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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베스트] 조재휘 평론가의 사사로운 한국 영화 리스트

씨네플레이
〈리볼버〉
〈리볼버〉


1위. <리볼버>(감독 오승욱)


<무뢰한>(2015)을 통해 하드보일드의 인물과 접목된 멜로드라마라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장르의 조합을 일구며 자신의 색채를 선명히 드러낸 오승욱 감독은 긍정적인 비평의 반응과 관객층 일각의 컬트적 호응은 얻었으나, 그럼에도 다시 한번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들을 한데 엮어내고, 묵직한 감정의 결을 세련된 화술로 표현하는 그만의 장기는 오랜만의 복귀작 <리볼버>에서 다시금 발휘되어 예술적 결기로 승화되기에 이른다.
 

<리볼버>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전형적이다. 누가 봐도 이것은 <포인트 블랭크>(1967)나 <찰리 배릭>(1973, 국내명 <돌파구>) 같은 할리우드 고전기 하드보일드 범죄극, 요컨대 배신한 동료를 찾아가 응징한다거나 산전수전 다 겪고 피로에 찌든 중년이 마지막 한탕을 하고 재은퇴한다는 식의 플롯을 신흥 아파트 개발지역이라는 한국 배경에 여성 주인공판으로 바꾼 것에 가깝다. 오승욱의 비범한 점은 익숙한 장르의 틀을 가져오고는 결이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리볼버>라는 제목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인데, 장르 서사의 줄거리를 따라가지만 복수의 흥분과 총격전의 쾌감 같은 통속성을 절제하고 걷어낸 자리에는, 파도가 휩쓸고 간 해변에 뻐끔거리는 소금거품처럼 씁쓸하고도 애잔한 인물의 감정과 무드만이 오롯이 남는다.
 

부패형사로 경력이 끝난 수영(전도연)의 목적은 표면상으론 돈과 아파트지만 실상은 죽은 옛 연인이 남긴 진심의 조각들을 찾아 헤매고, 자신에게 떨어질 콩고물만 노리는 듯했던 술집마담 정윤선(임지연)은 의외의 의리를 보여주며, 범죄조직의 보스 그레이스(전혜진)는 냉정함의 이면에 모성애를 감추고 있고, 거칠 것 없는 망나니 앤디(지창욱)는 주변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모종의 두려움을 품고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겉으로 보이는 표면과 내적 심리가 다르게 그려지며 주어진 역할의 평면성을 극복하는 매력을 뿜어낸다.
 

<킬리만자로>(2000)와 <무뢰한>에서 그랬듯, 오승욱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회의 밑바닥을 사는 아웃사이더들이었다. 폭력과 욕설을 서슴지 않으며 당장의 감정과 세속적 이익에 목을 매는 속물들이지만, 감정의 샘이 말라버렸을 것 같은 그런 인물들에게서 한 줄기 인간적 온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보는 이에게 강렬한 마음의 여진을 자아낼 수 있음을 감독은 영악하리만치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감정과 성격 묘사는 대화 장면마다 감탄스러우리만치 유려한 리듬감과 타이밍을 재고 구사되는 샷의 정밀한 구성을 통해 뒷받침된다. <리볼버>는 오늘날 유혈낭자하고 자극적인 이미지 전시에 거리낌 없는 한국영화의 윤리적 퇴락에 대한 묵직한 경고이면서, 그런 잔재주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영화적 품위와 쾌감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원숙한 장인의 성취다.

 


〈베테랑2〉
〈베테랑2〉


2위. <베테랑2>(감독 류승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이래 <밀수>(2023)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액션의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선 류승완이지만, 의외로 액션영화의 연출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항상 양가적이었다. 활동사진적 쾌감에 대한 흥분과 매혹을 감추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폭력은 엄연히 고통스럽고 나쁜 것임을 전하는 걸 그는 잊지 않았다. 때리는 사람의 동작 못지않게 맞는 사람의 고통을 전달하는 반응 숏을 비중 있게 잡으며, 스타일화된 ‘액션’을 선보이면서도 동시에 ‘폭력’의 현실성 또한 담아내며 신나는 활극 뒤에 씁쓸한 페이소스를 남기곤 했던, 작가로서 일관된 그의 윤리적 태도는 <베테랑 2>에 이르러 마침내 영화 자체의 주제로 전면에 드러난다. <베테랑>(2015)의 성공을 재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범죄도시 2>(2022) 이래 해당 시리즈의 속편들이 그랬듯, 악역의 설정만 살짝 바꾸어가며 동일한 플롯을 반복 재생산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창작자로서 류승완의 결기는 그러한 시대의 트렌드와 대중의 기대를 거스르면서 망가져가는 시대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대중영화를 통해 공유하고자 한 데에 있다.
 

‘I, THE EXECUTIONER’라는 영문 제목이 시사하듯 <베테랑2>는 합법과 불법의 영역에 놓인 두 명의 ‘집행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도철(황정민)이 노회한 베테랑 형사로 언행은 건달 같아도 법질서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사태를 해결하려 한다면, 자경단 ‘해치’의 실체인 박선우(정해인)는 경찰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는 사적 제재를 일삼으며 영웅 행세를 한다. 부득이하게 물리력을 동원하지만 사람을 구하기 위해 쓰는 것과, 진정시키고 제압하는 선을 넘어서 거리낌 없이 부상을 입히고 목숨을 빼앗는데 정의를 운운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법은 믿고 의지하기엔 미덥지 않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순간 우리는 괴물이 된다. 정의에 대한 광기 어린 요청이 도리어 정의의 실종을 불러오는 역설, ‘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딜레마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이다.
 

<베테랑2>의 근간에는 정의를 빌미 삼은 폭력의 정당화, 이른바 ‘사이다’에 취해 무감각해져가는 한국사회에 대한 근심, 그리고 학교폭력 피해자인 아들을 안쓰럽게 여기는 서도철의 태도에서 드러나듯 파국의 현실을 자식 세대에게 떠넘기면 안 된다는 어른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대중영화감독으로서 성실한 만듦새로 필름메이킹에 임하겠지만,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류에는 결코 영합하지 않겠다는 류승완의 선언처럼 보인다. 만약 다음 편이 만들어질 계획이 있다면 이 깊은 시선을 연결하면서도, 서도철 한 사람의 서사에 집중하느라 희생된 강력수사대 팀원의 개성과 팀워크의 재미 또한 되살아난 시리즈의 결정판이 나와주길 바란다.


 

〈장손〉
〈장손〉


3위. <장손>(감독 오정민)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한국 사람이라면 다들 겪어보았음직한 제사 준비의 떠들썩함, 가족의 풍경을 비추는 걸로 열리며 곧 그 세부를 파고들어간다. 전통적 가부장제가 드리운 오랜 관습의 그림자는 장손인 성진(강승호)이 오랜만에 대구의 본가로 찾아오자 다른 가족들이 있을 땐 틀지 않던 에어컨을 켜라고 하는 데서부터 마각을 드러낸다. 성진의 할머니와 어머니, 고모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각자의 양상은 다르지만 한국적 가부장제의 억압에 희생당한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그 질서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반자발적 기여자이자 톱니바퀴 부속이라는 이중성을 공유한다. 한편 이런 시대착오적 가부장제의 기득권층이라 할 할아버지는 기저귀 없이는 용변 보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아버지는 가사와 생계를 다 어머니에게 떠넘긴 무능력자이며, 고모는 입원한 남편의 병수발을 위해 병원에서 산다.


영화는 다음 세대의 관찰자인 동시에 가족의 내부자라는 다소 기묘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진의 시점에 관객을 동참시키면서 한국 전통의 가부장제 내부에서 벌어지는 풍경과 그로 인해 인물들이 힘겹게 감당해 내야 했던 상처를 지긋이 응시하게 한다. 좀처럼 클로즈업을 쓰지 않고 넓은 화각의 숏을 주로 구사하는 건, 가족 구성원을 가급적 한데 아우르는 동시에 관조의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프레이밍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감독은 마지막 가쁜 숨을 내몰아쉬며 머잖아 무너질 운명인 가부장제의 황혼을 차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한다는 연민의 포즈로 정중히 배웅한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보통의 가족〉
〈보통의 가족〉


4위. <보통의 가족>(감독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1998)와 <봄날은 간다>(2001)로 (박찬욱 감독이 「박찬욱의 몽타주」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연애박사’ 감독의 이미지가 짙게 남아있지만 낭만이 지워진 사랑의 그늘진 현실을 그려낸 <행복>(2007)이나 <외출>(2005)에서 보았듯, 허진호 감독에게는 작정하면 인간사의 균열과 냉기를 가감 없이 담아내는 냉혹한 리얼리스트의 다른 얼굴 역시 존재한다.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베스트셀러로 앞서 이미 세 차례 영화화된 바 있는 「디너」를 원작 삼은 <보통의 가족>은 허진호의 그러한 면모를 극대화한 버전처럼 보인다. 애초에 연애담의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없고, 일말의 낭만성조차 띠지 않는 이 가족 드라마에서 사랑과 우애, 화목과 정직 같은 정상적 가치의 이상은 살아남지 못한다.
 

이 영화는 두 형제를 극단적인 대비 관계로 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수완 좋은 변호사 재완(설경구)은 교통사고의 가해자 형철을 과실치사가 되도록 변호하고, 치매 걸린 어머니를 떠안고 사는 헌신적인 의사 재규(장동건)는 교통사고의 피해자 나래를 살리고자 노력한다. 전자를 부유하지만 도덕성이 마비된 상류계급, 후자는 스스로 부와 명예를 포기한 양심적 지성인처럼 그릴 것처럼 보였던 인물 구도의 전형성은 형 재완의 딸 혜연과 동생 재규의 아들 시호가 술에 취해 노숙자를 폭행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극적으로 뒤집힌다. 혜연과 시호가 자신이 변호한 형철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 없이 저지른 범죄를 합리화하는 걸 보고 경악한 재완은 이대로면 아이들이 괴물이 될 테니 자수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러자 평소 정의로워 보였고 형이 내린 의외의 결정을 반길 줄 알았던 재규가 도리어 반대하며 종국엔 차로 재완을 들이 받아버린다.
 

재규의 부인 연경(김희애)이 자신보다 젊은 형수 지수(수현)에 모종의 질투심을 느끼며 아랫사람 취급을 하려 하거나 근사한 식사 자리를 마련한 형 부부의 부유함에 동생 부부가 은근한 열등감을 드러내는대서부터 서서히 드러나던, 평온함을 가장하는 이면 아래 축적된 채 억압되어 오던 가족의 균열은 이 급작스러운 라스트에서 일거에 폭발한다. 선한 자와 악한 자를 손쉽게 구분 짓는 스테레오 타입의 평면성을 거부하고, 통념이나 이상과는 전혀 다른 관계의 실제, 처해있는 조건에 따라 언제든지 다른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인간 존재의 복잡다단함에 대한 이해의 심도에 닿아있는 올해의 수작 중 한 편.

 

〈땅에 쓰는 시〉
〈땅에 쓰는 시〉


5위. <땅에 쓰는 시>(감독 정다운)

<땅에 쓰는 시>는 한국의 1세대 조경가 정영선과 그가 이룬 성취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인물에 대한 소개에 그치진 않는다. 도리어 감독이 의도한 주제의식의 조형(造形)에 알맞았기에 해당 인물이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선택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조경가로서 정영선의 화두는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잇는 네트워크의 회복에 있는 걸로 보인다. 영화는 서울 선유도 공원부터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과 경춘선 숲길, 오설록 티 뮤지엄 등, 정영선의 손길을 거친 공간의 여러 풍경을 스케치하면서, 개인 일상에서 묻어나는 사유의 조각이 어떻게 작업의 결과물과 연관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작중에 소개되는 정영선의 작업들은 첨단의 인공물에 매몰된 현대인의 생활에 잃어버린 자연, 역사와 전통과의 접점을 만들어줌으로써 팍팍한 일상에 숨통을 트일 휴식의 자리를 마련하고, 차가운 도시 공간에 인간의 온기를 돌려주려는 인문적 기획으로 일관된다. 새롭게 조성된 공간 안에 사람들이 들어와 또 다른 생활의 풍경을 만들고, 그것이 일상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공간에 매여 있으며, 따라서 공간의 배치와 구성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전환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담아내면서 <땅에 쓰는 시>는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돌아볼 것을 요청한다. 무분별한 개발지상주의, 소외와 단절, 극단적인 물화(物化)에 따른 인간 정신의 황폐화. 한국의 근대화란 사회구성원의 행복과 편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성장일변도로만 달려온 폭력의 과정이었고, 그런 비인격성은 도시 공간의 설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왔다.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형식을 바꾸고, 보다 행복한 삶, 인간다운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 쓰는 시>는 당장의 시사적 이슈를 다루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 있어 보다 절실하고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올해의 다큐멘터리다.

 


 

〈댓글부대〉
〈댓글부대〉


그 외 올해의 한국영화 추천작들(무순)

<댓글부대>(감독 안국진)

<여행자의 필요>(감독 홍상수)

<전,란>(감독 김상만)

<한국이 싫어서>(감독 장건재)

<풍경드리프팅>(감독 박홍열, 황다은)

<아침바다 갈매기는>(감독 박이웅)

<미망>(감독 김태양)