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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실려온 시체들. 내 뇌는 이 모든 걸 잊고 싶어 하겠지만 카메라는 이 모든 걸 기억하게 할 거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씨네플레이
〈마리우폴에서의 20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미디어에 넘쳐난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전쟁의 정당성을 다투는 말들, 방위산업은 한국 같은 신흥 무기 수출국에게는 신성장동력이니 앞으로 격화될 신냉전 시대에 유망산업으로 꼽고 수출 판로를 개척하는 중이라는 보도들, 러시아에 파병된 '북괴군부대를 폭격, 미사일 타격'으로 공격하자는 한 여당 인사의 무감한 문자까지. 이들에게 전장은 흡사 숫자와 그래픽으로만 구성된 가상의 공간이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은 그곳에 없고,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기회인 힘의 각축과 거기서 편취할 이득만 존재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이 비추는 전장은 정치적 신념을 다투고 최첨단 무기들이 조명되는 공간도, 영웅적으로 맞서는 우크라이나군의 '스펙터클'이 전시되는 무대도 아니다. 취업전쟁, 젠더전쟁... 은유로의 전쟁에 익숙한 우리 앞에 실재하는 고통, 슬픔, 유혈, 비참함, 통곡이 살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도 일련의 사태를 당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넋이 나간 보통 사람들의 얼굴로 전쟁은 현현한다.

 


전쟁은 지옥의 모습을 하고

〈마리우폴에서의 20일〉 거대한 아수라장. 전쟁은 지옥의 모습을 한다.

“거리에서 실려온 시체들. 내 뇌는 이 모든 걸 잊고 싶어 하겠지만 카메라는 이 모든 걸 기억하게 할 거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中 기자의 내레이션

크림반도의 길목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마리우폴. 러시아에 가장 먼저 침공당한 우크라이나 남동부 항구 도시다. 영화 초반, 도시는 평온해 보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군사작전' 발표에도 마리우폴 시민들은 일터로 발걸음을 옮기고, 거리에는 버스가 다닌다. 그때 “전쟁은 폭발로 시작되지 않는다. 침묵에서 시작된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평온함은 사실 폭풍 전야의 적막이었고, 이내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더니 폭탄이 도시 곳곳을 헤집어놓는다.

 

개전 초, 러시아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서방 언론은 철수를 결정한다. 그러나 AP 통신 우크라이나 현지 인력 취재팀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땅의 비극에서 차마 눈 돌릴 수 없었다. 전쟁의 참상을 국제 사회에 알릴 최후의 미디어이자 언론인의 의무를 짊어진 우크라이나 출신 영상기자 체르노우, 사진기자 에우게니이 말로레카, 영상 프로듀서 바실리아 스테판넨코 등 AP 통신 취재진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점차 포위되는 마리우폴에서 스무날 동안(2022년 2월 24일부터 3월 15일까지)에 벌어진 참상을 카메라에 담으며 민간인 피해자들의 입을 대신하기로 결심한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인터넷과 전화가 끊겨 고립된 도시에서 편집자에게 위성 전화로 조각조각 전송한 민간인 피해 영상은 유수의 방송 미디어를 타고 세계 각지에 전파된다. 축구를 하다가 폭격을 당해 다리가 날아가 버린 소년, 폭격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통곡, 영안실이 부족해 병원 지하실에 첩첩이 쌓인 시신들, 골반뼈가 으스러진 채 들것에 실려 긴급 후송되는 임산부, 전기·수도·난방 없이 운영되는 와중에 폭격마저 맞는 병원, 마을 공터에 길게 참호처럼 판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한데 묻히는 시신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영상을 러시아는 "배우들을 고용해 조작한 가짜 뉴스"라고 반박한다. 장소를 옮겨가며 다양한 전장의 참상을 기록하려 할수록 죽음의 위험은 커진다. 자고 일어나면 러시아군의 전선은 중심부로 전진해있고 민간인 희생자 수는 늘어나있다. 기록한 영상들을 온전히 반출할 수 있을까는 부차적 문제다. 숨이 붙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지조차 이제 확신할 수 없다.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질문

〈마리우폴에서의 20일〉

"계속 촬영해야 할지, 멈추고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中 기자의 내레이션

 

러시아의 공습으로 심정지 상태에서 실려온 아이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의료진은 이를 촬영하던 AP의 기자들에게 외친다. “이 망할 놈들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찍으세요. 푸틴 XX한테 이 아이의 눈을 보여주세요. 여기 울고 있는 의사들도 놓치지 말고요. 그 망할 놈한테 똑똑히 보여주세요.”

AP 기자들은 마리우폴에 남은 마지막 언론인들이다.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과 부서지는 도시의 풍경을 치열하게 기록했다. 취재가 항상 쉽지는 않았다. 심폐소생술을 하던 의료진처럼 전쟁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나 지원에 도움이 될 취재에 기꺼이 협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극 앞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취재진을 향해 "집도, 전 재산도 버리고 왔다. 대체 뭘 찍느냐?"라 분노하며 '기레기'라는 멸칭을 내뱉는 이들도 있다.

폭격으로 부서진 집을 보며 오열하는 한 여인을 찍던 기자는 "계속 촬영해야 할지, 멈추고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살던 집이 파괴되고 죽어가는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저널리즘은 실질적인 힘이 될 수 있을까. 비극이 특종이 되고 특종은 다시 가짜 뉴스로 조롱되는 세상에서 카메라는 계속 촬영을 이어가기도, 그렇다고 멈추기도 힘들다. 언론인으로의 고뇌가 영화의 저류에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팀은 이 현실을 사실대로 기록하기로 결정한다.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의료진에게 "지금 기분이 어때요?", "지금 느끼고 있는 걸 말해주세요"라고 불편한 질문도 이어간다.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기자의 의무이자 직업윤리이기에.

 


보기 고통스러워야 합니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고통스러울 겁니다. 지켜보기 고통스러울 광경이죠. 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워야만 합니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中

포격 지점이 마을에 가까워지고 중기관총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러시아군의 탱크가 마지막 보루인 병원을 압박해 오고 있다. 기자들은 분주해진다. 비무장 시민과 환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를 담고 싶지만, 카메라를 들고 건물 옥상을 활보하다 적군 저격수의 표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목숨과도 같은 하드 드라이브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AP 통신 취재팀은 점령지에서 100km를 내달리고, 러시아 검문소 15개를 통과한다. 탐폰, 자동차 좌석 아래에 하드 드라이브와 각종 자료들을 숨긴 채였다.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하는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감독

가까스로 빠져나와 영화를 완성한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은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이 영화를 만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거다"라는 예상치 못한 발언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감독은 "이 모든 영광을 러시아가 우리 수만 명을 죽이지 않은 세상과, 갇혀 있는 인질들이 석방되고, 고국과 시민을 지키다 감옥에 갇힌 군인들이 풀려나는 세상과 바꾸고 싶다"라는 소감으로 하루아침에 일상을 잃은 자국민을 위로하고,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기록하고, 진실이 널리게 퍼지게 하며, 마리우폴의 시민들과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라 발언하며 오늘날 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94분 길이의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고통이다. 필자는 기록 10일째 되는 날 영화가 어서 끝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더 이상 비슷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전쟁의 비극성을 더 진지하게 사유해야 한다. 전쟁은 인간의 얼굴을 한다는 것을,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는 것을 반복해 말해야 한다. AP 취재팀이 본사 편집자에게 전송하는 영상에는 “편집자 주의사항 ‘잔인한 장면 주의’”라는 메모가 붙어있다. 그리고 화면 위로 “고통스러울 겁니다. 지켜보기 고통스러울 광경이죠. 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워야만 합니다.”라는 내레이션이 관객에 당부하듯 나지막이 오버랩된다.

(마리우폴은 86일 만에 끝내 러시아에 함락당한다. 마리우폴은 2022년 5월 이후 현재까지도 러시아가 실효 지배 중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