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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영화의 전설적인 감독 빅토르 에리세가 31년 만에 내놓은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

추아영기자
〈클로즈 유어 아이즈〉 포스터
〈클로즈 유어 아이즈〉 포스터

 

스페인 내전의 상처를 그려낸 영화 <벌집의 정령>(1973) 단 한 편만으로 세계의 거장이 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31년 동안의 오랜 공백을 깨고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돌아왔다. 그는 10년에 한 번꼴로 작품을 내놓는 대표적인 과작 감독으로 <벌집의 정령> 이후 <남쪽>(1983),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등의 영화를 남겨 둔 채 오랜 시간 영화계를 떠나 있었다. 이번 작품은 다큐멘터리인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제외하면, 그의 세 번째 극영화가 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22년 전 실종된 배우의 행방을 찾으며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노년의 감독 이야기를 다룬다. 이번 영화에서는 감독의 전설적인 첫 작품 <벌집의 정령>에서 다섯 살 귀여운 꼬마 아나로 출연했던 배우 아나 토렌트가 이젠 중년이 되어 출연해 영화 안팎의 기적을 그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한평생 필름 영화를 만들어 온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필름 영화에 보내는 찬사, 러브레터와 같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미겔(왼), 아나
〈클로즈 유어 아이즈〉 미겔(왼), 아나

필름 영화를 만들던 노년의 감독 미겔(마놀로 솔로)은 22년 전 실종된 친구이자 자신의 미완성 영화 ‘작별의 눈빛’에 출연한 배우인 훌리오(호세 코로나도)를 찾아 나선다. 영화 촬영 도중에 사라진 훌리오는 바닷가 근처에 신발 두 짝만 남겨둔 채 흔적을 감췄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의 사라짐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법한 이 사건은 한 TV 탐사 프로그램에 의해 파헤쳐진다. 미겔은 방송 제작진의 출연 요청에 응하고, 훌리오를 찾아 나서면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필름 영화에 대한 애수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는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서사와 함께 필름 영화에 대한 그의 애수와 그리움이 담겨 있다.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는 노년의 감독 미겔은 감독의 자기 반영적 인물이다. 훌리오가 사라지면서 미완성 영화로 남게 된 미겔의 영화 ‘작별의 눈빛’에는 두 번째 영화 <남쪽>을 미완성 영화로 남겨 둔 에리세 자신의 경험이 담겨 있다. 미겔은 방송을 본 요양원의 복지사로부터 훌리오와 인상착의가 똑같은 남자에 대한 말을 전해 듣는다. 그는 자신의 배우이자 친구를 찾아서 요양원으로 향한다. 역행성 건망증에 걸린 훌리오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잃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는 미겔과 자신의 딸 아나(아나 토렌트)마저 알아보지 못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훌리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훌리오

미겔과 훌리오는 둘 다 필름 영화가 도태되고 난 뒤 영화 산업계에서 떠나거나 사라진 인물로 표상된다. 그중 미겔은 필름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 훌리오는 필름 영화를 망각한 사람들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야누스상의 이미지는 미겔과 훌리오 둘의 관계를 비유하고 있다. 결국 미겔이 훌리오를 찾아 나서는 여정은 빅토르 에리세 감독 자신이 필름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감독은 이 여정을 미스터리 장르의 문법으로 그려낸다.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이 영화에서 내게 주어진 과제는 ‘알 수 없는 수수께끼(enigma)라는 개념을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였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스릴러 영화에서 사용되는 관습을 사용해야 했다.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영감을 받아 여행을 떠나는 것. 더 많은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 장치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 여기서부터는 본문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다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영화 속 영화 장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영화 속 영화 장면

기억을 잃은 훌리오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저버린 영화의 촬영 소품을 간직한다. 미겔은 여기에 미약한 희망을 내건다. 그는 훌리오에게 미완성 영화의 마지막 두 장면을 보여주기로 한다. 영화는 다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은 과거 필름 영화를 상영했지만 지금은 폐관된 극장으로 향한다. <시네마 천국>(1988)의 마지막 장면을 변주한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169분간 차곡차곡 쌓아 온 파토스가 폭발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극장에는 미겔과 훌리오, 아나,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복지사, 두 명의 수녀가 모인다. 그들은 미겔이 정해 준 자리에 각각 앉는다. 이윽고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두 장면이 상영된다. 훌리오는 미동도 없이 화면을 바라본다. 아나는 가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은 그의 표정을 살핀다. 정방향으로 있는 영화 속 젊은 훌리오는 무언의 말을 건네듯 강렬한 눈빛으로 관객의 자리를 바라본다. 영화 속 자신과 눈을 맞추던 훌리오는 이내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영화 상영이 시작되기 전 미겔은 관객석에 한데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앉힌다. 두 명의 수녀는 스크린에서 가장 먼 자리에 두고, 훌리오와 아나를 스크린 앞쪽에 함께 앉게 한다.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와 복지사는 두 무리의 중간에 앉는다. 미겔의 자리 구분은 훌리오의 과거에 대해 아는 정도에 비례한다. 이는 곧 영화 내내 소멸된 존재로 그려진 훌리오의 원관념으로 볼 수 있는 필름 영화에 대한 이해로도 귀결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감독은 이들의 자리 구분으로 현대의 관객을 분류한다. 필름 영화에 직접 출연한 훌리오와 과거 에리세의 영화에 출연한 아나는 필름 영화를 체험한 세대로 표상된다.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와 복지사는 자료만으로 필름 영화를 간접 체험한 지금의 관객, 두 명의 수녀는 영화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작중 시간적 배경이 2012년인 걸 감안하면,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세대는 특정 인물로 그려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각각의 자리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여준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

영화 상영 중에 영화를 보고 있어도 감응하지 못하는 훌리오의 모습에는 지금의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담겨 있다. 감독은 TV와 스마트폰, 유튜브 등 수많은 매체와 콘텐츠가 극장의 영화를 대체하고 있는 지금의 관객을 필름 영화에 감응할 수 없는 세대로 바라보는 듯하다. 과거 자신의 모습과 필름 영화를 망각한 훌리오는 필름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현대의 관객과 같다. 결국 필름 영화는 기적을 일으키지만, 그 기적은 필름 영화를 직접 체험한 세대에서 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