 살아있는 이경영 성대모사를 선보인다. 특히 앙 다문 입술과 비딱한 자세 등 영화에서 이경영이 자주 맡은 오만한 권력자 캐릭터의 포인트를 잘 살려낸다.

특히 곽경영만의 장기인 ‘오세안 무역 댄스’는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한 장면이다. 극 중 고병철 회장(이경영)이 이끄는 오세안 무역은 해산물을 취급하는 회사인 듯하지만 사실 마약을 유통, 납품하는 범죄를 저지른다. 오세안 무역의 TV 광고에서 고 회장은 젊고 화려한 여성들과 함께 춤을 추는데 곽경영이 이를 포착해 직접 이경영 앞에서 선보인 바 있다.
곽범은 주로 고유한 연기 톤이 눈에 띄는 배우의 성대모사에 특화되어 있다. 목소리, 표정, 자세 등 해당 배우가 주로 사용하는 분위기의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 그의 강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곽범이 모사해 주길 기대하는 배우를 살짝 열거해 본다.

배우 설경구는 곽범이 무난하게 따라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묵직한 저음과 거칠게 내뱉는 발성 등이 설경구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경영, 장혁 성대모사를 통해 유사한 결의 성대모사를 보여주었던 곽범에게 설경구의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한편, 최근 설경구는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에서 정치계를 뒤집고자 큰 계획을 세우는 대통령 권한대행 박동호 역을 맡아 한층 치밀한 연기를 선보였다.

또 한 명의 성대모함 후보는 배우 박지환이다. 사실 박지환은 유달리 독특한 보이스톤으로 아직 성대모사를 성공적으로 시연한 이가 없다. 하지만 비슷하지 않아도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는 곽범의 능력은 박지환과 같이 개성이 돋보이는 배우를 모사할 때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아이돌 그룹 ‘매드몬스터’의 탄을 연기했던 곽범이 박지환의 부캐 아이돌 그룹 ‘라이스’의 제이환을 어떻게 소화해낼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