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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엄마, 김수미의 명대사·명장면을 남긴 영화 3

성찬얼기자
배우 김수미
배우 김수미


10월 25일,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비보를 들어야 했다. 한국영화계에서, 그리고 방송계에서 전무후무한 캐릭터로 활동한 김수미의 별세 소식이었다. 향년 75세. 의료의 고도화로 '백세시대'라고 일컫는 시대에 김수미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순간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71년 데뷔 후, 김수미는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넘나들며 활동했고 직설적이면서도 포근한 상반된 감성을 그 자신에게 담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무엇보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특유의 찰진 대사 처리가 일품이라 여러 명대사들을 남기기도 했다. 김수미를 추모하며 그가 대중에게 웃음을 안겨줬던 명대사 3개를 다시 회상한다.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와"

영화〈사랑이 무서워〉 출연 장면. 보기만 해도 음성이 들리는 사람이 기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사랑이 무서워〉 출연 장면. 보기만 해도 음성이 들리는 사람이 기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2024년 현시점에서 가장 유명한 김수미의 명대사는 "개밥쉰내"와 "아무튼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와"일 것이다. 이른바 '입벌구'(입만 벌리면 구라의 준말)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 해당 영화는 임창정, 김규리의 영화 <사랑이 무서워>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는 모든 것이 완벽한 홈쇼핑 모델 신소연(김규리)과 그를 짝사랑하지만, 시식 능력 외에는 평균 이하인 유상열(임창정)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해당 장면은 신소연이 란제리 모델로 나오는 홈쇼핑 광고를 보던 가운데 그의 엄마(김수미)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잔소리를 퍼붓는 장면. 엄마가 방에 들어오자 창열은 신속하게 영상을 끄려고 하지만, 영상이 꺼지지 않고 그 모습을 본 엄마는 한심하단 듯이 아들을 비난한다. 창열이 '야한 거 아니고 란제리고, 동료 모니터링해주는 것'라고 항변하지만, 엄마는 "아무튼 입만 벌리면 그짓말이 자동으로 나와"라고 무시한다. 거기다 엄마는 바닥에 떨어진 털(!)들을 치우며 "짐승 털갈이해?" "방에서 개밥쉰내가 나"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한다. 하필 소연에게 걸려온 전화를 엄마가 받고 그대로 가져온 탓에 소연이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어 창피함에 몸부림치는 창열이 화룡점정. <사랑이 무서워>는 40만 관객을 동원해, 흥행 성공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 장면 하나만큼은 천만 관객 못지않게 유명하다. 이후 이 대사들이 김수미의 애드리브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노란 테이프로 털을 치우는 것까지 완벽한데) 김수미의 디테일과 순발력이 더욱 돋보이게 됐다.
 

"애들 겁나게 바쁜데 내가 태어났나벼"

〈가문의 위기〉 큰아들이 데려온 예비 며느리의 직업을 들은 순간. (사진 출처=쇼박식 공식 유튜브 채널)
〈가문의 위기〉 큰아들이 데려온 예비 며느리의 직업을 들은 순간. (사진 출처=쇼박식 공식 유튜브 채널)


2005년은 TV스타 김수미가 무비스타로 거듭난 해였다. 당시 그가 출연한 영화 중 <마파도>와 <가문의 위기> 성공을 거두면서 스크린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게 됐다. 히트작 <가문의 영광>의 기세를 이어갈 <가문의 위기>는 결혼하기 싫었지만 결혼해야만 했던 전작의 주인공과 달리 결혼하고 싶은 인재(신현준)와 진경(김원희)가 깡패-검사라는 직업적 차이(?) 때문에 겪는 일을 그린다. 김수미는 뒷골목을 꽉 잡고 있는 백호파의 대모 홍덕자 역을 맡았다. 전작처럼 조폭 가족은 호남 출신이란 특징을 가지고 있어 김수미에겐 연기와 애드리브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이 됐다.

전작이나 이 영화나 엑기스라면 역시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는 첫 대면 순간일 것이다. 홍덕자는 생일을 맞아 큰 잔치를 열고 인재는 가족들에게 진경을 소개하려고 한다. 진경을 공무원으로만 알고 있던 덕자가 근무처가 어딘지 묻고, 진경은 서울지검 검사임을 밟힌다. 잠깐의 당혹감이 지나가는 사이, 덕자는 인재에게 나지막하게 찐한 욕을 내뱉고(C*놈) 황급하게 지인(이라 쓰고 부하)들을 내쫓듯 보내준다. 그러면서 "애들 겁나게 바쁜데 내가 태어났나벼"라며 자조적인 농담까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검사 앞에서 가리기 위해 진경에게 각종 거짓말을 늘어놓는데, 화려한 언변과 달리 점점 초점이 사라지는 영혼 없는 눈빛이 일품이다.

진경이 사시미가 왜 있는지 묻자 온갖 너스레를 떨지만, 눈빛은 점점 공허해지는 것이 포인트.
진경이 사시미가 왜 있는지 묻자 온갖 너스레를 떨지만, 눈빛은 점점 공허해지는 것이 포인트.

 

"세상 재미로만 살 거면 벌써 죽었다"

〈마파도〉 진안댁
〈마파도〉 진안댁


앞서 언급한 <마파도>는 한국영화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실험작이면서 동시에 흥행작이다. 이정진과 이문식과 함께 여운계, 김수미, 김을동, 김형자, 길해연 등 이른바 '연기 경력 도합 100년'에 달하는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섰기 때문. 당첨금 160억 원짜리 로또용지를 들고 도망간 끝순(서영희)를 잡기 위해 건달 재철(이정진)과 비리 형사 충수(이문식)가 도착한 마파도는 억척스러운 다섯 할매가 사는 곳. 김수미는 그중 어딘가 신통방통한 구석이 있는 진안댁 역을 맡았다.


대체로 코믹한 상황이 인상적인 영화지만 마냥 웃을 수 있는 코미디와는 거리가 있다. 당장 20년 동안 남성 하나 없이 삶을 꾸려온 할매들이기에 그동안의 관계가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 이 각자의 사정은 재철과 충수가 섬에 끝순이 없음을 확인하고 섬에서 떠나기 하루 전, 진안댁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섬에서의 마지막 날, 해변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두 사람에게 진안댁이 온다. 충수가 "우리 가면 할매들 무슨 재미로 살아?"라고 농을 던지는데, 진안댁은 "세상 재미로만 살 거면 벌써 죽었다"라고 덤덤하게 받아친다. 그렇게 다른 할매들의 사연을 알려준 진안댁은 "할매는 사연 없어?"라는 질문에 "사연? 인생사 별 거냐? 고무신 밑창에 묻은 껌 같은 것이여, 찐득찐득허니"하고 우회적으로 답한다.
 

〈마파도〉
〈마파도〉


사실 이 장면은 배우 김수미의 개인사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 더 찡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김수미는 2000년대 초, 연기 활동을 몇 년간 하지 못할 만큼 큰 사건을 겪었는데, 당시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상실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심적 위기를 딛고 다시 복귀했으며 그렇게 만난 작품 중 하나가 <마파도>인 것. 그런 전후 사정을 안 관객이라면 세상사에 초연한 듯한 대사를 덤덤하게 연기하는 김수미의 모습에서 진안댁뿐만 아니라 김수미의 마음도 읽었으리라.  
 

물론〈마파도〉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물론〈마파도〉에서도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연기 경력 50년이 넘는 배우 김수미의 인상적인 모먼트를 짚는다면, 소개한 명대사 3개만 가지고는 한참 부족하다. '욕쟁이 할머니'라는 그의 캐릭터도 그저 대표적인 이미지일 뿐, 그가 연기한 캐릭터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위의 세 작품, 명대사 3개만으로도 김수미가 한국 대중에게 얼마나 통쾌한 웃음을, 인상적인 순간을 선사했는지는 또렷하게 보인다. 함께 공유하고 싶은 기억에 남는 김수미의 작품과 명대사가 있다면 댓글로 부탁드리며,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