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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 오시마 나기사, 집단 속 억압된 개인을 바라보다(2)

씨네플레이

 

역사의 시공간에서 현대성을 이야기하다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감각의 제국>(1976)과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폄하되는 감이 있는) <열정의 제국>(1978)을 잠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전까지 단 한순간도 현대일본이라는 당대적 시공간을 벗어나지 않았던 오시마 나기사가 어째서 갑자기 40년 전(실제로 ‘아베 사다 사건’은 1936년의 일.)의 이야기를, 그것도 탐미적 미장센이 들어찬 폐쇄적 공간의 실내극을 찍은 것인가? 일종의 단절이라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타락천사>(1995) 이후의 왕가위는 <해피투게더>(1997)에서처럼 홍콩을 떠나거나 <화양연화>(2000)에서처럼 60년대로 회귀하고, <2046>(2004)의 일부는 미증유의 미래를 향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들이 홍콩의 본토 반환 이후의 작품들임에도 동시에 그 안에 모종의 내밀한 (또한 중국 당국 입장에서는 불온한) 정치적 함의를 감추고 있는 걸 상기해보자. 오시마 나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 이상 정치적 발화가 힘들어진 일본사회와 일본영화계의 억눌린 현실 속에서 자신이 운신(運身)할 영화적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억눌린 처지는 영화 속 인물의 설정과 성격에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감각의 제국〉과 〈열정의 제국〉(오른쪽)
〈감각의 제국〉과 〈열정의 제국〉(오른쪽)

우선 <감각의 제국>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한 장면. 성애의 낙원이라 할 밀실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왕성한 정력을 과시하던 난봉꾼 키치조는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는 정반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본 채, 혼이 빠져 무기력한 인형처럼 터덜터덜 걷는다. 도로 한가운데는 대륙 출정을 위해 행진하는 일본군의 행렬이 가로지르고 있고, 키치조는 애써 이를 외면한다. 건너편 길가에선 침략의 군대를 환송하며 일장기를 흔들고 환호하는, 비판정신을 잃고 제국주의의 일부로 포섭되어 버린 일반 대중의 모습이 배치되어 대조를 이룬다. 이 장면은 오시마 나기사의 후기작 전체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다. <일본춘가고>(1967)나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1967) 등에서 그랬듯, 남녀 성별을 막론하고 오시마의 영화 속 인물들이 갖는 방자한 성적 에너지가 변혁을 원하는 이들의 욕망과 충동을 상징하는 코드임을 상기하면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전장의 크리스마스〉

식민지 확장을 위한 군국주의의 침략전쟁에 찬동하는 30년대의 대중은 고스란히 일본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상에 매혹되고 운동권을 도외시하며 보수화된 70년대의 대중과 고스란히 겹친다. 또한 그들만의 밀실에 갇힌 채 외부로는 성적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하는, 그러다 점점 말라비틀어져가는 키치조의 처지는 60년대에는 혁명을 꿈꿨지만 더 이상의 발화를 허락받지 못한 채 차츰 고립되어 죽음의 선을 타게 되는 일본 좌파 운동의 상황과 정확히 대응된다. 이 절망적인 고립의 모티브는 쇼와가 아니라 1895년 메이지 말엽의 농촌으로 옮겨간 <열정의 제국>에서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된다. 이 영화의 플롯은 「반금련」을 일본적으로 변주한 ‘전설의 고향’이다. 토요지는 젊은 유부녀 세키를 탐하고 밀회(密會)로 정을 사통하던 둘은 합심해 불륜의 방해물인 세키의 중늙은이 남편 기사부로를 살해한다. 우물에 밀어 처넣은 시신의 존재와 유령의 출현은 기성의 도덕과 질서로부터 단절하고자 한 젊은 세대의 불안과 죄의식을 환기시키고, <감각의 제국>의 일본군 대신 등장해 사건을 수사하고 둘을 고문하는 순사는 국가권력을 표상하며, 자멸을 향해 치달아간 일본 좌파의 몰락에 대한 한 편의 메타포를 완성한다. 젊은 세대와 변혁의 동력이 없어진 1억 2천만 인구의 무라샤카이(村社會), 일본은 나날이 시들어갈 것이란 오시마 나기사의 염세적 전망은 토속적 민담의 외피를 쓴 극의 이면에서 은근한 마각을 드러낸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전장의 크리스마스〉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요노이 대위와 셀리어스 대령의 관계는 앞의 두 작품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일단 두 사람의 과거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는데, 요노이는 로렌스와의 대화에서 (공교롭게도 <감각의 제국>의 배경이 된 그 해인) 1936년 2월 26일의 사건으로 인해 동료들이 숙청되었지만 자신은 만주에 파견되어 죽은 이들과 함께하지 못한 채 살아남았음을 고백한다. 이는 일본 군부 내에서 ‘황도파’라 불리던 청년장교들이 ‘통제파’가 장악한 기존의 군부를 전복하고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발상에서 일으킨 쿠데타, 즉 ‘2.26사건’을 이르는 것이다. 불발된 쿠데타, 분출될 출구를 잃은 리비도는 실패한 혁명과 등가비교 될 수 있는 것인가?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봉기했으나 실패하고만 젊은 세대의 무리라는 대략적인 윤곽에서 오시마는 황도파와 그 일원인 요노이를 다시금 좌절된 일본 좌익세력에 대응시킨다. 물론 황도파 역시 정권의 구상만 다를 뿐 본질적으론 다를 바 없는 군국주의자들(요노이의 캐릭터에는 영감을 준 모델로 미시마 유키오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이었고, 오시마는 이 영화에서 요노이와 하라 상사로 표상되는 군국주의 일본이 제네바 협정까지 무시하면서 할복을 비롯한 자신들의 사무라이 문화와 관습을 서구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의 가해자였음을 분명히 하면서 이 인물이 갖는 함의는 좀 더 복합적인 면을 띤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전장의 크리스마스〉

일단 요노이라는 인물은 자기 안에 내재된 변혁에 대한 갈망과 그에 등치되는 성적 욕구 내지 정체성을 억압하고 살아가는 <감각의 제국>과 <열정의 제국> 속 주인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재판정에서부터 요노이는 셀리어스에게 동성애적 감정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지만, 정작 매혹의 대상인 셀리어스에겐 성적인 뉘앙스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플래시백으로 드러나는 과거사가 그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지어준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유능한 변호사로 성공가도를 달렸고, 군인으로서도 상당한 전공을 세웠지만, 셀리어스는 곱추인 동생이 사립학교 내에서 학우들의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의 표적이 되는 상황을 보고도 그에 맞서 항의하지 않고 모른 척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을 원죄처럼 마음의 짐으로 품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집단의 부당함에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저항조차 하지 않은 절름발이 지성인이다.(그 점에서 셀리어스는 <감각의 제국>에서 일본군의 행진을 외면하는 키치조의 성격을 일부 공유한다.) 그래서 셀리어스가 요노이에게 키스를 날리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무척이나 복잡다단한 의미의 층위를 한 번에 전달한다.

(인물의 심리적 혼돈과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는 듯한 키스 장면의 묘한 흔들림은 사실 의도가 아니라 카메라 결함으로 인한 실수였다. 그러나 실수로 얻어진 이 첫 번째 테이크가 본래의 구상을 넘어 훨씬 영화에 잘 맞는다는 감독의 판단하에 본편에 수록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탄생하게 되었다. 뒷날 오시마는 이를 두고 ‘기적’이라 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전장의 크리스마스〉

통수권자인 덴노의 승인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변방의 한직으로 밀려난 쿠데타 세력의 일원인 요노이에게 있어서 이 키스는 제국의 권력질서, 사무라이 문화로 포장된 집단적 남성성의 껍데기 아래 은폐해왔던 개인성과 여성성의 당혹스러운 폭로인 동시에, 감춰두고 억눌려져야 했던 성적 욕망, 그리고 체제에 균열을 내고자 했던 혁명의 정념을 분출하는 찰나의 황홀경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셀리어스에게는, 과거에의 속죄이자 자기희생을 통한 트라우마의 극복이며, 더 나아가 전체주의 폭력에 대한 당돌한 항의의 표시가 된다.(여담으로 감독은 셀리어스의 모델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의 피터 오툴에게서 찾았고, 요노이의 인상과 성격은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를 의식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동성애는 짝사랑과 같은 한 쪽의 일방적인 매혹이기에 인간 대 인간의 사랑으로서는 결코 성립되지 않을 엇갈린 동상이몽이지만, 속해있는 진영과 정념이 다를지언정 주류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로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질서의 비인격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몸부림이라는 큰 틀에서는 만날 수 있게 된다. <감각의 제국>에서 도저했던, 밀실에서 자멸하는 폐쇄적 숙명론의 염세주의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선 개방된 연병장에서의 폭로로 일말의 희망적인 뉘앙스를 남기며 뒤집혀진다. 

칸영화제 기자회견장의 데이빗 보위와 오시마 나기사 감독
칸영화제 기자회견장의 데이빗 보위와 오시마 나기사 감독

영화가 현실과 이념적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보통 많은 작가들은 주제와 사안의 중대함에 경도된 나머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 개개인의 실존을 잊곤 한다. 그러나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이라는 국가상, 일본의 사회병리를 비판함에 있어서도 국가와 사회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개인을 큰 흐름에 휩쓸려갈 뿐인 무의미한 모래알로 평면화시키곤 하는 전체주의적인 관점과 정서에 매몰되지 않았다. 도리어 개인의 인간상과 내면적 욕망에 먼저 주목하고 그들의 관점에 입각해 들어가면서, 희생양 아니면 가해자라는 식의 단순함으로는 재단하고 규정할 수 없는 인간과 현실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들추고 탐구하고자 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아무리 강고한 체제라도 끝내 다 통제하며 짓누를 수 없고 그러기에 혁명의 불씨까진 되지 못할지언정 거기에 자그마한 균열은 낼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개인들이 갖는 혁명적 에너지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